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야나기 테츠코 - 「창가의 토토」
강당에서 야영을 한 다음 날은,
그야말로 토토가 대모험을 하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사실 토토는 야스아키와 어떤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또 야스아키네 식구들에게도 비밀이었는데,
다름 아닌 ‘토토의 나무에 야스아키를 초대’ 하는 것이었다.
도모에 학원 아이들은 언제부턴가
교정에 서 있는 나무들 중 한 그루씩을 자기만 올라탈 수 있는 나무로 지정해 놓고 있었다.
토토의 나무는 교정 저 끝, 구혼부츠로 가는 좁은 길과 울타리 사이에 서 있었다.
그 나무는 가지도 굵고 오를 때는 미끈미끈하지만,
기어서 오르면 아래에서 2미터 정도 부분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으며,
그 갈라진 부분이 해먹처럼 넉넉했다.
그래서 토토는 쉬는 시간이나 방과 후, 곧잘 그곳에 걸터앉아 먼 데를 구경하기도 하고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또 길 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곤 했었다.
이런 식으로 제각기 자기 나무를 지정해 둔 탓에,
행여 다른 아이의 나무에 올라가고 싶을 때는 반드시 '계십니까?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라고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그만큼 아이들은 자기 나무를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야스아키는 소아마비였기 때문에 나무에 올라가 본 적도 없었고 또 자기 나무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토토는 오늘 자기 나무에 야스아키를 초대하기로 마음먹고 야스아키와 약속을 했던 것이다.
더구나 용의주도하게 모두가 반대할 것에 대비하여 비밀로 삼기까지 하였다.
토토는 집을 나서면서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덴엔쵸후에 있는 야스아키네 집에 다녀올게요.”
이 순간만큼은 거짓말을 하는 셈이라서,
토토는 되도록 엄마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신발끈 쪽만 열심히 쳐다봤다.
그런데 역까지 따라 나온 로키에게는 헤어질 때 그만 사실대로 말해버리고 말았다.
“실은 야스아키를 내 나무에 초대했어!”
토토가 목에 맨 정액권을 펄럭거리며 학교에 도착하자,
여름방학이라 아무도 없는 교정의 화단 옆에 누군가가 벌써 와 있었다.
토토 보다 한 살 위였지만 언제나 훨씬 큰 아이처럼 말하곤 하는, 바로 야스아키였다.
야스아키는 토토가 눈에 띄자, 다리를 질질 끌면서 팔을 앞쪽으로 내미는듯한 자세로 토토 쪽으로 달려왔다.
토토는 아무도 모르는 모험을 지금부터 한다고 생각하자,
너무도 즐거워서 야스아키의 얼굴을 보며 '후후후' 하고 웃고 말았다.
야스아키도 따라 웃었다.
토토는 우선 자기 나무가 있는 곳으로 야스아키를 데려간 다음,
엊저녁부터 궁리한대로 사환아저씨의 헛간으로 달려가 사다리를 끌고 왔다.
그리고 그것을 나무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부분에 기대어 세운 다음 척척 올라가,
위에서 그것을 누르면서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됐어, 올라와 봐!”
하지만 야스아키는 팔과 다리에 힘이 없어서 혼자서는 도저히 한 계단도 올라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러자 토토는 휙! 뒤로 돌아 사다리를 씩씩거리며 내려오더니,
이번에는 야스아키의 엉덩이를 뒤에서 밀어 위로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토토는 몸집이 작고 깡마른 아이였기 때문에 야스아키의 엉덩이를 미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
휘청거리는 사다리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야스아키는 사다리에 올랐던 다리를 도로 내리고선,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인 채 사다리 앞에 서 있었다.
그제서야 토토는 이 모험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든 일임을 알았다.
(어떡하지...)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야스아키의 기대를 이루어주고 싶었다.
토토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야스아키의 앞쪽으로 돌아가서,
우선 입안에다 공기를 잔뜩 집어넣고 뺨을 부풀려 재미있는 표정을 지은 다음 기운차게 말했다.
“기다려 봐, 나한테 더 좋은 생각이 있으니까!”
그리고는 다시 헛간으로 달려갔다. (뭔가 좋은 게 없을까...?)
토토는 이것저것 차례차례 끄집어 내 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접사다리를 발견했다. (그래! 이거라면 흔들거리지 않으니까 잡고 있지 않아도 될 거야!)
토토는 그 접사다리를 질질 끌고 나왔다.
(와아! 내가 이렇게 힘이 센 줄은 정말 몰랐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힘이었다.
접사다리를 세워보니 나무가 두 갈래로 갈라진 지점까지 거의 닿았다.
토토는 마치 야스아키의 누나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지?
하나도 안 무서워. 이젠 흔들거리지 않으니까.”
야스아키는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접사다리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땀에 흠뻑 젖은 토토를 바라보았다.
야스아키도 땀이 비 오듯 했다.
야스아키는 천천히 나무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마음을 정한 듯 첫 번째 단에 천천히 발을 올렸다.
그때부터 야스아키가 접사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는지는 두 사람도 알지 못했다.
내리 쬐는 여름 땡볕 아래서 둘 다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단지 무슨 수를 써서든 야스아키가 접사다리 위까지 올라가면 된다는 생각 외에는...
토토는 야스아키의 다리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다리를 들어올리며,
머리로는 야스아키의 엉덩이를 받쳤다.
야스아키도 있는 힘을 다해 마침내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갔다.
“만세!”
그런데 그 다음이 또 절망적이었다.
두 갈래로 갈라진 곳으로 뛰어오른 토토가,
아무리 잡아당겨도 접사다리 위에 있는 야스아키를 나무 위로 옮겨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야스아키는 접사다리 끝을 꽉 잡은 채 토토를 쳐다봤다.
갑자기 토토는 울고 싶어졌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내 나무에 야스아키를 초대해서 정말로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토토는 울지 않았다.
행여 자기가 울면 덩달아 야스아키까지 울어버릴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토토는 소아마비로 손가락이 들러붙은 야스아키의 손을 잡았다.
자기 손보다 훨씬 손가락이 길고 커다란 그 손을...
토토는 그 손을 한참동안 잡고 있다가 말했다.
“한번 누워볼래? 잡아당겨 보게.”
이때 만약 접사다리 위에 엎드린 야스아키를 나무 위에 서서 잡아당기기 시작한 토토를,
지나가는 어른이 봤다면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을 게 분명하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은 불안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야스아키는 완전히 토토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이때 토토도 자기의 온 생명을 걸고 야스아키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토토는 조그마한 손으로 야스아키의 손을 꽉 붙잡고, 있는 힘껏 잡아당기기를 계속했다.
지나가던 소나기구름이 때로 강한 햇볕을 가려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 사람은 나무 위에서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토토는 땀에 흠뻑 젖은 옆 가르마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다음 말했다.
“어서 오세요.” 야스아키는 나무에 기댄 자세로 약간 쑥스러운 듯 웃으며 대답했다.
“실례합니다.” 야스아키는 처음 보는 경치에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듯 했다.
“나무에 오르는 기분이 어떤 건지, 이젠 알겠어!”
그로부터 두 사람은 한참동안 나무 위에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다.
야스아키는 열띤 목소리로 이런 얘기도 했다.
“미국에 사는 누나한테 들었는데, 미국에서 텔레비전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대!
그게 일본에 들어오면 집에 편안히 앉아서도 국기관에서 하는 씨름을 볼 수 있다는 거야!
꼭 상자처럼 생겼다던데.”
하지만 먼 곳에 가기가 힘든 야스아키가 집에서 여러 가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직 토토로서는 실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상자 안에서 씨름을 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씨름선수들은 덩치가 큰데.
어떻게 집까지 와서 상자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래도 믿기 어려운 얘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그때가지 아무도 텔레비전이라는 걸 모르던 시절의 일이었으니...
결국 토토에게 최초로 텔레비전 얘기를 해 준 사람이 바로 이 야스아키였다.
매미가 여기저기서 울고 있었다.
나무 위의 두 아이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러나 야스아키한테는 이때 나무에 오른 경험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나무타기가 되었다.
※ 이 글은 <창가의 토토>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구로야나기 테츠코 - 창가의 토토
그림 - 이와사키 치히로
역자 - 김난주
프로메테우스출판사 - 2004.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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