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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노자와 21세기 1 - 지식과 삶의 화해/2

by 탄천사랑 2008. 2. 3.

「도올(김용옥) - 노자와 21세기 1」

 


인생을 사는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무엇일까? 

孟子(멍쯔)는 남녀노소할 것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좋아하는 것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들었다. 

食과 色! 그것은 참으로 천하의 명언이다[食色, 性也 「告子」].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는데 

'맛있게 먹는 것,' 참 그것 이상으로 재미있는 것은 없다. 

  하루하루의 일과 중에서 단 한번이라도 정말 맛있는 것을 먹어 보았으면 !

  요새같이 퇴폐적인 외식 문화의 허식 속에서 어쩌다 정말 정성스럽고 특이한,

  맛깔스러운 음식을 만나면 정말 한번 먹고 꼴깍 숨이 넘어가도 유감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쾌락을 만끽하게 된다.

  음식의 묘미는 청결과 소재의 신선함과 조미의 프레이그런스(fragrance, 香),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예술이다.

  그런데 요즈음과 같이 하이타이로 그릇을 씻어대고,

  공해로 쩌든 소재에, 온갖 인공조미료를 퍼붓고 인공적인 된장ㆍ꼬치장을 처넣은

  음식이 진미처럼 둔갑되어 나오는 세상엔 정말 향긋한 백미 밥 한그릇이 오히려 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요번 시드니에 가서 영어ㆍ우리말 두 강연의 성공도 유쾌한 것이었지만,

  아내와 시내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만나게 된

  우리 구어메이(gourmet, 미식가) 미각의 쾌거는 참으로 특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아내와 나는 중국에서 만났다. 

중국에서 신혼생활을 했고, 중국말과 중국습관 속에서 평생을 살았다. 

지금도 평상대화의 반은 중국말로 한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 꼭 들리는 곳이 차이나타운이다. 

차이나타운에만 가면, 쎈스있게 선택하여 감만 잘 잡으면, 

꼭 한 끼는 양식으로 니길니길 코팅되어버린 뱃속을 한번 유쾌하게 놀래켜 줄 챈스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말을 잘한다는 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아내와 나는 강연이 끝난 날, 단촐하게 둘이서 호텔을 나왔다. 

우선 길거리 키오스크(Kiosk)에서 상세한 시드니의 지도를 하나 샀고, 

도보와 공공 운송체계만을 이용하여 시내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유명한 오페라하우스가 보이는 부두가까지 걸어 나갔다가 그곳에서 센트랄 스테이션 가는 지하철을 탔다. 

재미있는 것은 지하철이 이층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이었다. 

홍콩이나 영국에서 이층뻐스는 많이 보았지만, 지하철이 이층으로 되어있는 사실은 예기치 못했던 것이었다. 

센트랄 스테이션(Central Station)을 빠져나와 벨모아 파크를 가로질러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오스트랄리아! 

‘거대한 남쪽의 대륙’이라는 이름의 이 오스트랄리아를 개발하는데 

중국인 쿨리들의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이곳에 일찍부터 정착하였고, 그들은 무시할 수 없는 상권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들이 시드니에 건설한 차이나타운은 

유구한 역사와 보수적 전통과 풍요로운 현실이 잘 융합된 매우 깔끔한 곳이었다. 

여기 저기 어슬렁거리다 우리 눈에 들어온 것은, 

오스트랄리아 차이나타운에 유달리 풍부한 것이 해산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오스트랄리아가 이 지구상에서 비교적 인위적 문명의 흐름에서 소외된 매우 청정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청정하기 이를 데 없는 남대양의 풍요로운 어장 한 가운데 있는 대륙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차이나타운 어느 채관(菜館)앞 쇼윈도우를 지나다가 앗! 하고 나의 시선을 경악시킨 물체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어항 속을 어슬렁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바윗덩어리와도 같았다. 

영어로는 보통 ‘킹크랩(King Crab)’이라고 하지만 중국인들은 ‘왕게’라고도 하지 않고, 아예 ‘황제게’라고 한다. 

오스트랄리아의 게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초대형, 

엑스라지 아니 슈퍼라지, 아니 크다는 표현이 도무지 적합치를 않은 그러한 것이었다. 

어항 속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문자 그대로 거대한 태고의 암석이었다. 

이왕지사에 한번 이 놈을 먹어봐야겠다! 우리는 크랩 요리를 잘 할 수 있는 곳을 골랐다. 

우리 감으로, 굴번(Goulburn) 스트리트와 수쎅스(Sussex) 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금당해선채관(金唐海鮮菜館)’이라는 곳이 눈치 코치 다 때려 볼 때, 명가(名家)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용기 있게 진탕[金唐]에 입성(入城)을 시도했다. 

퍽 큰 차이꾸안(식당)이었는데 거대한 한 벽 전면이 온갖 어항으로 장식되어 있어 

그곳에서 직접 해물을 고르면 바로 즉석요리를 해 올리는 그러한 시스템이었다. 

우리는 어항 앞에서 ‘황제게’를 찍었다. 

그랬더니 웨이터가 우리를 의아스럽게 쳐다보면서 그것을 어떻게 먹으려고 하냐는 것이었다. 

돈 주고 먹는다는데 왜 못 먹는다는 것일까? 

저건 먹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전시용인가?  의아스러운 것은 내쪽이었다. 

나의 반문을 받은 웨이터는 큰 그물을 집어넣어 게를 꺼냈는데, 

자그만치 웬만한 어린아이 몸뚱이보다 더 큰 느낌이 들었다. 

저울에 달더니, “치 꽁진” 하고 외치는 것이다. 

무게가 7kg 나간다는 뜻이다.
 
7kg면 어떻고, 10kg면 어떠냐? 

한번 산해진미를 먹어보고나 죽자꾸나! 

그랬더니 그 웨이터가 하는 말이 이것을 먹으려면 최소한 열사람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소하게 보이는 초라한 부부 둘이서 이 황제게를 처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인 듯이 얘기하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다 버리고 가도 좋으니 맛 좀 보자고 했다. 

그랬더니 그 웨이터가 이것이 얼마인 줄 아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마냐고 물었다. 

“뚜어 사오 치엔?”
 
“세븐 헌드레드 달러스(seven hundred dollars)!”
 
나는 여기서는 그만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기권표를 던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스트랄리아 돈으로 700불이면 미화로도 500불은 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돈으로 한 육십만원 되는 것이다. 

게 한마리 먹는데 육십만원! 아무리 미식가의 탐욕을 마음껏 발휘한다 해도 이것은 좀 심하다. 

작전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접근하다간 큰 코 다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는 수 없이 진탕[金唐]을 나와 버렸다. 

미화 500불! 우리는 아직도 학생 감각에 살기 때문에 외국 나가서 50불 쓰는 것이 좀 두렵다.
그러나 무조건 후퇴는 곤란하다. 

얌체 같지만 나는 하는 수 없이 S.O.S. 특전을 쳤다. 

현지에서 큰 사업을 하고 계신 친지 한 분께 전화를 걸었다. 

마침 그 송사장님의 회사건물이 바로 차이나타운 근방이었고, 또 다행이 저녁 7시경이었는데, 회사에 계셨다.

"시간이 있으시겠습니까?"
"아 물론 나가지요. 그런데 어디 계시지요?"
"여기 수쎅스 앤 굴번인데요. 
 혹시 금당(金唐)이라는 곳을 아시는지요. 그 앞에 공중전화에서 걸고 있는 겁니다."
"금당(金唐)을 어떻게 아셨어요? 
 그곳이 여기 차이나타운에서는 제일 고급이고 제일 음식을 잘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들어가 계세요. 
 제가 곧 가서 모시겠습니다."

으음, 회심의 미소가 돌았다. 

이제 한번 또 거하게 먹어보겠구나! 

어차피 킹 크랩은 불가능지사(不可能之事)에 속하는 것이고…… 나는 허리띠부터 풀렀다. 

송사장님은 바로 해물무역을 크게 하시는 분이었고, 그 금당채관(金唐菜館) 주인과도 친구사이였다. 

송사장님이 오셔서 다시 웨이터와 기나긴 협의를 거친 결과 우리가 낙착을 본 것은 ‘러브스타(lobster)’ 요리였다.

러브스타(바닷가재) 하면, 

나는 좀 일가견이 있는, 그리고 미식가로서 견식이 높다는 자부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미 전역에서도 러브스타의 고장으로는 보스톤항 이상을 꼽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보스톤은 러브스타가 크고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보스톤 차이나타운의 러브스타 요리의 격조를 세계 어느 곳에서도 나는 경험하지를 못했다. 

그래서 송사장님이 러브스타 요리 운운할 때 나는 좀 불만스러웠다. 

러브스타는 보스톤 6년 유학시절에도 지겹도록 먹었고, 

또 최근 보스톤생활을 통해서도 단골 메뉴였으니까! 

그런데 웨이터가 어항에서 끌어올린 러브스타는 나의 눈을 다시 한번 의심케 만들었다. 

“리앙 공진 !”

2kg라는 뜻이다. 

그리고 러브스타 한 마리에 200불을 받았다. 

7kg짜리와 실갱이를 치고 난 후인지라 나는 2kg에 대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좀 거대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역시 러브스타의 모습을 한 것이었고,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큰 것인지, 

200불이면 너무 호되게 받아 처먹는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별 감각이 없었다.

얼마 후! 

드디어 요리가 전개되었다. 

우아! 문자 그대로 산해진미(山海珍味)였다. 

하나의 러브스타를 잡았는데, 아니 단 한 마리의 러브스타를 잡았을 뿐인데, 

아니 이렇게도 푸짐한 요리가 나오다니! 

내가 보스톤에서 자랑스럽게 먹던 그런 러브스타의 살코기 내용보다 실제적으로 한 열배는 되는 것 같았다. 

이것은 완전히 우리의 상식적 개념을 뒤엎는 사건이었다. 

진저 (생강)소스, 오이스터(굴) 소스, ……

맛을 달리해서 푸짐하게 벌려 놓은 단 한 마리의 요리를 우리 셋이서 먹다 먹다 다 끝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금당(金唐)의 요리솜씨였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그 딱딱한 러브스타의 껍질들을 말랑말랑한 종이처럼 부드럽게 만들어 놓았는지, 

살은 뭉텅뭉텅 푸짐하게 그 신선한 향기를 있는 그대로 발산했다. 

남대양의 모든 신선한 바닷기운을 농축한 듯 그 쫄깃쫄깃하면서 투명한 아삭아삭함, 

그리고 고상한 생강기름의 그윽한 향기는 도무지 지상에서 내가 맛보았던 최상의 감미로운 요리 같았다. 

음식에 관한 한 나는 실전에 강한 쿠킹의 도사이기도 하고, 

다양한 국제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함부로 과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드니 수쎅스의 진 탕 러브스타 요리만은, 

그 살점을 말캉 씹는 첫입의 순간에 그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감동의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 지구상의 내노라하는 구어메이(gourmet, 미식가)들이여! 

시드니의 진 탕으로 가라! 

그리고 러브스타 요리 한 접시만 시켜먹게! 

200불은 결코 아까운 돈이 아니니까!

맹자(孟子)의 식색(食色)을 논하다가, 

너무 이야기가 가로 새고 말았지만, 하여튼 인간에게 맛있는 것을 먹는다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못지 않게 인간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쾌락이 바로 색(色)인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사랑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여기서 사랑이란 매우 구체적으로 이성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은 애타는 그리움이다. 

사랑은 열정이다. 

사랑은 불꽃이다. 

아니 그것은 훨훨 타오르는 열화다. 

사랑은 내 몸의 케미스트리(chemistry)인 것이다. 

내 몸이 불타오르는 화학반응인 것이다. 

모든 정신적 사랑도 결국은 신체적 사랑으로 꼴인한다. 

아니 모든 정신적 사랑도 신체적 사랑의 전제가 없다면 그와 같이 열화와 같은 형태를 띨 수가 없다. 

신체적 사랑이 빠진 정신적 사랑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그러한 전제와 가능성 속에서 현존하는 것이다. 

이성의 교합의 순간처럼 인간에게 쾌락을 주는 것은 없다. 

아무리 부정해도, 

아무리 부정해도, 그것은 지고의 열락(悅樂)이다. 

지고의 황홀경이다. 

그러니 길거리가 온통 그러한 케미스트리로 들끓고 있는 환경에서 요즈음 젊은이들이 

그러한 열락에 몸을 내맡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짜릿한 몸과 몸의 언어는 아무리 되풀이해도 그 순간만은 어느 무엇도 비견될 수 없는 강렬한 즐거움인 것이다.

몸과 몸의 만남, 

규(竅, ‘구멍’의 뜻인데 동양고전의 표현이다)와 규의 만남, 

우리는 그 만남을 통해 인간관계의 자유로움을 획득한다. 

세속적 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획득한다. 

그래서 인간은 성이라는 자유의 매력에 매료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결코 내적으로, 외적으로 모두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자유는 순간이다. 

그것은 세속적 규율을 해탈시키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더 큰 규약과 제재와 규율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규약과 규율의 질서를 획득하지 못할 때는 사랑은 파괴적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비극이 생겨나는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존재의 파라독스의 조건이다. 


저 기사의 손을 빛나게 해주고 있는 저 여인은 누구뇨?
What lady's that which doth enrich the hand Of yonder knight?
 
오오! 그녀의 아름다움은 정열의 횃불이 더 붉게 타오르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구나.
O, she doth teach the torches to burn bright.
 
마치 검은 에티오피아의 황녀의 귀밥에 달려 있는 찬란한 보석처럼,
저 여인은 검은 초야(初夜)의 뺨에 달려있는 듯,
It seems she hangs upon the cheek of night
As a rich jewel in an Ethiop's ear.

저 여인의 아름다움,
만지기엔 너무도 현란하고 그렇다고 이 땅에 내려놓기엔 너무도 고귀하다.
Beauty too rich for use, for earth too dear.
 
보아라! 주변의 아가씨들
너머로 빛나는 저 자태,
마치 떼지어 다니는 까마귀속의 백설의 비둘기,
So shows a snowy dove trooping with crows
 
저 춤의 박자가 종료되면 저 여인이 멈출 곳을 내 미리 눈여겨 보아두마.
As yonder lady o'er her fellow shows.
The measure done
I'll watch her place of stand,
 
그리고 그녀를 휘감아 나의 무례한 손길이 축복을 받도록 해야겠군.
And touching hers, make blessed my rude hand.
 
나의 가슴이 여태까지 과연 사랑을 알았던가?
Did my heart love till now?

지금 불타오르는 나의 시선이 그것을 부정하네!
Forswear it, sight.

나는 이 밤까지 진정한 아름다움을 본적이 없었노라.
For I ne'er saw true beauty till this night.


나는 대학교시절부터 셰익스피어를 원서로 암송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 자신이 동양고전의 학문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너무 한문만 읽다 보면 사람이 고리타분해지고 

구질구질한 냄새가 날 것 같은 컴플렉스 때문에 셰익스피어를 암송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를 원어로 읽을 때 느끼는 그 마제스틱(majestic, 장엄한)하면서도 

인간의 내면의 감정을 후려쳐내는 언어의 마력은 

이태백(李太白)의 분방한 시(詩)나 백거이(白居易)의 감성적인 고시(古詩)나, 

소동파(蘇東坡)의 단아한 사(詞)의 맛과도 또 다른 깊이를 간직하고 있었다.

상기(上記)의 인용은 바로 로미오가 쥴리엘을 처음 쳐다보는 장면이다. 

나의 번역이 셰익스피어 원어의 맛을 얼마나 울겨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영문학자들의 현존 번역들은 너무도 살아있는 예술의 감동을 무시하고 있다.

아~ 보아라! 

그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순간인가? 

한 남자가 한 순결한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읽고 

황홀경에 빠지는 그 순간의 감동을 어찌 이다지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에게 이 이상의 아름다운 순간이 또 있을 수 있는가?


[쥴리엘의 손을 잡으면서]

로미오: 나의 천하고 무례한 손이 이 거룩한 성소를 더렵혔다면
나의 부드러운 죄업은 이것이외다.
나의 두 입술이여!
얼굴을 붉히는 두 순례자 되어, 여기 수줍게 서 있소이다.
그 거친 만짐을 다시 하느적거리는 키스로써 부드럽게 고르려 하오.
Romeo. [Takes Juliet's hand]
If I profane with my unworthiest hand
This holy shrine, the gentle sin is this:
My lips, two blushing pilgrims, ready stand
To smooth that rough touch with a tender kiss.

쥴리엘 : 착하신 순례자시여! 그대의 손을 너무 비하시키지 마옵소서.
고상한 예절로 나의 성소를 방문했거늘.
성자에게도 순례자의 손이 만질 수 있는 손은 있소이다.
손과 손이 맞닿으면 성스러운 순례자의 키스가 되오이다.
Juliet. Good pilgrim,
you do wrong your hand too much,
Which mannerly devotion shows in this;
For saints have hands that pilgrims' hands do touch,
And palm to palm is holy palmers' kiss.
 
로미오: 성자에게도 거룩한 순례자의 입술이 닿을 수 있는 입술이 있지 않소이까?
Romeo. Have not saints lips,
and holy palmers too?

쥴리엘: 아아~, 순례자이시여! 입술은 기도에 써야하는 법이라오.
Juliet. Ay, pilgrim,
lips that they must use in prayer.

로미오: 오~ 그렇다면, 사랑스러운 성자이시여!
이 손이 할 수 있는 것을 이 입술이 할 수 있게 하옵소서.
내 입술은 간구하오이다.
들어주옵소서. 소망이 절망으로 바뀌지 않도록.
Romeo. O then, dear saint,
let lips do what hands do:
They pray: grant thou, lest faith turn to despair.

쥴리엘: 성자는 움직이지 않소.
기도하는 자의 간구는 들을지라도.
Juliet. Saints do not move,
though grant for prayer's sake.
 
로미오: 그렇다면 움직이지 마옵소서.
나의 기도의 표험을 내가 받을 동안.

[강렬하게 키스한다.]

이로써 나의 입술의 죄가 그대 입술로써 씻어지오리다.
Romeo. Then move not,
while my prayer's effect I take.

[He kisses her.]

Thus from my lips, by thine, my sin is purg’d

쥴리엘: 그렇다면 나의 입술은 그대 입술의 죄를 간직하고 있으오리다.
Juliet. Then have my lips the sin that they have took.
 
로미오: 나의 입술의 죄라구요?
아~ 얼마나 감미로운 책망이시오니이까?
나의 죄를 내가 다시 가져가오리다.

[두번째 강렬한 키스.]

Romeo. Sin from my lips? O trespass sweetly urg'd.
Give me my sin again.

[He kisses her]

 
이 얼마나 미묘한 감정의 묘사인가? 

처음 멀리서 바라본 로미오가, 

곧바로 줄리엘과 키스를 교환하기까지, 

그 성스러운 열화(熱火)의 순간을 성자와 순례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끌어가고 있다. 

성자는 움직이지 않는 음(陰)의 이미지요, 

순례자는 움직이며 갈구하는 양(陽)의 이미지다.
 
그런데 나는 이 젊은이들의 열화의 순간을 이다지도 고요하고 성스럽게, 

그러면서도 모든 격조와 섬세한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감미롭게 표현하고 있는 

셰익스피어라는 작가의 언어적 상황이 참으로 궁금했다. 

과연 노련한 한 작가의 손에서 그냥 상상과 감정이입만으로 이렇게 리얼한 언어들이 쏟아질 수 있을까? 

도대체 셰익스피어라는 천재는 어떠한 인간이었을까? 

(『로미오와 쥴리엘』의 집필연대를 1595년으로 추정하면, 31세의 작품이 된다.)

최근에 한국에도 영화를 통해 선 보인 톰 스토파드(Tom Stoppard)의 명작은 

바로 이러한 나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죽어있는 상상의 언어가 아니라 살아있는 삶의 언어였던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상상 속에서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바로 젊은이의 열화(熱火) 속에서 붓을 옮긴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열애(熱愛) 중이었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Shakespeare in Love)』! 

자기 신분을 속이고 남장을 해서 로미오의 역을 맡은 레쎞스 가(家)의 딸 비올라와, 

당시 무명의 작가인 셰익스피어는 사랑중이었다. 

그 애절한 사랑,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업의 굴레 속에서 그의 깃털 펜은 굴러갔던 것이다. 

그 감미로운 속삭임들은 모두 셰익스피어의 삶의 현실적 고뇌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20세기의 셰익스피어라고까지 불리우는, 

우리 시대의 탁월한 극작가 스토파드의 고전해석이다. 

물론 이 설정은 모두 픽션이다. 

그러나 이러한 픽션은 우리에게 사랑의 진실을 가르쳐준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보다 더 행복한 삶의 순간이 어디 있으랴!
 
언젠가 공자(孔子, 콩쯔)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색을 좋아하는 것만큼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子罕」].”


우리의 자녀들이 여자를(이성을) 좋아하는 것만큼, 

공부를 좋아한다면 우리의 부모들은 그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말을 하는 공자(孔子) 역시 색골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체험이 없이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색을 좋아하는 것만큼 공부를 좋아하는 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 하는 것은, 

실제로 보지 못했다 함이 아니요, 그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어법이다. 

즉 공자에게서도 공부함의 이상(理想)은 호색(好色)의 이상(理想)이었다. 

호색(好色)의 강렬함의 자신의 체험을 기준으로 공자는 호덕(好德)과 호학(好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이 때 바람을 피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언급이 공자(孔子)가 위령공(衛靈公)의 음탕한 미녀부인 남자(南子)를 만났을 때 즈음의 발설로 보고 있다.

그런데 사실 내 경험을 가지고 얘기를 하면 

여자를 좋아하는 것 만큼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호학(好學)의 즐거움이 호색(好色)이나 호식(好食)의 즐거움에 결코 뒤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평생 공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사실 공부는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다. 

재미가 없다면 내가 공부를 할 리가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고, 

또 공부를 하다 보니까 공부가 재미있어진 것이다. 

사실 색식(色食)의 즐거움은 너무도 짜릿하고 강렬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도저히 식색(食色)만으로는 재미가 없어서 살 수가 없다. 

먹기 위해서만 살고, 

성교의 쾌감을 누리기 위해서만 산다고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그것이 재미있을까?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지속적인 재미를 줄 수 있을 것인가?
먹는 것도, 맛없는 것을 계속 먹다가 어쩌다 미식(美食)을 만날 때 우리는 더 없는 감미로움을 느낀다. 

색(色)도 어쩌다 미색(美色)의 분위기를 만나야 즐길 수 있는 것이고, 

로맨스도 뭔가 여운이 감도는 정도래야 감칠 맛이 있는 것이다. 

유곽의 여인들에게 있어서 성교가 과연 무슨 재미가 있을까? 

매일 매일 닥쳐오는 기나긴 밤이 지리한 엔터테인먼트의 업보라고 한다면 

그것이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로맨스는 도저히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확언하건대, 

공부하는 것만은 매일 매일 해도 재미있는 것이다. 

최소한 식색(食色)보다 더 지속적이고 더 짜릿한 재미가 있는 것이다. 

미지의 세계를 더듬는 공부의 황홀경은 

사실 인디아나 죤스의 갖가지 어드벤처보다도 더 짜릿하고 더 스릴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현실적 시공에 얽매이지 않는 무궁한 모험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부하는 재미는 지속적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지루하지 않고, 

아무리 해도 지칠 줄 모르는 것이 공부인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만 생각하고 느낀다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 한국의 부모님들께서는, 

우리의 자녀들이 모두 나 도올처럼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오죽이나 좋아하실까? 

공부하라고 매일 매일 닥달치는 괴로움도 없을 것이요, 

노상 어딜 갔다가 그렇게 늦게 들어오나고 야단칠 시름도 없을 것이다. 

왜 우리의 젊은이들은, 공부의 재미를 못 느낄까?

 나 도올의 이러한 진실하고 평범한 체험담이 도무지 그들에게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어떻해야 좋을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상규(上竅, 食)와 하규(下竅, 色)의 쾌락에만 방치해 두어야 할 것인가? 

오는 21세기는 이규(二竅)의 세기가 될 것인가?

자아! 

한번 잘 생각해보자! 

이런 문제들을! 곰곰이 짚어 보자! 이런 문제들을!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요즈음의 틴에이저(teenager)치고 스케이트 보드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고. 

HOT같은 댄싱가수그룹의 춤 같은 것을 흉내내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NBA 농구선수, 마이클 죠단(Michael Jordan) 흉내내며 

농구코트에서 공을 요리조리 돌리고 굴리며 바라별 묘기를 다 부리는 것은 다반사!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스케이트 보드를 잘 타는 아이를 쳐다보는 것은 매우 즐겁지만, 

실제로 그렇게 스케이트 보드를 잘 타기까지 보드에 들인 그 아이의 공력은 시간적으로도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그 고된 훈련의 과정이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즉 열중은 했을지언정, 

반드시 그것이 쾌감을 주기 때문에 그 고된 훈련의 시간을 소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힙합댄스만 하더래도 그것이 보기는 즐거울 수 있어도, 

그렇게 즐겁게 멋있게 동작을 맞추어 자유자재로 춤을 출 수 있게 되기까지 들이는 몸의 공력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시간과 정력이 소비되는 것이다. 

영화관 막간 선전에 나오고 있는 유승준군의 헤드스핀을 쳐다보면 그 정도로 몸을 놀릴 수 있는 노력이라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의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도 

독파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요즈음같이 청량한 천고마비의 계절에, 

강변이나 해변에서 젊은이들이 요트를 타는 모습이나 물보라를 치면서 수상스키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신이 난다. 

그런데 문제는 요트를 타고 싶다고 해서 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상스키를 타고 싶다고 해서 스키구두를 발에만 끼면은 끝나버리는 그런 얘기가 아닌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것과, 

공부를 안하고 딴짓을 하는 것, 

그 양자는 매우 다른 인간의 행위인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지극히 공통의 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즉 노력과 시간과 훈련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부를 안 하고, 

노는 일조차, 

노력과 시간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요즈음 젊은이들은 스케이트 보드나 힙합에는 그 쓰잘 데 없는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면서, 

그 시간을 공부에는 쏟질 않는가? 

분명 공부하는 것이 스케이트 보드보다는 더 확실한 효과가 있고, 

더 지속적이고 더 다양한 재미를 줄 수 있으며, 

더 확실한 삶의 가치와 보람을 확보해준다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한데, 

우리의 자식들은 왜 이것을 모를까? 

아무리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움게 외쳐봐도 소용없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역시

'공자왈 맹자왈(孔子曰 孟子曰)'이나 '임마누엘 칸트'에게 보다는,

'스케이트 보드'나 '힙합,' '테크노 댄스'로 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립씽크 힙합보다는 공부가 확실히 더 재미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내가 공부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공부가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재미있게 느낄 수 있게 되기까지 재미없고 지루할 수도 있는 훈련의 기간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힙합을 자유자재로 추는 것은 재미있지만, 

그 자유자재로움에 도달하기까지는 결코 즐거울 수만은 없는 시간과 정력이 소요되는 것과 매우 동일한 이치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우리의 분석의 최종 결론은 이러하다. 

힙합을 배우는 과정과 공부를 배우는 과정을 비교하면, 

역시 공부를 배우는 과정이 더 어렵고, 

더 시간이 많이 걸리며, 

더 지루하게 느껴지며, 

무엇보다도 인간을 집중하게 만드는 흡인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힙합이나 스케이트 보드는 그 습득과정이 재미없을지라도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분석에 있어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점검해야 할 사실은 바로 우리가 그냥 공부라고 말해온 내용, 

즉 인간의 지식이라고 부르는 이 사태의 본질적인 정당성에 관한 것이다.
과연 지식이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 

지식의 습득과정이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스케이트 보드나 힙합만큼도 매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이라면, 

과연 그러한 지식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느 정도 정당한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인간이 꼭 지식을 추구해야만 훌륭해지는 것일까?

여기 지나온 20세기를 반성해 볼 때, 나는 단언한다. 

지식(Knowledge)이 삶(Life)과 대적적(antithetical)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지식이 권위체계로서 삶 위에 군림해왔다는 것이다. 

내가 산 세기를 회고해 볼 때, 

나는 아무런 생각의 점검도 없이 무조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를 모르면 병신취급 받는다는 압박감 속에서 살았다. 

다방에서 오바깃털을 세우며 커피향을 후후 불어가며 최소한 사르뜨르(Jean-Paul Sartre: 1905~1980)나 

하이데가(Martin Heidegger: 1889~1976) 정도는 씹어대야만 가오가 서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의 삶의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서라도, 

나의 삶의 모든 요구를 희생시키더라도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나 하이데가를 알아야만 한다는, 

검증되지 않은 강박관념 속에 반세기를 산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젊은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나의 강박관념이 말소되어 버린 것이다. 

삶 앞에 지식이 권위적 존재로서 군림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풍요의 덕분일까?
 
21세기의 제3 주제로서 

내가 말한 이 지식과 삶의 화해라는 문제는 인류문명사의 매우 다양한 측면을 포섭하는 문제이다. 

바로 이 지식의 정당성에 관하여 

가장 본원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고전이 바로 이 『노자』 오천언(五千言)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요청해야 하는 것은 지식과 삶의 화해의 문제다. 

과연 나는 이성의 문제를 알기 위해, 

그 난해한 언어로 쓰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의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느라고 몇년 아니 몇 십년의 세월을 투자해야만 하는가? 

오는 21세기에도, 

앞으로 100년 후의 조선의 대학생들에게도, 

『순수이성비판』이 고전(古典)의 자격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는 전혀 공부할 필요가 없는가?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의 카리큐럼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이 

이러한 본원적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비견이 없이 우왕좌왕하는 데서 생겨나는 과도기적 표류현상이다. 

교육부는 암암리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기준에 의해 

학문 그 자체를 터무니 없이 천박하게 만드는 것만을 개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보수적인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의 주장이 그대로 21세기에도 지속적인 정당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인지?

우리가 이러한 주제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고민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지식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다.

최근 ‘복제 양 돌리’의 문제를 두고, 

또 유사한 사태의 무궁한 발전가능성을 전제로 전 세계적으로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았다. 

과연 인간의 지식이 모든 것을 다 알아낼 수 있고, 

모든 꿈을 다 실현시킬 수 있다해서 우리는 지식의 진보에 따라 되는대로 다 캐내고 다 현실화시키면 되는 것인가? 

유전자 조작이 쉽게 가능해진다고 해서, 

수십억만년을 통하여 형성되어온 DNA의 배열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이 과연 지식의 도덕성인가? 

지상의 배추와 지하의 무를 결합시키는 무추의 생산이 마음대로 가능해지고, 

미꾸라지 하나도 가물치보다 더 큰 거대 종자로 개종하는 것이 마음대로 가능하다고 해서 

과연 ‘생산성’의 이름 아래 그것을 그렇게 조작하는 것이 과연 인간지식의 위대한 진보의 도덕적 결과인가? 

무와 배추가 아무 탈 없이 엄존하는데, 

왜 구태여 무추를 만들어야 하는가? 

미꾸라지는 몇백 만년을 우리와 같이 살아온 그 모습대로 얼마든지 진흙 속에 뒹굴고 있거늘, 

100마리분의 고기를 한 마리 사육으로 얻기 위해 과연 거대 미꾸라지 종자를 만들어야만 하는가? 

국가 예산을 낭비하면서 그따위 조작이나 하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과연 과학자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따위 과학자들을 만드는 것이 과연 우리 자녀들을 공부시켜야 하는 소이연일까?
 
인간의 지식은 시대에 따라 그 양태가 달라진 것이다. 

20세기에 우리가 콤플렉스를 느낀 지식의 양태는 모두 이 ‘과학’이라는 한 마디로 집약되는 것이다. 

인문과학ㆍ사회과학ㆍ자연과학ㆍ예술과학…… 과학 아닌 지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우리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 

즉 독서를 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오늘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고전학’에 불과했다. 

그것은 전혀 과학(사이언스)이 아닌, 

십삼경(十三經)이라고 하는 유가경전의 습득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체계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문명을 충분히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에 과연 과학이라고 하는 지식체계가 20세기와 같은 권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우리가 과학이라고 하는 지식체계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과학이 생산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명의 힘 때문인 것이다. 

그것의 도덕적 가치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과학이라고 하는 정보체계가 점점 보편화되어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과연 과학이라고 하는 지식의 한계는 설정되지 않아도 좋은 것인가? 

이러한 모든 문제에 관하여 나는 독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갈구한다. 

결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먼 훗날의 자녀들을 위하여 사려 깊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p84)
 이 글은 <노자와 21세기 1>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도올(김용옥) - 노자와 21세기 1
통나무 - 1999.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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