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휠러 - 지상에서 가장 슬픈 약속 (Where The River Run)」
인디언들이 중북부를 흐르는 미주리강 상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서부 개척시대.
리븐 윌스에서 출발하는 평화사절단이 인디언인 쿠데 나이 족을 보호구역으로 이전시키려는
정부와의 협상을 위해 떠나는 그들을 보호하는 군 책임자로 임명된 제드 오웬 대위.
시대적 사회상과 인간 군상들의 모습 속에서 도전과 모험, 사랑과 우정, 삶과 죽음,
작가 리처드 휠러만의 독특한 필체로 주인공인 제드 오웬 대위와
그의 약혼녀 수잔나와의 믿음과 사랑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만든다.
계절은 겨울의 끝이었지만
따뜻하고 맑은 날씨가 계속되던 그해 삼월 어느 일요일에, 그녀는 구혼을 받았었다.
"오늘은 마차 드라이브를 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군요"
그가 이렇게 함께 야외로 나가자며 말문을 열었었다.
그녀는 그와 마차와 말을 차례로 훑어보며 선뜻 대답했었다.
"좋아요. 하지만 일단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겠어요"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그는 하늘색 모직 옷을 입은 그녀를 위해 사려 깊게도 버펄로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의자 주변에 걸쳐 주었고, 그것도 모자라 차양이 긴 두툼한 모자까지도 따로 준비했다.
회색의 겨울 풀이 굽이치는 대평원 위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는
은회색 말의 목에서 나는 짤랑거리는 종소리뿐이었고 날씨는 근래 보기 드물게 화창했다.
"당신이 절 구해 준 거라고요.
안식일 오후의 따분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심했었거든요."
그녀가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칼을 손으로 잡으며
그의 귀에다 대고 큰 소리를 치자 그가 금방 웃음 지으며 대꾸했다.
"추위도 물러갔겠다, 지겹지 않은 오후가 될 겁니다."
리븐 월스 기지로부터 꽤 떨어진 곳,
끝없이 이어지던 황갈색 평원의 종착에 다다른 어느 곳에서 그는 가볍게 고삐를 당겼고,
그의 암말은 금빛 태양 아래서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그들이 당도한 곳은 아직 사람의 발길이 그다지 많이 닿지 않은 황야로,
주변 어디를 봐도 끝없는 지평선뿐인 광활한 대평원의 한가운데였다.
그가 마차가 지나온 저 뒤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수잔나!"
그녀는 웃음이 담긴 시선을 그의 얼굴에 뿌렸다.
지평선만큼이나 아득한 그의 회색빛 눈이 옅은 갈색인 그녀의 눈동자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제드 오웬 대위님"
그녀는 늘 그의 턱이 지니고 있는 단호함을 좋아해 왔었다.
지금 그의 큰 손 안에 자신의 작은 손을 넣어둔 채 그 턱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는 단호함과 안온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그러면 전 모두 '네'라고 할게요"
그녀가 그에게서 풍기는 안온함의 힘으로 불쑥 말을 하자,
그가 씩 웃으며 즉시 물었다.
"당신에게 청혼하는 내가 바보인가요?"
"네"
"당신에게 청혼하는 내가 경솔한가요?"
"네"
"나와 결혼해서 영원히 내 여인이 되어 줄 자신이 있나요?"
"네"
"당신은......,"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스스로 얼굴을 붉혔다.
진지하게 그의 입술이 다가올 때,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감았다.
그의 키스는 정중하면서도 달콤했다.
그가 마치 자기 몸 속에다 완전히 그녀를 넣어 버리겠다는 듯이 더 힘껏 끌어안았을 때,
그녀는 손을 그의 거친 머리칼 속에 파묻으며 그의 입술의 감촉을 즐겼다.
그의 두꺼운 외투와 그녀의 푸른색 모직 옷이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듯이 밀착되어 있었으나,
그녀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은 결코 넘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안심하였다.
그의 그런 특성은 그녀가 그를 선택한 이유 중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했다.
미합중국 군대의 대위 제드 오웬은 그녀가 리븐 윌스 군기지에서 자라온
지난 20여 년 동안 만나 본 수많은 남자들과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확실히 그에겐 견고하고도 고결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가 요구하는 남다른 무엇, 그에겐 그것이 있었다.
제드 오웬 대위는 1849년 이른 봄.
워싱턴의 인디언 관리국에서 파견된 3명의 관리를 보호하는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그와 세 명의 관리 그리고 부하 8명은 미주리 강 북부 지역
인디언 부족의 요구사항을 조사하러 평화사절단으로 파견된다.
제드는 미주리 강 하류에 있는 리븐 윌스 기지를 떠나 포트 기지와 벤튼 기지를 거쳐 계속 북상한다.
그러나 벤튼 기지를 출발한 지 나흘 뒤 어느 평원에 도착했을 때,
일행이 차례차례 괴혈병과 콜레라에 걸려서 죽어간다.
제드는 죽어가는 관리와 병사들의 부탁으로
그들의 유언을 받아 적어서 그들의 가족에게 전달해 주기로 약속한다.
이제 제드만 남고 모든 일행이 죽는다.
그러나 제드 마저 심한 괴혈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깨어날 때는
잔인하기로 이름난 쿠데타 이족 인디언에게 포로로 잡힌 상태다.
쿠데타 이족은 제드를 보살펴서 겨우 앉을 정도가 되자 매일매일 괴롭고 긴 심문을 한다.
한편 수잔나는 제드가 미주리 강 주변의 모든 인디언 부족을 다 만나고
가을이면 돌아올 것이라고 한 약속을 믿고 기다린다.
하지만 1년이 다 되도록 제드 일행은 안 돌아온다.
리븐 윌스 기지에서는 평화사절단이 모두 콜레라에 걸려서 죽은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수잔나는 아버지 조지 대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드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슴에 품고 제드를 찾아 떠난다.
수잔나는 엘파소 호를 타고 미주리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중
강도 떼와 악랄한 인디언 앙크토아니족의 습격을 받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면하고
무사히 유니언 기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제드의 소식은 전혀 없다.
수잔나는 아메리칸 모피회사에 고용되어 황야를 누비며 돌아다니는 장갈랑을 설득해서,
그가 조랑말을 발견했다는 ‘태양 강’까지 안내해 달라고 부탁하여 함께 떠난다.
수잔나는 제드의 무덤을 보지 않고는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쿠데타 이족에게 오랫동안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풀려난 제드는
평화사절단의 유언이 담긴 푸른색 가방을 안고 미주리 강을 찾아 남하한다.
오랜 굶주림과 허약한 몸으로 인디언을 피해 남하하던 제드는
죽음 직전에 벤튼 기지에 도착하지만 사경을 헤맨다.
벤튼 기지에서는 혼수상태에 빠진 제드를 의사가 있는 유니언 기지로 후송한다.
제드는 그곳에서 간신히 의식을 찾고 건강을 조금씩 회복한다.
그러나 제드 일행의 흔적을 수색하기 위해 수잔나와 함께 엘패소 호로 함께 온
콘스타블 중위는 조사단장의 권한으로 제드를 청문회에 세우고 억지 심문을 한다.
‘태양 강’으로 향해 가다가 벤튼 기지에 들른 수잔나는
제드가 몇 시간 전에 유니언 기지로 후송됐다는 기적 같은 소식을 접한다.
겨우 유니언 기지에 도착한 수잔나는
콘스타블 중위가 제드 대위를 심문하는 청문회장에 들어선다.
콘스타블 중위는 제드가 가지고 있는
평화사절단의 유언이 담긴 편지를 증거물로 제출하라고 명령하지만, 제드는 거부한다.
이유는 그 마지막 유언이 담긴 편지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의 가족에게 전달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약속은 수없이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지금까지 버텨온 제드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편지가 든 푸른 가방을 가슴에 안은 채
뒤 돌아서 청문회장을 걸어 나가던 제드와 수잔나와 눈길이 마주친다.
그 순간 콘스타블 중위가 부하들에게 제드를 붙잡으라고 소리치고,
부하는 제드를 향해 들고 있던 소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어이없는 총상으로 많은 출혈을 일으킨 제드는 다시 사경을 헤맨다.
제드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키는 수잔나는 가슴이 무너진다.
수잔나는 평화사절단 일행의 유언이 담긴 편지를 목숨같이 지켜오고,
또 지키려는 제드의 신의와 사명감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 편지를 둘 사이의 사랑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여 야속하기까지 하다.
지상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고결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한 줄기 기력까지 다한 제드 대위는 지금 어이없는 일로 사경을 헤맨다.
제드 대위는 가끔 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수잔나를 부른다.
그녀는 단 한마디도 뱉어내지 못했었다.
소총의 굉음이 강렬한 메아리와 함께 식당 안에 울렸을 때, 비명은 단지 그녀의 목 안에서 얼어붙고 말았었다.
그녀는 제드가 한동안 비틀거리다가 마치 커다란 통나무가 쓰러지듯
몸 아래로 푸른색 가방을 깔아뭉개며 엎어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몇 명의 병사가 우르르 달려 나가 그를 애워 쌀 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죽었어. 분명히 죽은 거야.'
콘스타불이 미친 듯 달려와 제드를 보곤, 그 금발의 멍청한 저격수에게 뭔가 호통을 치는 게 들여왔으나
수잔나의 귓가에서 그 말들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죽었어.
죽었을 거야.
단지 이 말만이 그녀의 입가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곳의 어떤 공포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다.
단지 있다면,
그렇게 생존만을 원했던,
그래서 그렇게도 열심히, 그렇게도 오랫동안 싸워왔던 그 남자에 대한
동정과 연민과 슬픔이 거센 파도로 그녀를 휘감아왔을 뿐이다.
이번에는 영양실조가 아니라 총상에 의해 다시 유니언 기지의 의사에게 옮겨졌을 때,
제드는 놀랍게도 심장 박동마저 미미하게 불규칙적으로 뛰고 호흡도 제멋대로여서 정말 죽었다고 판단되었다.
그 경악스러운 출혈,
수사슴 가죽 셔츠의 가슴 위에 수놓아진 검은 발족의 태양 문양 文樣이 빨갛게 피에 젖었고,
단지 이글거리는 태양 광선의 형체만이 레몬색으로 겨우 남아 있는
그 처참한 광경이 제드의 절망적 상태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표상 같았다.
황야에서의 참담했던 1년도 끝내 견딘 그로선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결말이었다.
인간의 생명이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끈질기면서도,
한편으론 한없이 허약한 것이라는 걸 제드는 그 막무가내로 터져 흐르는 피로서 증명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수잔나는 제드를 지켜보면서 수없이 놀라워하고 수없이 탄식을 했다.
제드 오웬에게 있어, 그 낡아빠진 편지 다발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그 스스로 지상에서 가장 고결한 약속이라 표현했던 단지 몇 장의 유언이 적힌 편지들,
그것이 생명을 걸고, 목숨과 바꿀 만큼 그렇게 소중했을까.
그녀가 단 한사람
제드 오웬을 만나기 위해 생명의 위험마저 무릅썼던 여자로서의 사랑의 용기는,
남자로서의 명예와 신의를 더 소중히 여겼던 제드 오웬의 의지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 것인지 정녕 알 수 없기에 수잔나는 눈물도 잊고 할 말도 잃었다.
사랑 하나에 모든 삶의 아침을 간절한 기도로 맞이했던 여자, 여자의 숙명,
그러나 제드는 오로지 그 가방 그 편지 다발에 모든 삶의 하루를 절박한 기도로 보냈던 것이다.
수잔나는 그런 제드의 지난 1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정녕 이해할 수 없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는 피로 얼룩진 홑이불을 덮은 채 벌써 며칠째 인지도 모르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강이 흐르는 곳에 내가 있으리니,
언제든 강물을 보며 날 잊지 말라며 사랑을 언약하고 떠난 사람을 가다리고 기다린 그 목마른 1년 세월 동안,
모든 사람이 다 그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그녀 혼자서만 은 절대로 그 말을 믿지 않으며
지상에서 가장 슬픈 약속이 되어 버린 그와의 사랑의 맹세를 굳건히 간직하려 했던 수잔나였다.
그것을 한 사람의 군인인 제드 오웬은 알까.
수잔나는 대답을 찾지 못한 채 그를 아프게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신음 소리를 내다가 간신히 알아들을 만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약속하지...... 꼭......,
뜨거운 무엇인가가 훅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수잔나의 가슴 속을 헤집는 순간,
그녀는 참고 참았던 울음을 기어이 쏟고 말았다.
그는 다시금 눈을 뜰 것이다.
잃었던 기력을 되찾고 리븐 월스로 그녀와 함께 돌아가 지난 1년의 공백을 상관들에게 보고할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면 다 되는 것일까.
그게 전부 다일까.
그녀는 그 해답을 지금 당장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멀리 창밖으로
미주리 강의 거대한 수면 위로 태양빛이 눈부신 은광 銀光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1년 만의 재회, 눈물겨운 만남, 그러나 단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허무하고도 간절한 시선 하나만으로 만족한 채
그녀는 지금 그 사람의 얼굴을 우두커니 응시하고 있다.
강물이 흐르는 곳에,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들은 지금 함께 있는 것이었다.
-끝.
리차드 휠러 - 지상에서 가장 슬픈 약속
역자 - 류승완
홍익출판사 - 1995. 10. 15.
[t-08.03.17. 20230301-1628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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