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김용옥) - 노자와 21세기 1」
요즈음 내 마음은 백담의 푸른 물처럼 맑다. 세상 일을 다 놓아버려 집착하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환자도 보지 않고, 대학강단에 서지도 않고, 외유(外遊)도 삼가고 오로지 집안구석에 쑤셔박혀 사랑하는 책들을 벗삼아 이리뒹굴 저리 뒹굴, 인간의 생각의 여로를 탐색하는 재미로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 수 있는 삶은 물론 나 자신의 어려운 노력으로 얻은 것이기는 하지만, 하여튼 고맙기 이를 데 없고, 또 송구스러운 느낌도 든다.
이렇게 한가로운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끊임없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과,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내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글로 옮긴다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다.
첫째로, 요즈음은 남의 생각을 열심히 나열하는 그런 짓에는 별 취미가 없다. 어릴 때는 그런 과정을 통해 배우기도 하고 생각을 정리도 하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참 내 생각이 아니면, 이다지도 정보가 소통되어 있는 세상에, 어디엔가 다 쓰여져 있을 법한 얘기들을 반복하는데 내 정력을 허비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정직한 내 생각이라는 것은 글로 옮길 수 있을 만큼 모양을 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둘째로, 아무리 내 생각이 모양이 잡혔다 하드래도 그러한 창조적 아이디어를 글로 쓴다 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을 완성하는 과정과도 같아 잔손이 많이 가고 그것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 통째로 필요한 것이다. 건물을 하나 잘 지으려해도 그 건물 하나를 짓는 데만 십여년의 세월을 건축가나 공인들이 전념하는 상황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물며 철학적 건축물을 하나 짓는데 십여년의 전념할 수 있는 세월이 통째로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현대인들에게는 이렇게 통째로 철저히 “놀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나 역시 겨우 한 두해 놀았는데, 이 정도로는 사상가 내음새를 피우기에는 텍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머니 사정도 생각 안할 수 없다. 이상과 현실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비좁은 삶의 틈새의 비효율성을 한탄하면서, 하염없이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는 시간을 발동동 구르며 안타까워 하자니……
그러던 어느 날 따르르릉 무정재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저희 방송사에서는 요번 밀레니엄 전환기를 맞이하여 좀 사려깊은 기획을 하나 했습니다……”
무슨 부탁이든지 무조건 거절하기로 악명이 드높은 나, 사실 거절의 미덕을 성공적으로 발휘 못하면 이 소란한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도저히 ‘놀 수’ 있는 시간을 획득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전화를 거시는 피디님의 목소리는 애초부터 절망에 가까운 떨림이었다. 나 도올의 악명을 이미 익히 탐지하신 훌륭한 분이셨던 것 같다. 그런데 궁합이란 참 묘한 것이다. 그렇게 까다롭게 선을 많이 보아도 어그러지기만 하는 혼사가 될려면 순식간에 짝, 우아한 웨딩마치가 울려퍼지는 것이다.
“알기쉬운 고전강의라구요?……”
나는 순식간에 까다로운 요청 몇 가지를 했다. 그런데 상대방측에서는 내가 응해주기만 한다면 그러한 조건을 다 수용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다는 신실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기철학의 대작을 쓰는 대공사계획이 차질이 생기 우울하던 차에 이 방송사의 제안은 순간 나에게 새로운 삶의 젊은 의욕을 소생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찬 전율이 나의 맥박을 고동치는 것이었다.
이미 저승의 객이 되어버린 한창기(韓彰璂: 1936~1997, 샘이깊은물 발행인) 선생께서 나에게 성북동 한옥처마끝 툇마루에 앉아 문득 던진 한마디가 생각난다.
“오늘 왜 우리 조선의 역사가 요 모양 요 꼴이 된 줄 아시오? 일제식민지의 비극일 것 같소? 몰지각한 좌ㆍ우이념의 투쟁일 것 같소? 정신못차리는 정객들의 부패와 우롱때문일 것같소? 안일한 학자들의 ……”
한참 동안 열변을 토하시던 끝에 단도직입적으로 내뱉은 한마디! 내 평생 두고두고 생각해봐도 일리가 있는 명언이었다.
“테레비 때문이오! 테레비! 테레비만 안 생겨났더라도 우리 민족이 이토록 타락하지는 않았을 게요. 인류는 앞으로 이 테레비 때문에 패망할 것이오!”
당시 나는 이 퉁명스러운 이 한마디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살다보니까, 이세상 저세상 다 돌아다니면서 생각해 보니 한창기선생의 그 한마디는 두고두고 생각해 볼 만한 명언이었다.
해방이후의 우리사회의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변화의 상당부분이 우리 삶의 공간으로 테레비라는 괴물이 진입함으로써 생겨난 사태임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테레비만 생겨나지 않았더라도……. 분명 이 테제는 클레오파트라의 코(Cleopatra's nose)1보다도 더 불가능한 전제임이 틀림없지만, 테레비라는 괴물이 산출한 문화의 양태는 현실적인 우리의 삶 그 전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옛말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는 격언이 있다. 막상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 무지막지한 말이다. 맨 손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 봐야 호랑이에게 멕힐 것은 뻔한 이치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이 생겨났을까? 이 속담은 곧, 텔레비전이 인류를 패망시킬 정도로 막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막는 힘도 테레비 자체로부터 우러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은유하고 있는 말은 아닐까? 테레비의 막강한 힘이 반지성적이고 반도덕적이라고 한다면, 지성과 도덕이 바로 텔레비전라는 호랑이 굴로 진입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아이러니를 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진입이 성공하면 테레비는 건강을 되찾고 그 사회 또한 건강을 되찾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텔레비전은 호랑이보다도 더 흉폭한 광란의 위력을 계속 발휘할 것이 틀림이 없다.
사실 테레비는 이미 어떤 ‘물건’ 이나,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나로부터 객관화되고 타자화될 수 없는 ‘사회’다. 내가 내가 살고 있는 사회로부터 유리될 수 없듯이, 나 또한 테레비라는 사회로부터 유리될 수 없다. KBS나 MBC, 이런 괴물들이 이미 어떤 한 개의 권력중심이 소유하고 콘트롤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수 없는 관계망에 의하여 얽혀있는 거대한 사회며 그 사회는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회는 역사를 지니고 있고, 또 그 시간 속에서 자기 동일적 성격의 변화를 수반한다. 사회 즉 관계그물이라고 해서 그것이 손을 댈 수 없는 성역이라든가, 방치될 수밖에 없는 자동기계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그 창조적 변화의 계기는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자신이 개척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사회의 문제는 정치만의 문제도 아니요, 교육만의 문제도 아니요, 경제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매스컴 전반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더 중요한 문제는 이 매스컴의 창조적 계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도덕적 구심체가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는 제1의 관건은 테레비 프로그램을 만드는 당사자인 피디와 피디를 지원하는 모든 협업체계의 ‘인식의 변화’다. 인식의 변화라는 것은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방법과 과정과 목표에 대한 자유로운 인식의 지평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프로그램에 대한 생각 그 자체가 어떤 고정의 틀이나 선입견에 얽매여 있지 않은 것을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제작 당사자들의 인식이 고정적 틀에 얽매어 있게 되는 가장 중요한 현실적 이유가 바로 ‘시청률’이라는 문제인 것이다. 영화가 크게 흥행이 된다고 해서 반드시 명화는 아니다. 그렇다고 흥행이 안되는 영화일수록 명화라는 논리 또한 성립될 수가 없다. 진정한 명화라고 한다면 대개 어느 정도의 흥행성 또한 확보되는 것이 대체적 상리(常理)일 것이다. 그렇다면 명화란 무엇인가? 명작은 어떻게 해서 태어나는 것일까?
여기 본질적인 ‘영상론’을 논구할 자리는 아닌 것 같다. 단지 흥행만을 목표로 해서 영화를 만든다든가, 단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테레비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든가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확인하는 것으로 우리의 논의를 끝내야 할 것 같다. 시청률 경쟁의 궁극적 선(善)은 결국 보다 많은 사람을 테레비 앞에 앉히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가치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한번 생각해보자! 보다 많은 사람이 테레비 앞에 앉어 있는 사회일수록 좋고 건강한 사회일까? 그 사회의 성원이 바쁘게 자기 일하면서 활동하느라고 테레비 볼 시간도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일 안하고 운동 안하고 넋 없이 테레비 앞에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어느 것이 더 우리의 건강한 모습일까?
나는 사회 전반적으로 테레비 시청률이 내려가는 편이 좋은 사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은 현실과 무관한 하나의 유토피아(Utopia)적 꿈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의 이러한 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시청률을 내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역설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 국가의 운영에 있어서 그 문화정책이 중요하다는 것은 새삼 부언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화정책의 가장 비중있는 섹터(sector)로서 우리는 교육정책을 꼽는다. 물론 교육이 제대로 되어야 그 나라의 미래가 확보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십년지계(十年之計)는 수목(樹木, 나무를 심음)에 있고 백년지계(百年之計)는 수인(樹人, 사람을 심음)에 있다는 옛말(『管子』 「權修」) 그대로 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정책의 가장 고질적 병폐는 지나친 ‘간섭’에 내재한다. 초등ㆍ중ㆍ고등(primary and secondary education)학교 교육까지는 국가의 간섭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국가의 대계(大計)의 플랜을 잡는데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교육에 관한 국가의 개입이 배제된다면 그 사회는 유기적 균형성이 완전히 깨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대학교육은 거의 완벽하게 국가의 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대학교육은 그 나름대로의 법칙이나 자유경쟁의 사회체제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운영되도록 방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학이야말로 사학이 관학을 리드해야 하며, 사학은 국가제도의 통제권 상위의 도덕성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의 개입이 어느 상황에서든지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정적 효과만을 잉태시켜 온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브레인 코리아(brain korea)’와 같은 발상 그 자체가 근원적으로 대학의 성격 자체를 잘못 이해한 데서 출발한 발상인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브레인 코리아(brain korea)’에 투입할 돈을 그 일부만 건전한 테레비문화에 투입한다면, 아마도 브레인 코리아를 통해 소기했던 문화정책의 몇 배의 효과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어차피 국민을 교육시킬 수 있는 매체로서 국가정책의 효율성의 증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테레비만큼 강력하고 효율적인 매체는 없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현실이다. ‘시청률 경쟁’으로 테레비 프로그램이 날로 날로 천박해지고 감각적으로 흘러가고, 또 국민의 감성구조 자체가 그러한 방향으로 같이 흘러가서 악순환의 상보적 싸이클을 형성하는 이러한 비극적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방식이 텔레비전을 ‘시청률 경쟁’에서 해방시켜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테레비 프로그램의 질을 높이고 상대적으로 테레비 시청률을 낮추어가는 방향으로 대세(大勢)를 잡아야만 그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브레인 코리아(brain korea)’와 같은 발상은 애초에 대학을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방송프로그램을 대상으로 했어야 했던 프로그램이었다. 대학은 이미 국가의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돈을 더 퍼넣는다고 더 아웃푸트(output)가 생겨나는 그러한 자본주의적 체제가 아니다. 교육은 철저히 비자본주의적 ‘원칙’에 의해서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테레비는 통제ㆍ조절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또 자본주의적 체제 속의 한 매카니즘(mechanism)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다큐멘타리를 아무리 잘 만들어야 시청률 5%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연속방송극은 가볍게 만들어도 시청률 5%는 훌떡 넘어간다. 그런데 좋은 다큐멘타리를 만들려면 동일한 방영시간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제작비가 연속방송극의 100배가 넘을 수도 있다. 그럼 현실적으로 다큐멘타리 제작 피디가 100배의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는가? 바로 이러한 질문에 선진국의 관계자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나, 우리나라의 피디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수밖에 없다는데 바로 우리 방송문화의 고질적 병폐의 한 근원적 요소가 내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건전한 방송 펀드가 턱없이 부족하며, 일본에서 쥐꼬리만큼 주는 펀드광고라도 나면 컴피티션(competition)에 열을 올려야 하는 실정인 것이다.
나는 82년 가을 기나긴 유학의 여정을 마치고 귀국한 이래, 한국의 방송계와 끊임없는 애증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국민들의 많은 사람들이 내가 테레비에 많이 나온 사람으로 인식하는 상황에 흔히 부닥치게 되는데, 사실 나는 내 이름의 인지도에 비한다면 테레비에 그 모습을 나타낸 사례가 극소한 인물이다. 정식적인 프로그램에 나간 것이 근 20년 동안 단 두 차례 밖에는 없다. 그 한번이 94년 3월, ‘MBC 이야기쇼 만남’에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강의로 2회 나간 사건이고, 또 한번이 97년 5월 24일부터 6회에 걸쳐 나간, SBS 명의 특강이었다.
나는 테레비에 나가기를 싫어하는 그런 성스러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테레비에 나가기를 좋아한다. 나는 인생을 적극적으로 산다. 많은 것을 체험하고 싶어하고, 내가 가진 것이 있으면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싶어한다. 대학에서 4.50명 놓고 강의하는데 피땀 흘리는 정열을 소비하느니, 그 열정과 에너지를 테레비영상을 통해 전 국민과 공유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기쁠 것인가? 귀국 직후부터 나는 방송사에 나의 고전강의를 꾸준히 건의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계획은 항상 좌절되었다.
그 첫째 이유는, 윗사람들이 보시기에 김용옥은 항상 불안한 데가 있다는 것이다. 말을 너무 직(直)하게 하여 좀 곤란한 상황을 발생시킬 소지가 항상 있다는 것이다. 이 점, 나도 물론 시인하고 그분들의 걱정 또한 이해가 가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애에 공통적으로 닥치는 시련의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문제는 상호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고 표현을 아름답게 다듬음으로써 문제의 소지를 없앨 수도 있는 것이다.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내가 제안하는 프로그램들의 파격성이나, 기존의 안일한 궤도와의 마찰을 일으킬 수도 있는 새로운 요소들을 수용하기를 두려워하는 관성의 체계에 있는 것이다. 즉 ‘인식의 변화’를 수용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나는 테레비에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의 테레비 방송사들은 내가 설 자리를 마련해 주질 않았다. 천하의 정위(正位)가 아니면 하지 아니하고, 천하의 광거(廣居)가 아니면 거(居)하지 아니하고, 천하의 대도(大道)가 아니면 행(行)하지 아니하는 것[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孟子』 「滕文公」]은 선비가 지켜야 할 기본약속이다. 뜻을 얻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도(道)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도(道)를 행하는 것은 선비의 삶의 기본자세이다[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脩身見於世.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孟子』 「盡心」]. 내 어찌 구구이 사람 앞에 서기를 희구하리오?
요번 EBS 밀레니엄특강 고전강의는 내가 원하는 프로그램의 형태로 방송사에 수용된 최초의 전기이다. 내가 하고 싶은 강의가 테레비 영상을 통해 국민에게 널리 다가가는 최초의 계기가 EBS 교육방송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 나는 무한한 자부감을 느낀다.
첫째, 나는 우리나라 방송문화의 개선을 위하여 ‘인식의 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가 교육방송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퍽으나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 나라의 문화의 수준은 단순한 상업성을 뛰어넘는, 그러한 전제로서 운영되지 않는 체계가 바르게 작동될 때만 그 꾸준한 기준이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EBS 교육방송 자체의 인식의 변화와 또 EBS 교육방송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인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교육방송이 훌륭하고 인기있는 방송으로 재인식될 때 우리나라의 방송문화 전반의 개선의 가능성이 엿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둘째, EBS 교육방송이 새로운 지평을 열음으로써 기타 방송사의 사람들에게 프로그램을 인식하는 태도의 변화나, 국민의 표현되지 않은 숨은 열망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나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모든 가능성에 대한 바램은 오로지 냉혹한 현실적 판단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적 여건의 변화가 전무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목표는 시청률의 저하가 아닌 시청률의 제고라고 하는 매우 이율배반적인 현실적 인식이다. 나의 지상의 목표는, 철학은 매우 쉬운 것이며, 재미 있는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특히 동양고전의 강의가 현금 테레비 영상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코메디안들의 쇼프로 보다도 더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의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 고도의 지적인 엔터테인먼트의 예술이라는 것을 우리나라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내 머리 속에서만 우물쭈물 맴돌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아주 정직하고 단순하게 보다 많은 사람과 소통시키는 것은 나의 지식과는 별도의 또 하나의 고도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충실히 나열하는 것으로 명강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강의의 본질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나의 실존적 깨달음의 전달이다. 우리나라 대학이 지식의 증대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상황은 바로 교수님들이 지식을 생활화하고 예술화시키지 못하는 데 그 가장 근원적 까닭이 있는 것이다. 나의 교육방송강연을 계기로, 나를 뛰어넘는 많은 훌륭한 강의자들이 바톤을 이어주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p19)
※ 이 글은 <노자와 21세기 1>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도올(김용옥) - 노자와 21세기 1
통나무 - 1999.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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