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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 1.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by 탄천사랑 2007. 7. 23.

·「성석제 -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어느덧 바람 소리에 쇳소리 金聲가 섞였다.
가랑잎이 마당을 뒹굴며 온몸으로 내는 소리가 거세질수록 가을은 깊어간다. 이윽고 겨울이 올 것이다.
겨울은 준비를 하고 맞아야 하는 계절이다. 양식과 의복, 집안 살림 모두 여축 餘蓄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이번 겨울 지나 봄이 되면 맏딸 재희가 시집을 간다. 집안의 개혼 開婚이다.
김 씨 부인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베틀 아래쪽에서 책을 보며 앉아 있던 재희가 '어머니 어찌 또 한 숨을 쉬시나요'하고 묻듯 고개를 들어 바라본다.
김씨부인은 눈 속에 들키면 안될 무엇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얼른 눈을 내리깔고 짐짓 고개를 흔든다.
재희는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베틀이 있는 방에 드나들긴 했어도 도무지 길쌈에는 재주가 없다.

"남경여직 男耕女織이라, 남아는 밭을 갈고 여아는 길쌈을 해야 하거늘 
 네 장차 남의 집에 시집가서 어찌 살려는지 걱정이로다."

재희의 아버지 정호수 鄭豪修가 평소에 하는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어인 일인지 또 한숨이다.
재희는 동그란 눈을 뜨고 어머니의 눈치를 본다. 이윽고


"어머니. <옥단춘전>을 읽어드릴까요? 아니면 전일에 들으시던 <옥루몽>을 들으실라나요.
 또 아니면 지난 초이레 장날에 아버님이 낙양장에서 사 오신 <김옥균 실기>를 읽을까요"
"아가. 참 네 아버지는 이야기를 좋아하거드면 팔자에 밥술이 군색하다 시면서도 이야기책은 장마다 사 오신다니.
 나는 김옥균 같은 무서운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는 싫구나.
 읽으라 거든 저 채봉이 가을밤에 시 쓰는 거나 읽으려무나."
"아. 어머니, 채봉이 노래 이야기는 벌써 수십 번도 더 읽어서 아주 외우시겠어요. 또 들으시럽니까"
"오늘같이 추야장 긴긴 밤에는 채봉이가 달빛 아래서 울면서 시 짓는 이야기가 어울리지 않니.
 나는 아무리 들어도 지겹지 않더구나. 행여 네가 시집을 가서도 친정만 바라보고 
 채봉이 이야기 하면서 울다가 시어머니한테 부지깽이로 맞지 않을까 걱정이다마는, 
 그러나저러나 네 아버지는 왜 아직까지 안 들어오실까. 부자가 옳게 저녁도 못 먹였으련만, 이 차운 날에."

재희가 이미 여러 번 들었던 장에 간 아버지와 동생 명진의 이야기가 
또 되풀이 될까 싶은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일어선다.
 
"어머니, 그럼 책을 가져오겠어요. 잠깐만 기다리셔요."

치마를 살짝 걷고 마루 선반에 얹힌 책을 가지러 나가는 재희의 훤칠한 뒷모습을 보며 
김 씨 부인은 다시 한숨을 쉬다 딸이 혹 들을까 싶어 중간에 숨을 막는다.
김 씨 부인이 중얼거림을 마치기도 전에 문이 다시 열리며 등불이 너울거린다.
두 갈래로 땋은 딸의 검은 머리가 소담스럽다.

"어머니 그럼 읽사옵니다."
어젯밤에 불던 바람은 금성(金聲)이 완연하다. 모란봉 추운 바람이 단풍과 낙엽을 흩날려서 평양성 중으로 불어

떨어뜨리는데, 사정없이 넘어가는 저녁 빛에 홀로 서창을 의지하여, 바람에 불려 떨어지는 낙엽을 맥없이 보며

앉아 있는 여인은 평양성 밖에 사는 김 진사 집 처녀 채봉이라.*****

김 씨 부인은 채희가 다음을 읽기도 전에 내용을 안다.
김 진사는 평양에서도 조신 操身 하는 양반이며 문벌과 재산이 남부럽지 아니할 만하지만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어 항상 한탄하더니 만년에 딸 하나를 본 것이 채봉이다. 
김 씨 부인의 시아주버니 역시 악양 岳陽 서 남 못지않은 가문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큰 재산을 가진 양반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우가 제금나는 데 나눠줄 재산이 아까워 매일 기회를 엿보더니 시아버지의 소상 小祥이 끝나자

마자 아우의 격 급한 성정을 빌미 삼아 결국 맨몸으로 나가게 만들었다는 게 김진사와 다르다.

"네 아버지가 큰아버지 앞에서 단 한번 큰 소리를 냈다가 집에서 쫓겨나며 받은 건 삼태기 하나였구나.
 나는 호랑이 같은 동서에게서 머릿수건 하나를 물려받았고, 무슨 정신으로 호미 하나를 삼태기에 담아들고 나왔

는지, 아마도 일하면서 들고 있던 걸 넣었던 게지. 나중에 보니 삼태기 하나와 호미 하나, 머릿수건이 전부였더니라."

김 씨 부인이 이런 푸념을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원망하는 마음이 없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스무 살 남짓의 젊은, 아니 어린 부부는 집에서 오리 가량 떨어진, 열세 달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산소가 

올려다보이는 선산 아랫동네 허물어진 오막살이 집을 얻어 들어가게 되었다. 밭에 널린 옥수숫대를 세워 대충 뚫린

벽을 막은 뒤 옥수숫대로 지붕을 하고 옥수숫대를 바닥에 깔고 누워 기막힌 하룻밤을 지냈다.
당장 양식 한 줌 없었고 조반석죽을 끓여먹을 솥이 없었다. 물이라도 먹자고 하나 물 길어올 동이가 없었다.
아직 무서움이 많은 어린 신부가 밤에 쓸 요강은 물론 없었다.
아버지가 묻힌 선산의 위답 位沓을 부쳐먹는 동네 사람들 어느 집에서고 맏이인 큰집의 눈치를 보느라 동강난 수저 

하나 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긴 신랑이 그런 사정을 알면서 머리 숙여 빌릴 사람이 아니었다.

신랑은 다음날 새벽 햅쌀이 흩어진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 백 여리 떨어진 처가로 

떠났다. 그날 밤이 이슥하여 발에 온통 물집이 잡혀 돌아온 신랑은 얼굴만 한 솥과 그릇 몇 개, 쌀과 소금, 된장을 

내놓았다. 그날로부터 신랑은 집 밖으로 나갔다 하면 한 번도 빈손으로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오줌이 아까우니 집으로 돌아와 누어라.
 정 급하여 길가에 누게 되면 편편한 곳을 골라 누었다가 나중에 삽으로 그 흙을 떠오너라."

채봉이 재주가 총명하여 침선 여공(針線女工)과 시서 문필(詩書文筆)이 일취월장하고, 화용월태(花容月態)가

미인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라, 김 진사 내외 극히 사랑하여 장차 그와 같은 짝을 구하여 슬하의 낙을 보려 하고

널리 서랑을 구하나, 그 부모의 생각에는 평양 같은 시골 구석에는 그와 같은 배필이 없는지라. 김 진사는 좋은 인물을

구하려고 서울로 올라가고, 채봉이는 별당 속에서 홀로 아름다운 태도를 지키니 세월이 여류(如流) 하여 나이 이미

이팔청춘이라.  사창 紗窓에 매화꽃 떨어지고 버들가지 꾀꼬리 울 적마다 적막히 봄소식이 늦어감을 한탄하더니, 

무정한 세월이 멈출 바를 모르는지라. 봄은 가고 여름이 지나도록 아름다운 기약은 멀어지고 뜰 앞의 낙엽에 가을

바람이 소슬하니 수심과 남모를 탄식을 금치 못하는 터이라. 서창에 넘어가는 햇빛을 쳐다보더니, 단풍잎이 날아가는 

후원으로 나오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시비를 부른다.

“이 애 취향 聚香아! 후원으로 나오너라..” 취향이가 뒤를 따라나와 동산에 올라서더니,
“아이고, 벌써 나뭇잎이 빨갛게 되었구나. 
 그렇게 푸르고 무성하던 빛이 다 어디로 가고 이렇게 주황 다홍을 물들여 놓았노"

채봉이 이르되

"모르는 사이 연못의 푸른 풀은 꿈이 되어버렸고 未覺池塘春草夢
 뜰 앞의 잣나무 이미 가을 바람 소리가 나는구나  庭前梧桐己秋聲
 인생 백 년이 잠깐이라. 금년도 벌써 요도 삼월 夭桃三月 다 지나고 삭풍이 소슬하니 인생 또한 자 같이 늙는구나"
"버들가지에 채찍으로 안장마를 급히 몰아 진사님이 떠나신 지 어제 같은데 
 한여름이 다 지나고 추구월이 되었건마는 소식조차 막연하구려.”

이와 같이 서로 탄식한 뒤 채봉은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 들고 아름다운 얼굴에 대면서 가는 허리 석양 서풍 부는 

바람에 붙일 듯하게 섰더라. 마침 이 때 서편 담장 터진 곳에 나뭇가지가 흔들흔들 사람의 소리 두런두런하거늘 

채봉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일위 소년 一位少年이 나뭇 가지를 휘어잡고 담장 안을 엿보는데, 나이 십팔 구 세 

가량이요, 의복이 선명하고 얼굴이 관옥 冠玉 인데 풍채 또한 수려한지라. 마음에 문득 반가운 생각이 있으나 아녀

자의 마음이라 만면 수심 滿面 愁心으로 다시는 얼굴을 들어 보지 못하고 취향을 앞세우고 초당 草堂으로 들어가고 

동산으로 난문을 걸어 잠그니라.
소년이 담 터진 데로 들어와 좌우로 돌아다니며 동산을 구경하고 채봉이 앉았던 자리에 가 앉아 보니 오히려 나머지 

향기가 있는 듯한지라.

"아! 신선이 동천으로 돌아오니  神仙歸洞天
 버드나무의 안개는 오히려 남아 있고.  空餘楊柳緣
 내 지금 새소리를 들으니  吾只聞鳥省
 미인은 다시 볼 수 없구나  美人更不見" 

하고 탄식하고 초당을 바라보다가 우연히 고개를 숙여 땅을 보니 세 자 가량 되는 명주 수건이 떨어졌는지라. 자세히 

펼치고 본즉 수건 끝에 채봉이라는 두 글자가 수 놓았으니 이는 분명히 그 처녀의 수건이요, 채봉은 그 이름이라.

’생각하고, 따뜻한 향기를 품속에 품고 무슨 큰 보배나 얻은 듯이 기뻐하여, 앉은 자리로 다시 오려 하는데, 대문 안으

로 사람의 소리가 들리거늘, 급히 담 터진 데로 도로 나와 서서 동정을 본즉 앞서서 들어가던 여자가 나와서 무엇을 

도로 찾으며 혼잣말로,
“이상도 하다. 지금 떨어진 수건이 어디로 갔을까?”

 

하는지라. 소년이 이 소리를 듣고 입 속으로 말이 나옴을 깨닫지 못하고,
“벌써 내게 있는 물건을 아무리 찾으면 찾을 수가 있나, 공연히 애만 쓰지.”

그때 채봉이는 동산에서 급히 돌아오느라고 수건 떨어진 것을 몰랐다가 이윽고 깨닫고서 취향을 보내 찾아오라 

하니,  취향이가 수건을 찾다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앞으로 와서 공손한 말로 수건을 달라 청한다.


김 씨 부인은 혼례를 앞둔 재희가 침선 여공 針線女工에 재주가 없어 시집살이가 드 셀까 적이 걱정이다. 
재희는 부잣집에 시집가서 침모, 찬모, 유모 아이보개 하여 밑에 것들을 부리고 살면 될 게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를 해대지만 그게 이야기책을 너무 읽어서 나온 허황한 소리라고 김 씨 부인은 생각한다. 

다만 보통학교에도 서당에도 넣어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글자와 글씨를 어깨너머로 깨쳐서 어지간한 동네 사람들 

편지는 다 이 처녀가 대필을 해줄 정도이다.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는 않지마는 아버지도 은근히 맏딸의 그런 재주를 

사랑하고 이따금 어려운 한문 문자도 가르쳐 주는 눈치였다. 
이제 재희는 아버지가 사 오는 한자말이 섞여 있는 책을 하나 막히지 않고 술술 읽어 내려가며 토를 달고 뜻을 풀어 

적어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일일이 일러주는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김 씨 부인이 이야기에 나마 재미를 들여 온갖 시름을 옛이야기에 실어 보낼 수 있게 된 것도 재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웃의 아낙들 중에 간혹 이야기를 잘하는 이가 없지는 않으나 대개가 노인네들의 

이야기로 어린 시절부터 들어오던 고리탑탑하고 대중도 없이 황당한 이야기였지 재희가 읽어주는 책처럼 호둣속

같이 아기자기하고 깨처럼 고소하며 마늘처럼 맵고도 눈물짓게 하는 맛은 있을 수 없었다. 

장차 이런 것도 재주라면 재주가 될 것이니 김 씨 부인이 바라기는 재희가 제 말대로 고대광실 넓은 집에 개미같이 

많은 하인들이 있는 부잣집 셋째 며느리로 시집가서 이야기 좋아하는 시부모 만나 손에 물 묻히지 않고 이야기책만 

읽어 바치며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서방님이 뉘신지 모르거니와 지금 말씀을 들은즉 수건을 얻으신 듯하오니 얻으셨답거든 내어 주시면

  감은 만만 感恩萬萬 이올시다.”
“수건이 어떤 사람의 물건이냐?”
“우리 소저 가지던 것이올시다.”
“소저의 수건이면 도로 줄 터이니, 소저더러 와서 가져가시라고 해라.”
“아이고 서방님, 그 무슨 말씀이오. 
 소저는 규중 처녀라, 어찌 외인을 대면하오리까. 그것은 필경 희언 戱言이시니 어서 주시옵소서.”
“나는 물건 주인을 친히 보고 전하고자 하여 그리 함이라, 어찌 희언을 하리오. 그러나 너는 누구냐?”
“저는 소저를 근시 近侍하는 시비 취향이올시다.”
“네 소저는 이름이 무엇이냐?” 취향이 방긋 웃으며,
“외간 남자께서 남의 집 규수 이름은 알아 무엇하시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씀 마시고 수건을 어서 주시오.”

소년이 껄껄 웃고,
“이 애 취향아,  이름이라 하는 것은 남녀를 물론하고 알고 부르는 것인데, 그렇게 천부당만부당할 것이 무엇이냐. 
 내가 아는 것이 있기로 묻는 말이라.”
“규수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부모가 부르자고 지은 것이지, 외간 남자야 어찌 남의 집 규수의 이름을 부르리까.”
“이 애 네 말도 그럴듯하다만, 나는 이름을 알고야 수건을 줄 터이니 이름을 말하려거든 하고 말려거든 말려무나.”

취향이 생각하되, ‘어떠한 양반이신지 우리 소저와 인물이 상적 相敵 할 뿐이라. 소저의 이름이 수건에 있은즉

알고 짐짓 묻는 것이라. 말하면 무슨 관계 있으리오.’하고 또 한 번 상긋 웃으며 못 이기는 체 말을 한다.

“진정 알라시면 말씀할 터이니 수건을 주시렵니까?”
“암 주다 뿐이겠느냐.”
“채봉이라고 하신답니다.”
“허허! 채봉이라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우냐. 이 수건에도 그 글자 있으되, 네 말을 듣고자 함이로다. 
 그러나 수건을 주기는 줄 것이니, 거기 잠깐 섰거라. 곧 다녀오마.”
“다녀오실 때 오실지라도 수건을 주고 가십시오.”
“오냐, 잠깐 섰거라. 즉시 올 터이니.”

하고 급히 아랫집으로 들어와 용연 龍硯에 먹을 갈아 
양호 무심필 羊毫無心筆 을 흠씬 찍어 수건에 절구 絶句를 써서 취향을 갖다 주며,

“나는 대동문 밖에 사는 장필성이라. 
 선친께서는 선천 부사로 계시다가 돌아가시고, 편모 슬하에 지금까지 성취 成娶를 하지 못하였음에, 
 주야로 저전반측하여 숙녀를 구하려고 오매불망하는 사람이라고 소저께 말씀하고 이 수건을 드리어라. 
 수건을 보시면 답장이 있을 것이니 불안하다마는 회답을 전하여 주기를 바라노라.  여기 서서 기다리마.”

취향이 수건을 받아보고 깜짝 놀라,

“에그! 이 수건을 어떻게 갖다 드리라고 이렇게 글씨를 써서 못 쓰게 만들었으니까. 
 갖다 드리면 걱정을 하실 터이니 이 일을 어찌하나.”
“수건을 버려도 내 허물이고, 네야 무슨 관계 있느냐. 갖다 드려만 보아라. 
 불안하다마는 일후에 은혜를 후히 갚을 날이 있을까 하노라.”

취향이 마지못해 수건을 가지고 초당으로 들어간다. 이 때 채봉이 취향으로 수건을 찾아오라 하고, 홀로 난간을 

의지하여 기다리되, 한식경이나 되도록 들어오지 아니하니 속으로 생각하되,
‘이 애가 무슨 일로 그저 아니 들어올까? 수건을 찾느라고 이렇게 늦는가? 혹시 그 엿보는 소년이 수건을 집어서 

 실랑이를 하나. 아! 참 이상스러운 일이로군. 내가 규중처녀 되어 외간 남자의 일을 생각함이 온당치 못하나,

 그 소년이 대체 누구인지 모르되, 남자 중에도 그런 인물이 있는가? 그러한 인물로 문학 文學이 유여 有餘하면

 가위 금상첨화라 하련마는, 무무한 시골 생장 무식할 지경이면 그 인물이 아깝지 아니하랴.’
이렇게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는데, 취향이가 손에 수건을 들고 앞으로 오며,

“참 세상에 희한한 일도 있지요.”  채봉이 이 소리를 듣고 급한 말로,
“이 애 취향아, 무슨 일이 희한하며, 무엇 하느라고 이제야 찾아오냐?”
“다른 일이 아니올시다. 수건을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아까 담 밖에서 보던 이가 수건을 집어 가지고 서서 수건 찾는 양을 보고 여차여차하기에, 
  달라고 하였더니 무수히 실랑이를 하다가,  수건에 글을 써서 주며 이리저리하기로 마지못하여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만 소저께 꾸중이나 아니 들을는지요.  참 그 양반이야 인물도 잘생겼어요.”

하고 수건을 앞에다 놓으니, 채봉이 얼굴이 붉어지며 수건을 펴서 보니 글에 하였으되,

수건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향기가 나부끼니.
하늘이 나에게 정다운 사람을 내렸도다.
은근한 정을 참을 수 없어 사랑의 시를 보내오니.
바라건대 홍사가 되어 동방에 들기를 바라노라.  - 연월일 만생 晩生 장필성

이라 하였거늘, 소저 보기를 다하고, 얼굴이 더욱 붉어지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눈에 정기를 모아 글씨에 

쏟고 있는데, 취향이가 소저의 눈치를 알고 소저를 쳐다보며 웃으며,

“무엇이라 글을 썼어요? 좀 일러 주십시오.”  채봉이 천연한 낯으로.
“읽으면 네가 알겠느냐.  그러나 수건을 못 찾을지언정 부질없이 받아 가지고 왔느냐? 
 그러나 남의 글을 보고 회답 아니할 수 없고,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아무렇게나 두어 자 적어 주십시오.  그 양반이 지금 서서 기다립니다.”

채봉이 마지못하여 방으로 들어가, 색간지 色簡紙에 글 한 구를 지어 취향을 주며,
“이번은 처음 같은 일이라 마지못해 해답하거니와, 차후는 이런 글을 가져오지 마라.” 취향이 웃고 받으며,
“소저께서는 무엇이라 하셨어요?”
“에그, 글 모르니 갑갑도 해라.”  채봉이 취향의 등을 탁 치며,
“있다가 밤에 읽어 줄 것이니 어서 갖다 주고 오너라. 
 그러나 아랫집에서 글 지어 가지고 나오는지,  네 그 양반이 또 그리로 들어가나 보고 오너라.”
“예, 김 첨사 집에서 유하고 있다고는 해요.”
“그러면 김 첨사 집과 어찌 되나 물어나 보아라.”

취향이 대답하고 장필성이 있는 곳으로 나와 소저의 글을 전하니, 필성이 급히 받아 본즉.

권하노니 그대는 허망한 양대몽일랑 생각하지 마시고,  
힘써 글을 익혀 앞날에 한림에 들어가소서 하였다.
**양대몽 - 초나라 회왕이 무산 양대에서 무산 선녀와 만나 꿈에서 인연을 맺은 설화 

장생이 보기를 다하고 속으로 감동하여 취향을 쳐다보고 말하길 
"회답을 전해주어 고맙구나, 지금 소저가 몇 살이나 되었느냐."
"십육 세 올시다."
"규수로 글공부를 어떻게 이처럼 하셨느냐"
"우리댁 진사님께서 알뜰히 교훈해서 금옥같이 기르시는 터이올시다."



※ 이 글은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성석제 -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창비 -  2005. 01. 20.  

[t-07.07.23.  20210708-1657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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