·「최정미 외 - 부부로 산다는 것」
원하는 사람이 되어주는 기쁨
014.
때로는 악처가 되어 보는 것
그녀가 악처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왜냐고? 다 남편 때문이지' 그녀는 생각한다.
사람 좋고 실속 없는 남편은 주변 사람들의 딱한 처지를 그냥 넘기질 못한다.
자기 호주머니를 털다 자금이 바닥나면 카드까지 남발하기도 한다.
그 뒤에는 통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빌려 간 사람들도 그의 성격을 훤히 알고 있어서 처음부터 줄 마음도 없다.
그래서 빚 안 갚는다고 원수가 된 사람이 여태껏 한 사람도 없다.
그녀는 또 누군가?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확실한 사람이다.
누군가 돈 약속을 어기면 속에서 불이 나는 사람이다.
다혈질에 목소리도 크고 어릴 때부터 '한 성질한다'고 소문난 그녀였다.
그래서 악역이라면 타고난 적임자다.
‘둘 중에 하나라도 정신 차려야 살림이 제대로 되지 않겠어?’
그녀가 돈 안 갚는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수금하러 다니기 시작하면,
남편의 친구들은 귀신같이 알고 휴대폰을 끄고는 잠수해 버린다.
'이거 자기들끼리 비상 연락망이라도 있는 거 아냐?'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적한다.
끈질기기로 소문난 딸딸이 아빠는 숨어 다니다가 결국 두 손을 들고 자진 납부한 뒤 광명을 찾았다.
딸딸이 아빠는 그녀에게 시달리는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노숙을 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어느 날, 그의 이름으로 천만 원이 넘는 카드 대출 명세서가 우편함에서 발견되었다.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썼어? 손바닥만 한 사업 하면서....,"
당장 전화로 추궁하니 그는 모르는 일이라면서 잡아뗐다.
그러나 그녀가 누군가.
파악해 보니 사업하는 선배에게 자금을 대주느라 카드를 넘겨 준 사건이었다.
그 선배는 자주 왕래가 없어서 천하에 사람 좋은 그가 어떤 마누라와 사는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 선배에게 돈을 갚으라고 닦달을 했다.
처음에 선배는 괜히 위엄을 세우며 자기를 어떻게 보고 그러냐며 호통을 쳐댔다.
하지만 호된 맛을 본 후 싹싹 빌며 돈을 내놓게 되었다.
그녀가 항상 독한 것은 아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그가 원망스럽다.
반면 남편의 친구들은 때로 그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보통 남자들이 사업하다 잘못되면.
아내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 가슴 앓이를 하다 병을 얻거나 술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녀의 남편은 그럴 일이 없으니 말이다.
억척스러운 아내만 믿고 철없이 선심을 팍팍 잘도 써대니 그럴 만도 하다.
그녀의 남편, 지난달 장부를 보여주면서 으스댄다.
"이번 달만 같으면 당신 마나님 되는 거 시간문제야."
그녀가 흘깃 넘겨보니 정말 짭짤하다.
그녀의 '떼인 돈 받아주기' 실력은 확실히 소문이 난 모양이다.
며칠 전에는 혜미 엄마가 떼인 자기 돈을 받아달라고 부탁을 하기까지 했다.
크산티페가 괜히 악처인가.
철학 한다고 쓸데없이 사람들만 몰고 다니며 말만 그럴 듯하게 하는 소크라테스랑 살다 보니 그리 되었지.
그래도 소크라테스는 마누라 덕에 굶어 죽지 않고 감옥에서 죽었지 않은가.
남자는 명분과 체면의 동물입니다. 특히 친구나 선후배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피해를 입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굴레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현실과 명분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아내뿐입니다.
때로는 악처가 될 필요도 있습니다. 험한 세상으로부터 가정을 지키려면 말입니다.
※ 이 글은 <부부로 산다는 것>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07.06.23. 20220601-17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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