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클레이번 - 데드라인」
[210814-052349]
4
그 시간, 나는 점점 술에 취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그 시간, 10시 20분쯤에 말이다.
술집 고든스의 높고 둥근의자에 엉덩이를 나무 둥치처럼 단단하게 박고서
금주령을 코앞에 둔 알코올 중독자처럼 아름다운 액체를 죽이고 있었다.
술에 취하는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온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으니까.
위스키 더불 넉 잔째를 홀짝이던 어느 순간부터 술집 내부가 발 밑에서 대형 쾌종시계 추처럼 앞뒤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든스는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유클리드 얘비뉴의 모퉁이에 자리잡은 식당 겸 술집이었다.
벽돌로 지은 낡은 건물의 정면 외벽에는 초록색 차일이 드리워져 있고
나무판 장식이 돋보이는 후덥지근한 실내에는 랜턴이 매달려 있었다.
또 그럴싸한 맥주들이 진열되어 있어 그곳은 도회풍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사랑을 받을 법한 여자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장소가 되었다.
가끔 사람들로 붐비기도 했으며,
섹스 사냥에 동원된 창槍과 향기가 술에 마음을 쏟는 남자들을 심란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여름철 월요일에는 꽤 조용한 편이어서 식당 쪽에서 속삭임 같은 부드러운 대화가 간간이 새어나올 뿐이었다.
스탠드는 맞은편 벽 귀퉁이에 걸린 텔레비전에 넋을 놓은 청년 하나와 나를 빼면 텅 비어 있었다.
"닐!"
내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오크로 된 스탠드를 술잔으로 두드렸다.
"니~일! 닐!"
닐은 고든스의 주인이었지만 타고난 바텐더여서 오늘 밤도 바를 맡고 있었다.
동그란 철테 안경 뒤로 보이는 홀쭉하고 심미적인
얼굴의 호리호리하고 창백한 사내인 그는 약간은 장 폴 사르트르를 닮은 모습이었다.
뒤로 묶은 머리와 꽃무늬 셔츠를 뺀다면,
그는 텔레비젼 아래쪽의 자기 자리를 떠나 내 쪽으로 다가오는 길에 조니 워커 한 병을 재빨리 집어들었다.
"이봐,
얼음이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이리 와야지."
내가 말했다.
그는 술병을 내 잔 위로 거꾸로 뒤집더니 넉넉하게 한 잔을 부었다.
"자네 오늘 실컷 마시고 있군." 차분하면서도 따분한 목소리였다.
"차는 집에 두고 왔기를 바라네."
"이봐." 나는 잔으로 원을 그리면서 코 가까이 들어올렸다.
"나 말야,
이 대륙에서는 최고의 운전자야."
"허, 이런."
"전세계에서도."
"그럼 난 지금 사형수와 이야기하고 있군." 닐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우표 수집한 거나 나한테 물려주지 않겠나?"
나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비어버린 안주용 과자 접시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더 격정적인 음악으로,
그리고 깨물 것도 더 주시고."
나는 요구사항을 말하고 다시 술을 들이켰다.
닐이 빈 접시를 치우고 과자가 가득 담긴 새 접시를 내놓았다.
나는 과자를 한 움큼 쥐었다.
"오늘 하루 종일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
닐은 야구경기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텔레비젼 쪽으로 흘깃흘깃 눈길을 돌렸다.
그러다가 체념한 듯 바에 몸을 기대고 나에게 관심을 잡중하려고 노력했다.
"너무 바빴어. 그때문이야." 내가 그에게 설명했다.
"말하자면 내 인생을 망치느라고 바빴다는 뜻이야.
내 마누라와 내 인생을,
그리고 직장까지."
"그 모든 것을 하루 만에?
자네 정말로 바쁜 사람이군."
"비극은 하루 만에 한 도시의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했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말을 했던가."
"맞아,
그는 이곳에만 오면 언제나 그렇게 말했었지.
괴짜 늙은이 아리스토텔레스.
우리는 그를 그렇게 부르지, 미친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삶은 예술을 흉내내는 거야."
"그렇지,
꽤 괜찮은 소피 터커의 말이지."
"맞아"
내가 대답했다.
둘이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심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스카치를 약간 마셨다.
"자네 얼음 소리 들었어?"
"아니."
"나직하게 딸랑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아주 나직이.....
아, 아닐지도 몰라,
내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참이었지?"
"여자는 남자와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려던 참이었지."
"아, 맞아.
여자와 남자,
남자라, 완전히 다르지."
"정말?" 닐이 되물었다.
"난 그런 소리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사실이야. 아주 달라."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담배를 쥔 손을 막연하게 휘저였다.
"남자란 봐,
발기가 되면 음경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하잖아.
남자의 관심은 오로지 그것뿐이야.
넣었다 뺐다.
성행위가 끝나면 그만이야.
그런데 여자는 봐,
모든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해."
"아이들 때문이겠지 뭐." 닐이 손으로 하품을 가리면서 대답했다.
"아이들 때문이라고." 내가 담배로 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이들이 늘 여자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거지.
아이들이 여지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단 말이지.
옳으냐 그르냐,
좋으냐 나쁘냐,
그렇다고 무슨 차이가 있어? 뭐가 달라지냔 말야.
어쨌든 우리는 모두 죽기 마련인데,
우린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텔레비전을 훔쳐보면서 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생각이 깊은 친구야, 에버렛.
난 인생의 대부분을 술집을 지키면서 살아왔어.
그런데 저녁 9시 30분 이후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래서 나는 상관의 딸을 따먹었어.
아니지, 이번에는 상관의 마누라지.
아니야, 기다려.
그의 딸, 맞아 그의 부인이야.
그래, 그렇다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지?
그것 때문에 내가 직장을 잃어야 한단 말인가?
그랬다고 마누라가 나를 내팽개쳐야 하냐구?"
"어, 글쎄."
"아니..... 최후의..... 심판이냐고."
나는잔을 쭉 비우고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도록 힘껏 내려놓았다.
"그때는 말야."
"알았어, 그 이야기는 이미 다 들었어."
닐은 바 아래에 놓여 있던 얼름통에서 얼음을 집었다.
그것을 내 잔에 붓고는 스카치 병을 거꾸로 들어올렸다.
나는 담배를 꼬나문 채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닐의 몸놀림을 지켜보고 있었다.
"최후의 심판이냐고."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건 옳고 저건 나쁘다고 강요하고 있어.
누군가를 살해하면 독극물 주사를 맞아야 해.
누군가를 건드리면 손가락질을 받아야 해.
멍청한 것들.
모두 멍청해. 닐, 안 그런가.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불행해져..
좋고 나쁜 것은 없단 말야.
생각하기 나름이지.
월리엄 셰익스피어.
빌리 빅 보이 그자신이 그렇게 말했어.
"그는 뭘 조금 알았어, 맞아."
"자네도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먼저 남을 심판하지 않도록 해.
예수가 한 말이야, 안 그래?"
"늙은 예수 선생.
요즘엔 그를 보지 못했군."
"봐, 내 부모가 문제였어.
양부모 말야." 내가 다시 말을 늘어놓았다.
"모두 대단한 변호사지.
자유주의자에다 거물급 중에서도 거물급이잖아.
불쾌한 사람들.
항상 옳은 일만 알았고, 항상 누가 나쁜 사람인지, 누가 올바른 사람인지를 따졌어.
늘 천사의 편에 섰지.
그들이 어떻게 알겠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않은지 그들이 어떻게 알아?
누가 그들에게 말해주는 거야?"
"플라톤일까?" 나는 힘센 말처럼 요동을 쳤다.
"짐작일 뿐이야." 닐이 대답했다.
"우리는 플라톤을 이해하지 못했어."
나는 잔 위로 머리를 숙인 채 갈색 액체 속을 부유하는 얼음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다가 음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술에 취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순간 삶에 대한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삶의 아이디어 말이다.
그런 아이디어들이 완벽한 의미를 지니며 사슬로 연결될 때,
다시 말해 창조라는 대장장이의 일터에서 버려진 연결고리들이
죽음과 세월의 베일을 걷고 선명해질 때에 이르러서야 그런 단계에 도달했던 것이다.
나는 트림을 했다.
목을 쑥 빼고 머리 쪽으로 스카치 잔을 들어올려 소리까지 내면서 액체를 빨았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불쌍한 인간이 있을까, 하고 자문해보았다.
또 실내에 손님들이 꽉 들어찼다고 상상하면서 이곳저곳에다 대고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에버렛." 닐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 제발."
터질 듯한 머리를 들어올리면서 나는 통렬하게 웃어 젖혔다.
"돌아갈 집이 어디 있어. 닐, 돌아갈 집이 없다고"
나는 더듬더듬 주머니를 뒤져 아내가 혜어지자며 빼준 결혼반지를 꺼냈다.
그 반지를 손가락 사이로 굴리면서 희미한 불빛에 비춰보았다.
반지를 보자 눈 앞이 흐릿해지면서 한심스럽게도 콧물까지 나와 훌쩍거리고,
닐의 입은 지독한 냄새를 맡았다는 듯 한껏 오므라졌다.
나는 그런 그의 코앞에 반지를 쑥 내밀었다.
"이거 보여?
그 안쪽에 적힌 거 보여?
그녀의 이름이야. 바버러 에버렛.
한 가족이 되기로 했었지!
우리는 인생의 동반자가.... 되기로....,
그 반지에는 우리의 모든 것이 담겨 있어.
들의 이름을 하나로 합친 거라구.
함께, 하나의 가족으로."
반지를 그렇게 들고 있는 것조차 너무 힘들다는 듯 내 손이 스탠드 위로 떨어졌다.
동시에 지나치게 조립이 잘 된 자동인형처럼
다른 한 손이 자동적으로 올라가면서 유리잔을 다시 입술로 가져갔다.
나는 이미 목이 매어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뒤틀린 입은 헤 벌라고 눈물이 가득 고인눈을 구역질 나는 꽃무늬의 움직임에 고정시킨 체 멍청하게 반짝이면서,
자리에 앉자 다시 한 번 죽음의 장막이 걷히는 것 같았다.
술 취한 눈으로 곁눈질한 것이었을까.
흐릿하고 건들건들 불안한 가운데 내 쪽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다가오는 한 줄기 빛,
순간적으로 섬광처럼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일련의 사건 뒤에 숨겨져 있었던 의미들을 드러내면서, 나는 입을 더욱 크게 벌렸다.
뜻밖에 떠오른 사실을 표현할 말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혀가 꼬부라지면서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닐은 곰곰 생각하는 듯한 시선을 다시 텔레비전 쪽으로 던지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목걸이!" 나는 마침내 말을 찾았다.
"응?" 닐이 도대체 관심이 없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 목걸이, 목걸이야."
겨우 말을 마치고 나는 의자 발판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나는 스탠드 가장자리에 걸쳐진 팔꿈치로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미끄러진 충격으로 잠시나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네 알아?" 나는 닐에게 물었다.
"그 여자가 아직도 목걸이를 하고 있었어."
"누구 말이야. 이 사람야?
우리가 지금 누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데?"
"러셀 부인, 위런의 할머니.
그럴 수가?
그것이 맞을까?"
나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두 눈을 힘껏 비비면서, 하지만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꼭 잡았다.
"그 목걸이 말야, 닐! 제기랄, 이럴 수가,"
"진정해, 에버렛."
"지금 당장 가야 해, 가야 한다고.
여기가 어디야?"
"가만, 가만. 자네는 취했어."
"나도 취한 줄 알아.
내가 그렇게 바보인 줄 알아?
나는 머리가 박살나도 좋아.
하지만 그 녀석이 그 여자를 쏜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어, 알아?"
"위런의 할머니?"
"에이미 월슨!"
"뭐라고?"
"봤어?
나는 그 사람을 봤어.
에이미의 아버지 말야.
텔레비전에 출연했을 때 그 사람을 봤지.
그가 그러더군.
살인자가 딸의 목걸이를 빼았아갔다고.
딸의 열여섯 살 생일 때 자기가 준 거라고 하더군.
그가 그렇게 말했어."
나는 다시 높다란 의자에 앉았다.
"그날 일어난 사건은 그런 식이었어.
그 여잔 이미 러셀에게 돈을 내준 뒤였어.
하지만 범인은 그 목걸이를 원했던 거야.
그 여자의 목에 총을 쏜 것도 그때문이지.
모든 것이 이제야 딱 맞아 떨어져.
그 사람들이 그걸 확인해야 해.
지금 몇 시야?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지?"
"잠깐만 기다려. 커피를 가져다 줄께."
***
"결백해, 그 친구는 결백하단 말야.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고 해. 닐!" 나는 절박하게 말했다.
"에바렛, 들어봐.....,"
닐이 통사정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다른 사나이도 팔을 잡으려고 달려들었지만 나는 팔을 확 잡아 뺐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야.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고."
나는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두 걸음 만에 문까지 닿을 수 있었다.
나는 놋쇠 문고리를 잡고 확 열어 젖혔다.
그 순간 문의 모서리가 이마를 때렸다.
"에이, 씨!" 얼굴을 감싼 채 뒷걸음질치면서 나는 투털거렸다.
"에버렛!" 닐이 외쳤다.
나는 그가 나를 붙잡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재빨리 다시 문 쪽으로 돌격했다.
한 손으로는 이마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차 열쇠를 움켜잡고서.
나는 찐득찐득하면서도 따스한 피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문턱을 넘어 밤으로 묻혀들 때도 피는 이마를 타고 내려 손가락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p406)
※ 이 글은 <데드라인>에서 발췌하여 정리하였음.
앤드류 클레이번 - 데드라인
역자 - 정명진
책세상 - 1997. 0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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