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성장교육(인문.철학.교양./부부로 산다는 것

2 - 016. 그녀가 원하는 책을 사다 주는 것

by 탄천사랑 2007. 6. 28.

·「최정미 외  - 부부로 산다는 것」



 

원하는 사람이 되어주는 기쁨


016. 

그녀가 원하는 책을 사다 주는 것
"야! 이게 뭐야!" 그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게 라면 냄비 깔개냐? 왜 이걸 여기다 깔아놨어?"  그가 라면 냄비 밑에서 책을 꺼내면서 힐난조로 물었다.

 

휴일 점심.
그녀가 차려온 라면 냄비 밑에는 그가 아끼는 브레히트 전집 1권이 깔려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깔판이 안 보여서, 그게 눈에 띄기에 그랬지 뭐. 사람이 쪼잔하게 왜 그래?"

그는 화가 치밀었다.
교양 없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야! 이 아줌마야. 그러니까 아줌마 소리를 듣는 거야.
 책에 라면 국물 튀었잖아.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도대체 왜 그래?
 벌써부터 아줌마 티 내는 거야? 그 옷차림 하고는....,
 맨날 운동복 차림에 뭉개기만 하고, 하는 짓이 왜 다 그래?"

화가 치밀자 그동안 지나쳤던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어제 운전할 때는 그게 뭐야?
 나는 내 길 갈 테니까 남들은 알아서 하라는 거야?
 램프 지나쳤다고 그렇게 서 버리면 어떡해? 따라오던 차가 받을 뻔했잖아. 
 운전을 그 따위로 하니까 아줌마들이 욕먹는 거야. 이 아줌마야."

주말을 맞이해 처가에 갔다가 오는 길이었다.
그녀가 우기는 바람에 운전대를 넘겨주었더니 위태위태 곡예운전을 하다가 동작대교에서 진출 램프를 지나쳐 버렸다.
초보 솜씨로는 미리 차선을 바꾸지 못했던 것.
그녀는 램프를 지나친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차를 세워버렸다. 그 대로 위에서.

다시 후진해서 램프로 진입하겠다고 결심했던 모양이었다.
후진도 불법이지만 뒤를 따라오던 차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경적을 울리고 욕을 하고 난리가 났다.

"야! 이 아줌마야! 집에 가서 밥이나 해!"

차선을 바꿔 옆을 지나쳐 가며 한 운전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에 질세라 고함을 치는 그녀.

"밥 하고 나왔다. 이 자식아!"

그는
"일 년에 책 한 권도 안 보고 
 매일 드라마만 보니까 그렇게 교양도 없는 아줌마가 된 것 아니냐"면서 그녀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가 하나하나 주워섬기다 보니 그녀는 천하의 대책 없는 아줌마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가 한참을 듣더니 젓가락을 상에 내려 놓았다.
그러더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는 것이었다. 수돗물 소리가 들렀다.
그녀는 울 때마다 그렇게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건 좀 심했다' 싶은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엎어진 물, 주워 담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그녀를 만난 것은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에서였다.
군대에 다녀와 복학을 한 뒤 맞이한 첫 학기에 신입생으로 들어온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언제나 책을 보는 책벌레였고 습작 솜씨도 괜찮은 편이어서 선배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었다.
그런 그녀가 결혼 2년 만에 책과 담을 쌓은 후안무치 아줌마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저녁 시간이 되가는데도 그녀는 안방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저녁을 굶기라도 할 태세 같았다.
그는 '뭐 먹을 것이 없나'하고 냉장고를 뒤지다가, 그 위에 커다란 노트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꺼내보니 가계부였다.
가계부를 열어보니 그녀의 글씨가 빼곡하게 메워있었다.

부식비부터 병원비, 자동차세, 관리비, 부모님 용돈 같은 것들을 빠짐없이 적어놓았다.
어쩌면 그렇게도 작은 글씨로 잘 정리를 해놓았는지 가계부가 잘 인쇄된 한 권의 책 같았다.
가계부 아래쪽에는 메모란이 있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글이 있었다.

'할인점에 갔다가 서적 코너에 들렀는데 000 씨의 신작 소설이 나와 있었다.
 사고 싶었지만 독한 마음을 먹고 그냥 나왔다. 이번 달에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힘내자 힘!'

그는 속이 쓰렸다.
그녀는 책이 보기 싫어서 외면해 온 것이 아니었다.
빠듯한 생활비를 쪼개고 또 쪼개서 적금을 부어가면서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우느라 잠시 접어두기로 한 것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유일한 책은 가계부 하나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계부 한 권으로 1년을 버티는 왕년의 독서가.

다음 날. 그는 퇴근하면서 서점에 들렀다.
그녀가 보고 싶어 하는 그 소설을 한 권 사서 집으로 들고 왔다.
문을 열어주는 그녀에게 들이밀면서 말했다.

"자! 이제부터 이걸 냄비 받침으로 써."

그녀가 책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학 신입생 시절 곧잘 보여주던 표정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책 한 권을 선물해 보세요. 그녀가 책과 담을 쌓은 것은 독서하기 싫어서가 아닙니다.
빠듯한 삶 때문에 자기개발이란 욕구를 잠시 미뤄두었을 뿐입니다.
그녀가 꾸준하게 스스로를 연마하도록 지원해 주세요. 그녀에게는 책 한 권의 값도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포장마차 술 한 잔의 비용만 아껴도 그녀가 원하는 책 한 권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데 있어 책 한 권만큼 가격 대비 효능이 높은 선물은 없습니다.


                          
※ 이 글은 <부부로 산다는 것>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07.06.28.  20210605-17254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