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영 - 베니스의 개성상인」
27.
유로 퀘이크
1640년 유럽. 신교 Protestant와 구교 Catholic로 갈려서 싸우던 30년 전쟁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1635년, 대륙의 강자 프랑스가 신교 편으로 참전하면서 전세가 신교 측의 우위로 기울게 되었다.
구교 국가이면서도 국가이익에 따라 신교 측으로 참전을 한 프랑스.
이제 오랫동안 유럽 세계를 지배해 왔던 로마교황의 권위는 안전히 쇠락하고
도그마 dogma 敎理의 차이에 따라 갈라져서 싸웠던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제질서를 이루게 된다.
유럽 대륙을 전화 戰禍로 물들이며 30년간이나 지속됐던 30년 전쟁(1618~1648)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의 체결과 함께 끝을 맺고 새로운 유럽이 탄생하게 되었다.
중세 유럽을 지탱하던 강대국의 해체와 로마교황권의 몰락, 이로써 유럽의 대변동,
유로 퀘이크 Euroguake가 시작된다.
이후로 유럽 국가들은 봉건국가에서 중앙집권화된 절대왕정으로 이행되는 숨 가뿐 행보를 거듭하게 된다.
절대왕정을 떠받치는 양대 기둥인 관료조직과 상비군 제도,
이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각국은 재정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
보호무역을 근간으로 하는 중상주의 重商主義를 표방하기 시작한다.
종교전쟁의 시대가 가고 경제전쟁의 시대가 온 것이다.
안토니오는 오늘도 한복을 입고 있었다.
1640년 알비에서의 가을. 안토니오는 마지막 가을을 맞게 되었다.
점점 숨이 차오는 가슴과 아스라이 멀어지기만 하는 기억, 그러나 조금도 후회 없는 삶이었다.
부모형제를 잃고 고향을 떠나 멀리 이탈리아까지 오게 되었지만,
개성상인으로서 힘차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줄리에타와 줄리오, 줄리아가 곁에서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안토니오는 눈을 뜨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스스로도 마음이 편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후회 없이, 그리고 힘차게 살아왔던 생을 마감해야 할 때가 가까워 온 것이다.
안토니오는 신부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종부성사를 부탁드려야 할 것 같았다.
--- 고향에도 지금은 가을이겠지.....
아스라한 기억 속에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고향산천과 부모형제의 모습.
--- 나의 이름은 유승업....,
안토니오는 자꾸만 멀어져 가려는 기억을 붙잡기라도 하듯 자신의 본명을 중얼거려 보았다.
그러자 아버지, 어머니, 명이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고
또 자신의 고향을 떠날 무렵 숙모와 함께 외가로 갔던 나이 어린 사촌 동생의 모습도 떠올랐다.
--- 그 아이 이름이 승규였던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지금 고향에서 자신을 대신해 가업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줄리오가 자신의 뒤를 이어 상인의 길을 걷듯이,
승규의 후손들도 고향에서 자랑스러운 개성상인의 후예로서 가업을 이어갈 것이다.
안토니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잠들듯 눈을 감았다.
고향을 떠나 먼 이탈리아까지 오게 되어 안토니오 꼬레아로서 힘차게 살았던 개성상인 유승업은
이제야 비로소 꿈에서도 그리던 고향산천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안토니오가 이승의 강을 건너는 순간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것은
고향에서 열심히 가업을 이어가고 있을 후손들의 모습이었다.
28.
한복을 입은 남자.
유명훈은 무엇에 놀라기라도 한 듯 눈이 떠졌다.
뒷골이 무척이나 아팠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과음을 했나 보다.
그리고 부사장실에서 그냥 잠이 들었던 것이다.
머리를 두어 번 흔들어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맑은 공기라도 마시면 좀 나아지려니 여기고 밖으로 나섰다.
----안토니오, 대성황입니다.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모란테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명훈은 얼마 전부터 자신을 세례명대로 안토니오로 부르도록 하고 있었다.
랠리에서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적을 거두게 되자 딜러들로부터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사에서도 꼬레아 캄파넬라 상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을 했다.
어려운 모험을 했던 보람이 있었다.
그간의 어려움이 일시에 사라지는 듯한 하루였다.
유명훈은 공장부지로 나섰다.
새벽 공기가 마냥 상쾌하기만 했다.
"누구야?"
경비원이 소리치며 다가왔다.
이 시간에 공장을 배회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기에 수상하게 여기고 달려온 것이었다.
"부사장님 아닙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아침 공기가 맑기는 합니다만 아직은 찬 기운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옷은......?"
경비원은 겸연쩍게 웃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유명훈은 그제야 어제 축하연에서 입었던 한복을 그대로 입고 잠이 들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경비원 말대로 아직은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그러나 기분은 몹시 상쾌했다.
서북 계획이 이제서야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안가 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아드리아해 너머로 막 해가 솟아 오르려 하고 있었다.
해돋이 광경은 투지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유명훈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국제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갈라져 있었던 세계는 동구권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조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념으로 대립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각국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경제전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차 지역 경제로 블록화되면서 부호 무역의 장벽을 쌓게 될 것이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으며 또 반대일 수도 있는 현실.
그래서 EC 통합에 대비해서 역내에 생산기지를 마련하고
동구권으로 진출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서북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비로소 첫 결실을 보게 된 마당이었다.
찬바람이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명훈은 문득,
안토니오 꼬레아도 여기에 서서 아드리아해의 일출 광경을 바라보며
투지를 키웠던 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축하연에서 한복을 입었던 까닭도 방에 걸어 놓은 그림 속의 남자,
안토니오 꼬레아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성상인의 선조였던 안토니오 꼬레아.
그 안토니오 꼬레아가 개성상인의 투지를 보여 주었던
꼬레아 캄파넬라 상사의 경영인으로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유명훈은 감회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유명훈은 심호흡을 하며 아침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폐 속까지 상쾌했다.
그리고 안토니오 꼬레아의 뒤를 이어서
꼬레아 캄파넬라 상사를 멋지게 운영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해가 아그리해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주위가 온통 붉은 빛이었다.
그것은 새 출발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한복이 바람에 훝날렸다.
유명훈은 떠오르는 해를 가슴에 안기라도 할 듯 양팔을 활짝 펼쳤다. (p390)
※ 이 글은 <베니스의 개성상인>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오세영 - 베니스의 개성상인
장원 - 1993 0.4. 01.
[t-07.07.22. 210702-18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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