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우리는 누구나 여행자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여행을 온 것이다.
더 배우고, 더 경험하고, 더 성장하기 위해‥‥.,
이 여행을 마치고 떠나갈 때, 나는 신 앞에 서서 이것 하나만은 말할 수 있다.
나는 여행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노라고.
그래서 늘 길 위에 서 있고자 노력했노라고.
내 배움은 학교가 아니라 길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차창 밖으로 온통 오렌지빛 태양이 쏟아지는 북인도 들판을 지나 기차가 럭나우 부근의 한 역에 섰을 때,
나는 갑자기 망고주스가 마시고 싶어졌다.
하지만 역 구내 어디를 둘러봐도 콜라와 환타만 있을 뿐, 내가 원하는 망고 주스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차가 잠시 정차한 틈을 타, 옆사람에게 배낭을 맡기고 재빨리 역 밖으로 망고주스를 사러 나갔다.
인도에선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마셔야만 한다.
그것이 인도여행에서 지켜야 할 수칙 중 하나다.
그렇지 않으면 태양열에 몸의 수분을 빼앗겨 탈수증에 걸리거나, 심하면 영혼까지 메말라 버리기 십상이다.
처음 인도 여행을 할 때 사흘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기차 여행을 한 결과,
나는 나무랄 데 없는 고행 수도승이 되어 있었다.
역 앞의 한 가게로 뛰어갔을 때, 진열장에 망고 주스 몇 개가 나란히 포개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서 한 남자가 가게 주인에게 뭐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는 손목에 금팔찌와 금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목에도 영락없이 금줄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내가 그 금붙이들을 유심히 바라보자,
남자는 씩 웃으며 자기는 시내에서 금은방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기가 좀 차고 다니다가 팔기도 하고 그러는것 같았다.
웃을 때 보이는 금이빨은 어찌할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남자가 대화를 끝내고 나가자,
나는 얼른 가게 주인에게 다가가 힌두어로 말했다.
"무주헤 푸르티 디지예!" 그러자 늙은 가게 주인이 영어로 말했다.
"망고 주스를 달란 말이지?" 내가 다시 힌두어로 말했다.
"잘디 잘디 디지예!" 그가 다시 영어로 대꾸했다.
"빨리 달란 말이지?"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걸치고 있는 흰색 도티를 느릿느릿 고쳐 입었다.
* 도티(인도 남자들이 입는 치마처럼 생긴 옷)
그런 다음 거의 시속 10미터의 속도로 천천히 망고 주스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꾸물대다간 기차를 놓칠 염려가 컸다.
기차뿐만 아니라 기차에 두고 온 배낭까지 몽땅 잃어버릴 판이었다.
그 금붙이 남자 때문에도 몇 분을 지체했었다.
나는 속이 타서 다시금 서툰 힌두어로 노인을 재촉했다.
"바바지, 잘디 잘디! 데르호 가이 하이!"
노인은 속도를 낼 생각은 하지 않고, 뚝딱거리는 인도식 영어로 맞받아쳤다.
"시간이 없으니까, 서두르란 말이지?" 그리고 나서 그는 말했다.
"서둘러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어.
서두르다간 오히려 잃기 마련이야."
그렇게 훈계를 한 뒤, 노인은 더욱더 느린 동작으로 진열장을 향해 다가갔다.
그렇다고 다 늙은 사람을 뒤에서 떠다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연신 기차역을 돌아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드디어 진열장 유리문이 힘겹게 열리고,
마치 아잔타 석굴에서 발굴한 것처럼
먼지가 수북이 쌓인 망고 주스 다섯 개가 꺼내어지기까지 한참의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까만 비닐 봉지에 담기기까지는 족히 백 년은 더 걸렸다.
나는 너무도 초조한 나머지 소변이 다 마려울 지경이었다.
노인의 손에서 망고 주스 봉지를 거의 빼앗다시피 하고서, 나는 서둘러 돈을 건넸다.
잔돈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 그날의 가장 큰 실수였다.
노인은 내가 지불한 백 루피짜리 지폐를 마치 위조 지폐라도 되는 양
한참을 이리 뒤집어 보고 저리 뒤집어 본 뒤, 돈을 이마에 갖다 대고 시바 신께 기도까지 올리는 것이 었다.
그런 다음 돈통을 열어,
잔뜩 뜸을 들이며 때묻은 동전들을 하나씩 카운터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1루피짜리, 2루피짜리, 심지어 잘 쓰지도 않는 10파이샤와 50파이샤 동전까지 등장했다.
* 50파이샤(파이샤는 100분의 1루피)
어찌나 주의깊게 동전들을 선택해 꺼내 놓는지,
그 사이에 인더스 강에서 두세 개의 문명이 발생하고도 남을 긴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노인이 거스름돈을 다 꺼내 놓았을 때, 기차가 꽈앙하고 기적을 울렸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나는 재빨리 카운터 위의 동전들을 손바닥에 쓸어담았다.
그러다가 그만 동전 몇 개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얼른 허리를 굽혀 팔랑개비를 도는 동전들을 주워 모으자, 노인이 느린 어조로 일침을 가했다.
"서둘러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내가 방금 전에 말했지.
서두르다간 오히려 잃기 십상이야."
노인이 뭐라고 떠들든, 나는 부리나케 동전들을 주워 들고 날쌘돌이처럼 기차를 향해 뛰어갔다.
구름다리를 건너 내가 헐레벌떡 자리에 돌아온 뒤에도
기차는 헛기적만 울려 댈 뿐 도무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인도의 기차답게 서두를 게 하나도 없다는 식이었다.
무사히 기차에 올라탔다는 안도감과 함께, 왠지 모를 허무감이 가슴 밑바닥에서 밀려왔다.
때로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이 허무감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망고 주스를 사러 뜨거운 태양 아래를 뛰어다녔기 때문에 더욱 목이 말랐다.
갈증도 식히고 까닭 모를 허무감도 달래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인도산 망고 주스가 최고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망고 주스가 보이지 않았다.
동전을 주워 갖고 달려오느라 주스가 든 비닐 봉지를 가게 카운더 위에 그냥 놓고 온 것이다.
나는 더없이 절망스럽고, 영혼까지 허무해져서 눈을 감고 자리에 쓰러졌다.
망고 주스가 없다고 생각하니 아까보다 더 목이 탔다.
그러나 금방 떠날 것처럼 울부짖는 기차를 두고 다시 가게까지 갔다 올 순 없는 일이었다.
내가 못내 아쉬워하며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가게 쪽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흰색 도티를 입은 한 노인이 플랫폼 저쪽에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손에 까만 비닐 봉지를 들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그 가게 주인이었다.!
나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목청을 다해 소리쳤다.
"여기에요, 여기!"
그 순간, 기차가 꽈앙 하고 인정사정없이 기적을 울려 댔다.
기차는 정말로 떠날 것처럼 덜컹 하고 움직이기까지 했다.
나는 너무도 안타까워 창 밖으로 손을 내저으며 몸부림쳤다.
이러다간 정말로 망고 주스를 영영 놓칠 판이었다.
나는 노인에게 좀더 속도를 내라고 힌두어로 다그쳤다.
"이다르 잘디 잘디 아이예!"
상황을 알아차린 앞좌석 인도인들도 덩달아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응원을 했다.
"바바지, 잘디 잘디 아이예!"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여전히 시속 10미터의 속도를 유지한 채, 그 와중에도 영어로 맞받아쳤다.
"나더러 빨리 오란 말이지?"
노인이 거의 다 와가는 순간, 마침내 기차가 출발했다.
나는 만화영화 속 주인공처럼
팔을 두 배나 길게 늘어뜨려 가까스로 노인의 손에서 망고 주스 봉지를 낚아챘다.
나는 노인이 베풀어 준 수고로움에 감동해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노인에게 소리쳤다.
"수크리아, 바후트 수크리아!"
그 순간 노인이 손가락으로 허공을 찌르며 영어로 소리쳤지만, 기차가 멀어져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뭐라고 소리치는지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대단히 감사하단 말이지?
서두르다간 오히려 잃기 마련이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지.
그것을 절대로 잊지 말라구!"
노인의 말에 화답하듯 기차가 또다시 기적을 울리고,
노인이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기차가 여유롭게 북인도 평원을 달리는 동안,
나는 새처럼 쪽쪽거리며 망고 주스 다섯 개를 앞좌석 인도인들과 나눠 마셨다.
인도산 과일 주스의 달콤한 맛도 맛이지만,
힌두 노인의 친절함과 속 깊은 지혜가 더 깊이 내 영혼의 갈증을 식혀 주었다. (p22)
※ 이 글은 <지구별 여행자>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김영사 - 2002. 11. 27.
[t-07.10.05. 221030-1647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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