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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자객열전 - 2

by 탄천사랑 2007. 6. 19.

「이외수 - 자객열전」




세월은 저대로 덧없이 흘려가서 다시금 겨울이 닥쳐왔다.
밤이면 나뭇가지들이 산 속에서 죽은 모든 영혼들을 데리고 와서 끊임없이 바람결에 울고 있었다. 
더러는 토굴의 거적을 올리고 밖을 내다 보았다. 
밖에는 가끔 창백한 달빛. 
맞은 편 산머리는 하얗게 눈이 쌓였고 어디선가 늑대가 슬피 우는 소리로 들려왔다.

가을 내 모아 놓았던 양식을 아껴 먹으며 낮이면 덫을 놓아둔 곳을 돌아다녔다. 
자주 토끼가 잡혀 주었다. 
껍질을 벗겨서는 옷을 만들어 입고 고기는 구워서 양식으로 삼았다. 
계곡으로 내려가 주워온 차돌에다 칼등을 치면 반짝반짝 불똥이 튀었다. 
거기에다 수리취 부빈 것을 갖다 대고 불을 만들어 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제 그 생활은 어느 정도 질서가 잡혀진 셈이었다. 
칼솜씨도 많이 좋아져 있었다.

아직 움직이는 물체를 적중시킬 수는 없지마는 
거리나 표적의 대소에는 별로 구애받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는 차츰 칼을 던지는 자세를 여러 가지로 변형시켜 가고 있었다. 
뛰면서 던지기, 구르면서 던지기, 회전하며 던지기, 누워서 던지기, 그리고 강약의 조절, 
빠른 동작 따위도 함께 연습해 나가고 있었다. 
표적만 보면 칼이 저절로 손 안에서 알맞게 잡혀져 있었다. 
이를테면 손과 칼이 쉽게 감정의 일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가 마침내 칼을 거의 자유자재로 놀릴 수 있게 되었을 때는 
그 겨울이 지나가고 잔설이 녹고 
다시금 봄이 되고 꽃들이 피고 그 꽃들이 진 다음 녹음이 짙어 갈 무렵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원수를 갚겠다고 선뜻 하산할 만한 처지는 못되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여러 가지의 공격 방법을 연구하고 방어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도 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적이 앞에 있는 경우, 적이 옆에 있는 경우, 적이 뒤에 있는 경우, 
그리고 자신이 적에게 완전히 포위당했을 경우 따위에 대비해서 칡넝쿨에 나무토막을 매달아 놓고 
여러 가지로 공격과 방어의 형태들을 꾸미어 밤낮없이 비지땀도 흘렸었다.

그러나 완전히 숙달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스스로의 판단으로도 많은 부족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피눈물 나는 수련 속에서 많은 낮과 밤이 지나가고 다시 겨울이 오고 꽃이 피고, 
그 꽃이 진 다음 녹음이 우거졌다.

이제 그는 그 모습도 그 행동도 완벽한 산짐승의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눈에서는 야생의 푸른 광채가 빛나기 시작했다.



담은 산비탈에 가만히 서 있었다.
가을이었다. 
주변에는 키 작은 싸릿대들이 듬성듬성 산재해 있었는데 
이미 그 싸릿대들은 잎이 모두 져버리고 잔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다른 나무들은 아직도 많은 잎들이 남아 있었고 이따금 바람이 불면 그것들은 바람부는 쪽으로, 
바람부는 쪽으로 새떼들을 가득히 날리곤 했다.

담은 그러한 산비탈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하나의 깎아놓은 짐승을 방불케 했다. 
그는 아무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으며,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 전체에서는 
육감의 질긴 올실들이 무수히 풀려나와 사방으로 전류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참 동안 그 모습은 바뀌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순 그의 눈만 번뜩하고 창끝 같이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손도 날카롭게 한 번 뿌려지는 것 같았다. 
찰나적인 동작이었다.

그는 이제 천천히 싸리가지를 헤지면서 앞으로 한참 동안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리고 걸음을 멈춘 곳에서 허리를 굽혀 잿빛 물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산토끼였다. 
정수리에 깊고도 정확하게 칼 한 자루가 박혀 있었다.

이제 그의 모든 신경들은 동물적으로 잘 발달되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조금 전 산비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부터 어떤 작은 동물이 움직이고 있음을 육감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물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 내고는 
그 동물이 사정거리 안에까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산토끼 한 마리를 잡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었다. 
그의 칼솜씨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던 것이다.

보아라. 
나는 네 놈의 목숨을 반드시 내 손으로 절하고야 말리라. 
담은 산토끼를 들고 토굴로 들어가면서 눈이 내리기 전에 하루속히 하산을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눈은 증오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어느세 산에 들어온 지 삼 년이나 지나 있었다.



진갈성 북문 부근의 어느 객주에 며칠 전부터 낭인 차림의 젊은이 하나가 묵고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서는 무인 출신 같았으나 가끔 책을 뒤적거리는 것을 보아서는 문인 출신 같기도 했다. 
유난히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젊은이었다. 
그리고 그 눈은 어딘지 모르게 야생의 분위기를 풍겨 주고 있었다. 
바로 담이었다.

어떻게 잠입했을까.
깨끗한 의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 매무세도 단정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예전과는 많이 변해 있었다. 
해맑은 귀공자의 모습에서 거친 산사람의 모습으로 달라진 그를 쉽게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렇더라도 그는 모든 행동거지를 조심했다.

하동은 이제 완전히 무인들이 그 세를 잡고 있었다. 
특히 진갈성은 그 도가 매우 지나쳐서 칼만이 오직 법처럼 생각되어질 정도로 변해 있었다.

간사하여라.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여. 
어이없게도 모두들은 이제 거의가 무인들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문인을 세상에서 가장 지고한 인간으로 믿어 왔던 시절은 간 곳 조차 없었다.

자연히 곳곳에서 칼과 칼이 맞부딪치고 팔과 목들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담은 북문 부근의 그 객주에서 원수를 갚을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놈의 집은 이제 대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웅장하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안팎으로 경계가 삼엄했다. 
담은 두 번이나 잠입에 착수했다가 물러서고 말았었다. 
아무래도 좀 더 치밀한 계획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생각보다는 한결 활동이 어려워 보였다. 
무작정 그 대궐같은 집안으로 들어가서 이리저리 헤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날씨는 겨울로 접어 들고 있었다. 
날마다 바람이 냉랭하고 하늘이 회색으로 을씨년스러웠다. 
곧 눈이 내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직도 돈은 넉넉히 남아 있었다. 
산짐승의 모피를 팔아 얻은 돈이었다. 
이 돈이 모두 떨어져 버리기 전에 일을 성사해야만 할 것 같았다.

유노인 부부는 작년에 한 달 간격으로 나란히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문이었다. 
평생에 그 은혜를 갚지 못함이 못내 애석하기 짝이 없었다.

담은 객주에서 원수 갚을 날을 기다리며 그저 책이나 읽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패의 칼을 찬 무사들이 왁자지껄 객주 안으로 몰려 들었다. 
그들은 방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술을 청해 마시는 모양이었는데
그 서슬들이 여간 시퍼런게 아니어서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얼씬도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담이 그들과 한판 승부를 겨뤄야 할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뒷간을 다녀 오는 길에 재수 없게도 문을 열어놓고 술을 청하던 그들 중의 하나와 
그만 눈길이 딱 마주쳐 버렸던 것이다.

"어디 사는 놈이냐."

눈길이 마주친 사내는 못마땅하다는 듯한 어투로 담에게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담은 들은 체 만 체 자기 방으로 묵묵히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자질구레한 일이 끼어 들어 대사를 그르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저 놈이?"

곧 시비를 걸던 사내가 내달려 와 방금 담이 들어간 방문을 벌컥 열어 젖혔는데 
당장 목이라도 비틀어 놓겠다는 기세였다.

담은 태연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사내의 성깔을 돋구어 주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태도였다.

"이놈, 너 문인의 종자로구나. 어디 한번 죽어 봐라."

사내는 신발을 신은 채로 성큼 방 안으로 들어 섰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담의 턱을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그러나 담의 몸놀림은 유연하고도 재빨랐다. 
전신을 활처럼 뒤로 휘어 가볍게 한바퀴 구르더니, 
다시 저만치서 단정한 자세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사내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지 이제 닥치는 대로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내는 결코 담의 적수가 아니었다. 
사내가 한 마리 우둔한 곰이라면 담은 한 마리 작고 날렵한 원숭이었다. 
사내가 공격을 가할 때마다 담은 탄력있고 재빠른 동작으로 그것을 피해 버렸다. 
그러면서 기회있는 대로 들고 있는 책을 펴들고는 천연덕스럽게 그것을 들여다보곤 했다.

사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듯 방구석에 놓여 있는 긴 촛대를 집어 사정없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놋쇠로 만든 촛대였다. 
머리통을 맞으면 수박 깨지듯 깨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사내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담이 일순 사내를 향해 재빨리 들고 있던 책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찰나적으로 사내가 책을 피하려고 고개를 고개를 젖히는 순간 
작은 물고기가 빠르게 물 속을 스쳐가듯 
단검 하나가 배때기를 뒤집으며 허공을 스쳐가 번뜩 사내의 손목에 박히는 것이 보였다. 
뎅겅 촛대가 떨어지는 소리, 
어느새 담의 손에는 여러 자루의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안 나가면 네 목에다 던지겠다...... 담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내는 일단 밖으로 달아 났다. 
그리고 동료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손목에 박힌 단검을 뽑아 내었다.

"보통 놈이 아니다."

사내는 자기의 장검을 왼손으로 비껴들고 다시 담의 방문 앞으로 돌아왔다. 
역시 장검을 빼어든 사내의 동료들이 하나 둘 사내 뒤로 묻어 왔다.

그러나 담은 별로 걱정할 게 없다는 듯 태연히 책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방문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담을 공격하자면 그 하나밖에 없는 방문 안으로 들어서야 하겠는데 
그러자면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이었다. 
한꺼번에 문속으로 들어와서 덤빌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문이 있는 한 언제나 일 대 일로 싸워야 한다는 얘기였다.

"나오너라."

사내들 중의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미쳤다고 나가랴, 담은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답답했는지 성질 급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성큼 툇마루로 올라섰다. 
그러나 방 안까지 들어 올 수는 없게 되었다. 
두 개의 단검이 동시에 바람을 가르고 그 사내의 발끝 앞에 날아와 꽂혔던 것이다. 
사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담은 그 해답을 가르쳐 주기나 하려는 듯 다시 단검 하나로 허공을 갈랐다. 
그것은 낮게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서 둥글게 뭉쳐 올린 사내의 머리카락 속으로 가볍게 박혀들었다. 
섬뜩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물러 나거라."
사내들의 등 뒤에서 냉엄하면서도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길을 터주는 사내들 틈을 비집고 청의 靑衣를 걸친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서려있는 풍모였다. 
막되먹은 칼잡이와는 그 느낌이 완연히 달랐다.

"나오너라."

청의의 사내가 담을 향해 명령하듯 말했다. 
그러나 담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냐. 싫다면 할 수 없다. 강제로라도 나오도록 하는 수밖에."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두 개의 작은 표도 剽刀가 비늘을 희번득거리며 날카롭게 담을 향해 날아들었다. 
무서운 빠르기였다.

담은 우선 다급하게 그것들을 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표도는 숨쉴 틈도 주지 않고 계속되었다. 
땅바닥에도 벽에도 표도들은 날아와 꽂혔는데 그것들은 모두 아슬아슬하게 담의 몸을 비껴서 지나쳐 갔다. 
그리고 그것을 허겁지겁 피하다보니 담은 자신도 모르게 문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미처 손 한 번 쓸 틈도 없었다.

졌다, 라고 담은 생각했다. 
왠지 이 사내의 표도가 자신의 단검보다는 한 단계 높은 경지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떠냐. 이번에는 칼이다."

청의의 사내는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 사이 담이 재빨리 단검 하나를 던졌는데 
사내는 간단히 몸을 옆으로 비껴서며 그 단검을 칼자루로 쳐 버렸다.

쉑!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며 사내의 칼이 날아 들었다. 
담은 전신에 오싹 소름을 느끼면서 몸을 옆으로 튕겨 내었다. 
그러나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담은 마당으로 내려와서 정신없이 이리저리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담의 몸은 마치 뼈까지도 고무질로 만들어져 있는 것 같았다. 
부드럽고 유연했으며 탄력있고 가변성이 있었다. 
그러나 사내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 
쇳소리를 내며 사내의 장검이 사방에서 담을 향해 난무하고 있었다. 
담은 마치 새의 부리를 피해 쫓겨 다니는 메뚜기 같이 이리저리 정신없이 튕겨져 나갔다.

순간적으로 틈만 있으면 번개 같이 단검을 뿌리곤 했었지만 단검은 모두 빗나가거나 저지당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어느 한 순간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좌측으로 회전하면서 상대편의 빈 틈을 엿보기 시작했다.

보았다.
찰나적으로 담이 먼저 사내의 허리가 비어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 단검 하나를 번개처럼 그리로 집어 던졌다.

그러나 어떻게 된 셈일까. 
보다 빨리 사내는 피하면서 담의 앞으로 바싹 다가 들었다. 
담이 다음 동작을 취하려 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늦어 있었다. 
사내의 장검이 먼저 담의 허리밑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담이 흠칫 놀라는 순간 사내의 왼편 팔꿈치가 담의 명치 급소를 깊이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숨이 컥 막혀 들었다. 
그리고 이어 머리에도 심한 충격이 떨어져 내렸다. 
담은 그대로 맥없이 풀썩 무너져 앉았다. 
그 모습은 마치 옷 속에 있는 담의 육신이 풀썩 꺼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보아하니 스승도 없이 혼자 익힌 모양인데 그 몸놀림이 놀랍구나. 
  목숨만은 살려두기로 하자."

청의의 사내는 가볍게 장검을 한 번 뒤척여 담의 가슴을 헤치고 
거기에 선명한 열십자 하나를 그려 놓았다. 
가벼운 손놀림이었는데도 칼은 상당히 깊이까지 파고 든 것 같았다. 
흉터가 생길 터였다.

담이 한참 후에 정신을 차려 보니 방 안이었다. 
문을 열고 내다 보니 마당은 그대로 텅텅 비어 있었고 
사내들이 남겨 두고 간 야유만이 마당 가득 낭자하게 고여 있는 것 같았다.

"아유, 어쩌자구 그런 사람들허구 칼놀림을 하려 드셨수."

주모가 근심스런 얼굴로 담을 일으켜 냉수 사발을 손바닥으로 받쳐 주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청의의 사내는 공교롭게도 원수 마헌의 심복이었다. 
놈의 집에서 무사들을 부리는, 바로 칼꾼들의 우두머리격인 사내였던 것이다.

더욱 비참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담은 그 길로 그만 실의에 빠져 다시 입산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담은 날마다 패배의 쓴맛 때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산은 천년의 침묵 속으로 가라앉아 있는데 
바람만이 골짝과 골짝을 넘나들며 담의 가슴 속을 칼질하고 있었다.

담의 패배는 확실하고도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변명 따위를 갖다 붙여볼 여지조차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담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 청의의 사내가 원수 마헌의 휘하에 있다는 사실과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원수 마헌의 휘하에 있는 사내에게 자신이 패했다는 사실이었다.

담은 그 때 원수를 갚지 못하고 한 번 죽었던 것이나 다름 없었다. 
부끄럽기가 이를 데 없었다.

담은 겨우내 새로운 비술을 찾기 위해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해 보았었다. 
그러나 마땅한 비술은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었다. 
다만 그 사내의 검법들을 다시 한번 상기해서 자신의 허점들을 보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산 속의 겨울은 그 어디의 겨울보다도 지루했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이미 살구꽃이 무더기로 피어 눈부실 때인데도 어이없어라, 
산 속에서는 자주 희끗희끗 눈발이 흩날렸다.

담은 그 눈발 속에서 밤낮없이 청의의 사내를 상상했다. 
청의의 사내가 휘둘러대는 무서운 장검의 날카로움 섬광들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섬광들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단검을 날리는 연습에 몰두했다. 
담은 좀 더 자신의 단검들이 날카로워지게 하기 위해서 
팔에다 무거운 나무토막을 매달아 놓고 하루에도 몇 백 번씩이나 던지는 연습을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담은 알고 있었다. 
반드시 비술을 하나 체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이제와서야 뼛속 깊이 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비술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지를 담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어느새 산비탈에는 잔설이 녹고 있었다. 
계곡의 물소리도 약간 높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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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7.06.19.  20210606-15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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