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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1.권형술-편지/프롤로그

by 탄천사랑 2007. 7. 16.

「권형술 - 편지」

[190708-183256]


언젠가 남편이 그랬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건너야할 자신의 사막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사막을 건너는 길에 나는 오아시스를 만났다. 

푸르고 넘치는 물,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오아시스를 지나 
나는 이제 그 사막을 건너는 법을 안다. 

한때 절망으로 울며 건너던 그 사막을, 나는 이제 사랑으로 건너려 한다. 
어린 새의 깃털보다 더 보드랍고, 더 강한 사랑으로



프롤로그
내가 남편으로부터 첫 편지를 받은 것은 그가 세상을 따난 지 보름뒤의 일이었다.

그떄 나는 서울 근교 어느 수목원 안의 그림 같은 집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결코 한 순간의 충동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내곁을 떠나던 날 이후로 줄곧 그 일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 이미 그 전부터,
그가 생의 마지막 한 점을 향해 서서히 작아져 가던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육신이 내 곁에 준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나를 배신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삶이 나를 저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 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내겐 전 생애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던 그 이전의 스물 여섯 해와 
그를 잃은 후의 보름 남짓한 기간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때 그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숨막힐 듯한 연애 시절에도 쓰지 않았던 편지를 그는 죽은 다음에야 써 보낸 것이다.

나는 다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부재가 나에게 죽음을 생각했던 것처럼, 
한 통의 편지로 증명된 그의 존재는 당연히 나로 하여금 삶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편지는 한 통으로 끝나지 않았다.
내가 그를 필요로 할 때면 그는 어김없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마치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서서히 그가 나와 함께하는 방식에 적응해 갔다.
그의 부재로 인한 상처는 점점 아물어갔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나는 내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삶의 한 정점에 서 있음을 알게 됐다.

그것은 한 아름다운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손을 맞잡고 이끌어줌으로써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그 두 사람, 
나와 내 남편의 이야기이다.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사랑을 가진 한 남자와 
그 사랑을 받아 안을 부드러운 가슴을 가진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내 남편 조환유는 1991년 9월 20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 하나였고, 
나는 스물 여덟이었다. 
가을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던 이틀 뒤, 
그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뿌려졌다.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보다 더 잘 그를 묘사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나무를 사랑했고, 
풀을 사랑했으며, 
숲을 사랑했다.
그보다도 더 그는 사람을 사랑했다

그는 한때 더 큰 세상을 품으려 했던 적이 있었다.
늘 숲과 함께 했던 그는 보다 더 큰 숲을 향한 열정을 끓임없이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결코 과장되거나 현실 저 너머를 향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랑의 출발은 작은 배품이었다.
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높고 웅대한 사랑을 하나의 작은 씨앗에 응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씨앗을 작은 꽃화분에 담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웃음만큼이나 소박하고도 아름다운 간이역에서,
그는 쓸쓸한 세상을 지나는 이름 모를 순례자들에게 곱게 키운 꽃 한 송이를 달아 주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 이 글은 <편지>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권형술 - 편지
바다출판사 - 1997.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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