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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자객열전 - 3

by 탄천사랑 2007. 6. 21.

「이외수 - 자객열전」

 

 


어느 날 계곡에 내려가 세수를 하다가 
담은 팔의 오금에 달걀 크기만한 타원형의 반점 한개가 생겨나 있는 것을 보았다. 
벌레에라도 물렸으려니 했다. 
긁어보니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벌레에 물린 데라면 어떤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져야 했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 버렸다.

며칠 후 다시 보니 몸에는 반점들이 좀 늘어나 있었다. 
역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마치 그 반점들만 남의 피부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역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 버렸다. 
산 속에서 사는 동안 그보다 더한 일들도 여러 번 겪었왔던 터였다.

이 즈음은 점점 실력이 눈부시게 향상되어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럴수록 자주 북문 앞 높이 걸려 있던 
아버지의 목과 옥중에서 혀를 물고 자결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잘리워져 나간 왼쪽 새끼손가락의 몽탁한 끝부분을 어루만지며 자주 어금니를 악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담은 수련을 끝내고 얼굴의 땀을 닦아 내다가 흠칫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손바닥에 눈썹과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많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황급히 몸 구석구석을 살펴 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반점들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긁어 보니 역시 감각이 없었다.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었다.

문둥병이다!
담은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병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진물이 흐르면서 걷잡을 수 없이 살점들도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아무 것에도 의욕을 가질 수 없었다. 
손의 상처 때문에 칼도 제대로 쥐어지지 않았다. 
시험삼아 던져 보니 좀처럼 바로 꽂히는 법이 없었다. 
모든 것이 갑자기 엉망으로 변해갔다. 
절망이었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담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토굴속에 실성한 듯 누워 있었다. 
끝장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이제 산비탈마다 맑은 햇빛이 퍼져 들었고 
그 햇빛 속 여기저기에 투명한 연분홍 진달래꽃이 능선까지 화사하게 거슬러 피어,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열고 있었다.



유노인 내외가 모두 죽자 정심리 사람들은 그들의 시체를 
양지바른 산비탈에다 잘 묻어 주고는 그들이 살던 움막을 불살라 버렸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수년 후, 불살라 버렸던 그 움막자리에 또 다른 움막하나가 생겨났다.
어디서 떠돌다가 나타난 문둥이인지 다른 문둥이 하나가 거기에 살고 있었다.

그는 유노인 내외가 했던 것처럼 낮이면 저자거리로 나가동냥을 하고 밤리면 두문불출 죽은듯 조용했다.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려져서 그 나이를 측정하기는 어려우나
사람들은 그를 죽은 유노인의 아들일런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정심리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갑자기 소문 하나가 퍼지기 시작했는데
내용인즉슨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유는 본시 하동 천금 땅 사람이었다.
젊어서부터 글 잘하고 화필이 뛰어나서 많은 문인들의 총애를 받아온 화공이었다.
자연히 대가집 사랑방을 제집 드나들듯 드나들 수 있었다.
특히 그를 총애하는노선비가 있어 수시로 그를 불러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겨누기를 즐거워 하였는데
그 노선비에게는 무남독녀 외딸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그 노선비가 대취하여 곯아 떨어진 사이 
유가 춘정을 못이겨 그 규수의 방에 몰래 침임해 들어가 그 규수의 꽃다운 나이를 꺾게 되었다. 

그러나 재수가 없으면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법,
그만 그 규수가 덜컥 임심을 하고 말았다.

겁이 난 유는 어느 날 야밤을 틈타 소문도 없이 천금 땅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진갈성에서 다시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후로 전혀 그 규수에 대해서는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으며 
때마침 적당한 혼처가 있어 유는 혼사를 치루고 단란한 살림을 꾸리게 되었다.
그러나 왠지 슬하엔 자식이 없었고 말년에 문둥병까지 얻어 걸렸다.
유는 그 길로 산지 사방을 떠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 고을의 시장에서 
포목을 팔고 있는 아낙 하나를 만나게 되었고 바로 그 아낙이 옛날의 그 규수였다.

유가 천금 땅을 떠난 뒤 그녀 또한 집을 나오고 말았던 모양이었다.
유는 간곡한 사정에 못이겨 그 규수와 하룻밤을 지냈는데 그 아들이 많이 자라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만사는 잘못 얽혀져 있어서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유는 또 오겠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정처없는 길을 떠났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유는 그 아들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아들이 항시 아비의 소식을 알아두고 있다가 
지금에야 문둥이가 되어 그 아비의 무덤을 찾아 왔다.

소문은 그러했지만 어디까지가 정말이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 문둥이는 그저 묵묵히 그 움막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동냥 길에 사람들이 더러 그 소문이 정말이냐고 묻게되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려 주기도 했다.
그리고 해마다 구월 구일이 되면 
움막 한 켠에 조촐한 음식물을 차려놓고 경건한 모습으로 제사를 지내곤 했다.
구월 구일은 유노인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그 문둥이가 
유노인의 아들 일거라는 소문이 맞기는 맞는 일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이제 그 문둥이가 그 움막 속에서 생활한지 삼 년이 조금 지나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의 기구한 운명을 동정하여 
그가 동냥을 다닐 때는 후히 인심쓰기를 주저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문둥이는 동냥길에 특히 자기에게 친절을 베플던 어느 아낙 하나에게 
놋젓가락 한 짝만 얻을 수 없겠느냐고 간곡히 부탁했다.
한벌까지도 필요 없고 한 짝만 있으면 되겠다는 거였다.
이미 손가락들이 모두 무질려져 있어서 젓가락질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의아해 하면서도 그 아낙은 선뜻 놋젓가락 한 짝을 그에게 갖다 주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거의 다 무질러지고 겨우 그 뿌리만 두어개 남아 있는 손가락들로 
그 놋젓가락을 쥐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하는 수없이 두 손을 모두 이용해서 그것을 움켜잡고 이리저리 휘저어 보곤 했는데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판단했던 모양인지 그는 절망적인 모습으로 
사타구니에 얼굴을 꺾어 넣고 짐승처럼 오열하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 것일까.
죽은 유노인의 뒤를 이어 혹시 화필이라도 잡아 보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더욱 이상한 일은 그 뒤 부터였다.
한참을 오열하다 말고 그는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그 젓가락을 다시 한번 집어들고 밖으로 나와 사방을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바위 하나를 발견하고 
그리로 가서 그 젓가락을 두 조막손으로 버팅겨대고 열심히 끝을 갈아대기 시작했다. 

그는 그 젓가락의 끝을 날카롭게 만드는데 꼬박 이틀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젓가락이 예리한 끝을 가지게 되자 
그는 일그려진 얼굴에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달이 떠 있었다.
달빛 아래서 잠시 그는 호홉을 가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 바위에 걸터 앉아 
두 발바닥으로 젓가락 뒷부분을 바위에다 받쳐 놓고는 날타로운 끝부분을 하늘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오른쪽 조막손을 그 날카로운 끝부분에 갖다대고는 
세차게 어금니를 악물면서 아래로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젓가락이 천천히 그의 조막손을 파고들고 있었다.
핏방울이 뚝뚝 바위에 떨어져 달빛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흐흐흐흐.....,
그의 입에서는 절로 고통스런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이 더욱 처참하게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젓가락의 끝이 조막손을 관통해서 밖으로 삐쭉하게 내밀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조막손으로 젓가락을 비스듬히 움켜쥐고 있는 것 같은 형국이였다.

그 뒤부터 그는 젓가락을 꿴채로 잠들고 젓가락을 꿴채로 돌아다녔다.
물론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품속에 깊이 감추고 였다.

언제부터인가 문둥이가 살고 있는 움막에서는 이상한 소리 하나가 들리기 시작했다.
딱!
딱!
딱!
규칙적이고 야무진 소리였다.
새벽까지 그 소리는 계속되였다.
그러나 그 소리가 처음부터 규칙적이고 야무지지는 않았었다.
맨처음 그 소리는 팅가랑, 팅가랑 하는 소리로 시작 되어 졌었다.
소리와 소리 사이의 간격도 일정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아주 이따끔 딱, 하는 소리가 한번 들리곤 했었다.
그러더니 차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처음과는 반대되는 현상으로 변해 갔다.
딱, 하는 소리의 연결속에 아주 가끔 팅가랑, 하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러다가 이제 팅가랑, 하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소리와 소리 사이도 아주 규칙적이고 빨랐다.

그러나 그 소리는 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쉭, 쉭, 쉭, 하는 소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세월은 흘렸다.
담이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 온 지 어언 십삼 년,
그동안 세상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새로운 집들이 지어지고 새로운 길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아직도 담이 노리는 마헌의 목숨은 붙어 있었다.
그 명성은 하늘을 찌를듯이 높아 있었다.

이제 누가 기억해줄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십삼 년전에 자기의 벗을 역적으로 모함하여 그 일족을 멸하고 
그러한 공을 뒷받침하여 출세의 지름길로 살았음을.

오늘은 날씨가 더 없이 쾌청했다.
북문 부근 마헌의 집 대문 앞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문전성시 그대로였다.
마당에도 방에도 꽉꽉 들어차 상들을 받아 놓고 법석들을 떨고 있었다.
바로 마헌의 환갑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당에서 가장 구석진 곳을 차지하고 
아까부터 한 사내가 등을 돌린채 남루한 모습으로 작은 상 하나를 받아 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명색이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남의 잔칫 날에 어떻게 남루한 옷을 입고 가랴.
마당 가득 들어차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깨끗하고 단정한 차림새들이었다.
그래서 차림새가 남루한 그 사내의 모습은 더욱 남의 눈에 돋보였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식들을 입에 넣어 우물거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들어 왔을까.
그 얼굴을 보니 바로 죽은 유노인의 아들이라는 문둥이였다.

천형 天刑을 받은 문둥이에게도 환갑날 국수 한 그릇을 주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 있어 
누군가 그를 저렇게 마당 구석진 곳에 숨어서라도 상 하나를 받아 놓고 혼자 외로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가 음식을 먹는 방법이 참으로 기이했다.
젓가락 한 짝으로 이것 저것을 쿡쿡 찔려서 입속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는데,
그 동작이 아주 능숙하고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 젓가락은 그의 오른쪽 조막손에 관통되어져 있었다.
날마다 그것만 닦았는지 반짝반짝 운이 났다.

그 젓가락은 자유자제로 길이가 조정되어 지는 것으로 보아 끼웠다 뺏다 할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하객들 중에서 아무도 그 광경을 본 사람은 없었다.

여러분들.
이윽고 멀리 대청 위에서 쩌렁쩌렁한 음성 하나가 들려 왔다. 
마헌이었다.
얼굴이 술에 붉게 익어 있었다.
곁에는 청의를 걸친 무사 하나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곁으로 다가 설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마치 허리뼈가 녹아 없어진 것처럼 상체를 앞으로 꺾어내리곤 했다.

문둥이 사내는 어느새 돌아앉아 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까와는 정반대의 자세였다.
그리고 눈초리가 무섭도록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마헌은 사람들을 일일이 둘려보고 나서는 다시 대청을 향해 걸어 가고 있었다.
문득 문둥이 사내의 얼굴에 어떤 그늘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헌은 다섯 발자국 정도를 떼어 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뒤로 몇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문둥이 사내의 눈이 반짝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마헌은 음식을 먹고 있는 한 사람에게로 다가 가서 일어서려는 
그 사람의 어깨를 한 손으로 눌려 앉히고는 허리를 굽혀 무슨 귓속 말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문둥이 사내와는 정면으로 약 삼십보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허리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머리만 보였다.
머리는 잘 빗어올려 정수리에 둥글게 상투를 치고 흰 댕기로 맵시있게 묶어 놓았는데 
그 아래로도 백발이 길게 내려와 어깨를 덮을 지경이었다.
문둥이 사내는 조용히 그러나 날카로운 눈초리로 
정수리 그 뭉특한 머리카락 뭉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귓속말을 모두 끝냈는지 
마헌은 다짐한듯 상대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굽혔던 허리를 펴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둥이 사내가 날아 다니는 파리를 쫓듯 가볍게 손으로 허공을 한번 뿌리쳤다.
그리고 두 팔로는 곧게 땅을 짚고 두 발로 상 밑을 떠받치어 민첩한 동작으로 빙그르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자세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이다.

문둥이가 허공을 가볍게 한번 뿌리쳤을 때 
무엇인가가 손끝에서 반짝했는가 싶었는데 그러나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다.
모든 시선들이 마헌에게로 집중되어져 있었다.
문둥이 사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등을 돌린채 음식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젓가락 하나가 여전히 그의 조막손에 끼워져 있었다.

마헌은 일어서려다 말고 짤막한 비명과 함께 흠칫 몸을 굽히는 기색이더니
그대로 음식상 위에 배를 깔고 엎어져 버렸다.
그런 다음 한번 몸을 뒤척이더니 그대로 숨을 거두어 버렸다.
참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죽음이었다.

곁에 섰던 청의의 사내가 번개처럼 칼을 빼들고 
마헌이 아까 귓속말을 해 주던 사람의 목을 단칼에 내리쳐 동강내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마도 그 청의의 사내는 바로 곁에서 누군가가 마헌을 살해한 것으로 믿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마헌의 몸은 곳곳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바늘 끝만한 상처하나 없이 깨끗했다.
도무지 왜 죽었는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시체가 땅에 묻힐 때까지,
묻혀서 살이 모두 썩어 없어진 후에까지 
이 세상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삼십 년 동안 한이 맺혀 있던 담의 원수는 이렇게 해서 갚아졌다.


그렇다.
한 세상 사는 일이 그저 뜬구름 같은 것,
세월은 흘려 담도 죽었다.
물론 죽기 전에 그 청의의 사내와 한판 승부가 있었다.
그 이전에 담의 실력은 이미 사람의 그것은 아니어서 
젓가락을 던지면 날아가는 젓가락이 눈에 보이지 조차 않을 정도로 빨랐었다.

담의 젓가락은 
그 사내의 칼을 제압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신묘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담은 그 사내가 예전에 그렇게 했듯이 젓가락 하나로 그 사내의 옷을 젖히고 
간단히 그 사내의 가슴까지 파고 들어가 가슴팍에다 열십자 하나를 깊이 그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그동안의 빚진 이자를 갚듯 
젓가락으로 그 밑에 짧게 한 일자를 긋는 것으로 승부의 끝을 마무리 지었다.
바로 선비 사 士자 였다.

담이 죽은 뒤 사람들이 그를 유노인 내외의 무덤곁에 나란히 묻고 그의 움막을 태우려고 했을 때였다.
움막 속에 있는 기둥이며 문지방이며, 나무라는 나무들마다 빠끔한 구멍들이 수없이 뚫어져 있었다.

그리고 수십 장의 송판들도 움막 속에서 발견되였다.
그 송판들 또한 한결같이 빠끔한 구멍들이 수없이 뚫어져 있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생겨 난 구멍일까.
하지만 사람들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움막과 함께 그 송판들을 태워 버렸다.

더 후세에 마헌의 자손들이 가세가 몹시 기울어짐을 걱정하여 이름난 지관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대답인즉슨 묘자리가 나쁘다는 얘기였다.
이장을 하기 위해 그 무덤을 파서 형태를 보니 살은 썩어서 간 곳이 없고 
희미한 뼈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뼈를 하나하나 옮기다가 머리카락이 삭아내린 두 개골 한 복판,
백회혈 白會穴 자리에 무엇인가 박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뽑아서 자세히 보니 놋젓가락이었다.
끝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녹슬지 않고 그 빛이 생생해서 햇빛에 순금처럼 빛나고 있었다.
섬뜩한 느낌이었다.
- 끝.


※ 이 글은 <자객열전>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이외수 - 자객열전
나남 - 1983. 03. 25.

[t-07.06.21,  20220611-16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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