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형술-편지」
[210702-192249]
편지
정인아!
지금 당신은 무척 놀라고 있을 테지.
미안하다.
당신에게 처음 쓰는 편지가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당신이 이 편지를 보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에게 영영 편지 한 통 써 보낼 줄 모르는 재미 없는 남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래도록 그저 당신에게 '즐거운 편지'나 들려줄 수 있다면....,
하지만 또 모르지.
살아있음을 축복하기 위해,
함께 이 편지를 꺼내 읽으며 깔깔거리고는 북북 찢어 꽃가루처럼 날려 보낼 지도.
우리들의 숲속 그 어디쯤에 피워질 모닥불에
당신의 그 고운 손으로 태워져 푸른 하늘을 수 놓을 또 하나의 추억으로 남겨질 지도 모르지.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을 얼싸안고 온 숲 나무마다에 입을 맞추며 덩실덩실 춤을 출텐데....,
하지만 지금 그런 일은 기적에나 속하는 것이겠지.
모든 걸 뻔히 알고 있지만 상상만으로도 한없이 기쁘고 행복해지는 걸.
사랑하는 당신.
지금 내 심정은 바람 한 점 없는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 당신을 내던지고 온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어.
잔뜩 겁먹은 두 눈을 두리번거리며 사막을 헤매일 당신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아.
아, 어떻게 내가 당신의 그 갈라터진 외로움을 감싸안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당신의 그 메마른 슬픔을 적셔 줄 수가 있을까.
혹여 당신 지금 울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이 예쁘게 칠한 노란 우체통 앞에 서서 엉엉 소리내어 울고 있지는 않은가.
울지마라.
정인아.
나도 살고 싶어.
내 분신과도 같은 당신을 두고 어찌 나 혼자 떠나갈 수 있을까.
죽음의 마왕에게 내사지를 툭, 툭 떼내 준다 해도 난 아무렇지 않을 거야.
당신과 더 오래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풀잎 같은 당신 몸뚱아리를 다시는 안을 수 없다 해도,
꽃수레를 태우듯 당신을 업고 타박타박 걸을 수 있는 날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당신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새처럼 맑은 당신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이것이 우리 사랑의 운명인 걸.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찌 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운명인 걸.
그렇다면, 기꺼이 받아들여야겠지.
그것이 바로 당신과 나를 낳아준 자연의 법칙이라면,
계절에 순응하여 피고 지는 꽃처럼,
나 또한 가야 되겠지.
내 목슴 같은 당신.
너무 상심하지 마라.
행여 당신이 나의 부재를 못 견뎌 깊은 나락으로 스스로를 내던지려 한다면,
그건 바로 내 사랑에 대한 배반일 뿐이야.
몸은 비록 당신 곁을 떠날지라도
천지를 주고도 살 수 없는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는 걸 알아야 해.
변명 같지만,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건너야 할 자신의 사막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난 당신이 당신 자신의 사막을 사랑하길 바래.
어쩌면 당신은 그 사막을 건너는 법을 이미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들려주셨다던 노래를 기억하니?
당신이 그 노래처럼,
그렇게, 꿋꿋이 살아가기를 바래.
나무처럼 높이 걷고,
산처럼 강하게 살며,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심장엔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하며 살기를 바래.
그러면, 나 조환유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을 거야.
등나무 의자에 앉아 편지를 읽고 있던 정인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정인의 감은 눈으로 터진 우물처럼 눈물이 넘쳐 흘렀다.
"아저씨, 그 편지 아저씨가 보낸 거 맞죠?"
정인이 병일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난 아냐. 난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야."
병일이 말했다.
"이저씨밖에 없어요.
저 말고는 그동안 환유씨가 만난 사람이 아저씨 외에 또 누가 있어요?"
정인이 다시 병일을 다그쳤다.
"글쎄 난 아니라니깐,
근데 그게 정말 환유가 보낸 편지가 맞어?"
병일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틀림 없는 그이 편지예요.
그이 글씨가 맞아요.
제 남편 글씬데 제가 못 알아보겠어요.
소인이 찍혀 있는 우체국에도 가 봤어요.
우체국에서도 누군가 대신 편지를 보냈을 거라는 거예요.
아저씨가 환유씨 부탁으로 그렇게 하신 거죠.
네?"
정인이 손애 들고 있던 편지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정인씨......,"
"네?"
"차라리 내가 그 일을 한 거라면 좋겠어.
솔직히 난 아직도 긴가민가 해.
정인씨가 괜히 어떻게....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말야.
아무튼 나는 아니니까 다른 사람을 좀더 알아봐.
정 그렇게 궁금하다면 말야."
"...."
"혹시 그 출판사 사장한다는 그 친구분이 아닐까?
가장 친한 친구 사이인 것 같던데
그 왜 병원에 있을 때도 자주 찾아온 곤 했잖아."
"네....,"
정인이 명호를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병일의 말처럼 명호는 환유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환유가 만나는 친구들이 그리 많지 않기도 했지만,
병일만큼 환유가 자주 연락을 주고받고 하는 친구는 없었다.
병일을 만난 다음 날,
정인은 명호의 출판사로 찾아갔다
명호는 마침 자리에 있었다.
명호는 정인을 보고 몹시 놀리워했다.
"정인씨, 아주 좋아 보이는데요?"
"좋을 수 밖에요.
여전히 남편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걸요."
정인은 명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하하, 그 편지 말씀이시군요.
참, 그 편지 누가 보냈는지는 알아내셨습니까?"
명호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며 말했다.
"네, 아직.....,"
"혹시 수목원의 병일 아저씨한테 물어보셨습니까?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분이 한 일 같은데.....?"
명호가 설핏 웃음을 물고 말했다.
"명호씨.... 혹시 명호씨가 그랬으면서 저한테 지금 능치고 계신 거 아니예요?"
"제가요? 하하.
제가 그 깜짝쇼의 주인공이라면 얼마나 신나겠어요.
하지만 그 사랑의 전령사 역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입니다.
환유 녀석이 제일 친한 저한테 조차 귀뜸을 하지 않은 걸 보면 말입니다."
명호를 만난 이후로 정인은 더 이상 편지의 발신인을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그저 가끔씩 환유가 보낸 편지를 다시 꺼내 보며 환유의 사랑을 가슴에 꼭꼭 담고만 있었다.
11월 22일은 정인의 생일이었다.
그 날 정인은 또 다시 횐유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번에도 역시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편지 봉투에는 저번과는 다른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었다.
정인아!
이 편지를 받아든 지금까지도 이게 무슨 편지인지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생일 축하해!
아침에 따뜻한 국 한 그릇은 먹었는지 모르겠다.
장모님이 알아서 챙겨주셨겠지.
좀전까지만 해도 난 침대에 누워 당신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난 아직도 당신을 안고 있는 것만 같아.
네가 쓰러진 뒤로 아마 처음이었지.
당신 살내음이 너무 좋아 강아지처럼 내 몸 구석구석을 쿵쿵거리곤 했어
간밤에 잠든 당신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어.
당신이 그새 부쩍 자란 것 같다고 말야.
철부지나 다름 없던 예전의 당신 모습이 생각나 혼자서 웃었어.
당신, 기억나?
두 번짼가 이 집에 왔을 때,
당신이 오작교라 이름지은 저기 다리에 앉아 노래를 불렀던 거.
그때 당신은 연못 위로 두 팔을 늘어뜨리고 다리 위에 걸터앉아 있었어.
어린 아이처럼 두 발을 흔들흔들하며 노래를 부르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어.
그렇게 슬픈 노래를 그토록 귀업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당신밖에 없을거야.
--
오늘은 당신에게 부탁 한 가지만 할께.
내 책상 맨 아래 서랍을 보면 번역 원고가 있을 거야.
명호에게 그걸 좀 갖다 줬으면 해.
거의 다 했는데, 쓰러지는 바람에 마무리를 못했어.
마저 해서 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당신이 이 편질 보기전에 내가 명호를 볼 수 있으면 얘기해서 가져가라고 할께.
하지만 또 내일이 돼도 내가 이걸 기억하고 있을 지 자신이 없어.
요즘은 자주 많은 것들이 생각이 안 나.
당신이 놀랄까 봐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이것저것 잊어버릴 때가 많아.
명호 만나면, 끝내지 못해 미안하단 말 대신 좀 전해 줘.
그리고 서울 간 김에 바람 좀 쐬고,
집에 틀어박혀 꼼짝 않고 있을 당신 모습이 눈에 선해.
당신,
지금 모든 게 엉망이지?
혼자 밥 먹는 거 싫어하는 당신인데, 밥은 잘 챙겨먹고 있는지 몰라.
아침에 못 일어나 지각하지는 않어?
그래도 어떡하니, 참고 견뎌야지.
당신 생일,
다시 한 번 축하해.
내가 같이 있다면 당신을 아주 기쁘게 해 줄 텐데...... 멋진 선물도 주고 말야.
당신 나이 만큼, 스물 여덟 번의 키스를 보내며....,
정인은 환유의 책상을 열고 명호에게 줄 번역 원고를 찾았다.
그동안 정인은 원고 문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 환유의 물건들을 박스에 담을 때도 명호에게 줄 원고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번역 원고는 환유가 편지에 쓴 것처럼 책상 서랍 맨 아래칸에 있었다.
봉투 안에는 원고와 함께 원서도 같이 들어 있었다.
정인은 원고를 손에 들고 여기저기 뒤적이기 시작했다.
언젠가 환유가 읽어 주었던 '채식주의' 에 관한 글이 눈에 띄었다.
처음 펼쳐든 곳에 있는 글의 한 단락이 정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것은 스코트 니어링이 죽고난 후,
이 책을 쓴 그의 아내 헬렌이 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반 세기 동안 지속되었고,
그이가 백 살로 죽은 지 8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내 쪽의 사랑이 계속되고 있고, 그이 쪽도 그렇다고 믿는다.
아침마다 저녁마다,
순간 순간,
밖으로 나가든 안으로 들어오든,
어디에서나 기쁜 확실성을 가지고 내가 사랑 속에 살고 있으며
사랑으로 충만되어 있음을 느낀다.
스코트가 죽은 이래 나는 그이의 존재가 계속되는 느낌을 가져왔다.
쇼쇼니족의 의사가 말했다.
"죽은 사람이 정말로 죽은 것이라면, 왜 그 사람이 지금도 내 마음 속에서 걸어다니겠는가?"
스코트는 내 삶의 큰 부분 속에, 영원히 현재 상태로 남아 있다.
그 뒤를 이어 헬렌은
"나는 스코트가 죽은 뒤에도 그이와의 관계에서 지속적인 행복을 발견했다.
나는 죽은 뒤의 삶과 마찬가지로 죽은 뒤의 사랑을 믿는다"고 쓰고 있었다.
정인은 원고 뭉치를 덮고 다시 가지런히 챙겨 봉투에 집어 넣었다.
그랬다.
정인에 대한 환유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었고,
환유를 향한 정인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있을 때나 학교에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잠을 잘 때나, 환유와 정인은 늘 함께 있었다.
환유가 정말로 죽은 것이라면 어떻게 지금 이렇게 정인의 마음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다니겠는가.
정인은 이제 자신도 죽은 뒤의 사랑을 믿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해가 가기 전에 정인은 다시 환유의 편지를 받았다.
어느 새 정인은 하루하루 횐유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정인에게 너무나 자연그러운 일이었다.
정인에게는 죽음이란 경계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환유의 편지는,
잠시 멀리 떨어져 있는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와 다를 봐 없는 것이었다.
세번째 편지를 받은 건 크리스마스가 이틀 지난 뒤였다.
하지만 그건 크리스마스에 받아 보도록 쓰어진 편지였다.
세번째 편지에서도 환유는 정인에 대한 걱정을 했다.
정인은 그것이 환유의 마지막 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편지에는 환유가 편지를 쓰며 힘들어 한 흔적이 역력했다.
아마도 손의 기력이 받쳐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환유의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 만큼 비틀거렸다.
짧은 한 장의 편지 안에서도 밑으로 내려갈 수록 글씨는 점점 더 비틀어져 있었다.
환유는 사력을 다해 그 편지를 썼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정인의 예상은 빗나갔다.
새해가 되면서 다시 편지가 날아왔다.
사랑하는 당신.
하루하루 내 몸에서 기운이 빠질수록 더욱 더 당신이 그리워지니 이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당신을 떠나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난 당신 품에 안겨 있고만 싶으니.....,
의연할 줄 알았는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울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자꾸만 밀려드는 두려움은 어쩔 수가 없어.
난, 내가 나를 볼 수 있는 그 모든 걸 거부하고 있는 거야.
머리를 쓸어 올릴 때마다 손에 잔뜩 묻어나오는 머리칼을 보면,
난 그것이 마치 죽어가는 내 몸의 세포들처럼 여겨져.
휴지통에 처박히는 머리칼과 함께 내 몸 속의 생명이 한 움큼씩 한 움큼씩 빠져나가고 있는 거야.
미안해, 당신.
당신도 많이 힘들텐데.
이렇게 우울한 얘길 해서 미안해.
좋은 일만 생각하고 싶은데,
아름답던 시절만 생각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당신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와.
당신과 함께 한 날들을 생각하면 즐겁기 보단,
이제 다시는 그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거야.
그래도 희망은 버리지 않으려고 해.
당신 말처럼.
당신이 그랬지.
당신이 논문 준비를 계속 하겠다고 나한테 약속한 것처럼,
나도 끝까지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 달라고,
그 약속을 지키고 싶어.
당신이 나와 한 약속을 지켜 열심히 논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나도 굳세게 이 시련을 견뎌내며 가물거리는 생명의 불씨를 되살려내고 싶어.
아냐,
이게 아닌데.
당신이 읽을 이 편지가 이렇게 우울하거나 비장한 것이어서는 안되는데....,
보고싶은 당신!
지금쯤은 당신도 이 편지에 꽤나 익숙해져 있겠지?
아마도 네번째 편지쯤 될 테니까.
내 생각대로라면 새해 첫날 아니면 두 번째 날에 이 편지를 받았을 거야.
당신과 내가 헤어진지도 이미 여러 달이 지났을 테고,
어쩌면 지금 당신은 아주 여유로운 기분으로 이 편지를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러길 바래.
아직까지도 당신이 슬픔에 젖어 있다면, 내 마음이 편치 못할 거야.
내가 쓰는 이 글이,
그리고 또 앞으로 쓰게 될 글이 당신에겐 언제나 '즐거운 편지'로만 읽히길 바래.
새해를 맞아 당신은 무엇을 소망하고 있을까?
어서 빨리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지?
하지만 너무 조급해하지마.
세상 일이 어디 마음대로 될까마는 당신 그동안 잘 해 왔잖아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만 한다면 당신이 바라는 걸 다 이룰 수 있을 거야.
인내하며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해.
당신, 아직 관사에 살고 있어?
어쩜 당신이 그러고 있을 것만 같아.
설날이라고 다들 때때옷 입고 이집 저집 오가는데,
당신 혼자 그 조용한 집에 틀어박혀 궁상떨고 있는 거는 아닌지...,
그러지 마.
혹 아직 거기 살고 있다면 시간 내서 방 도배를 해 보는 건 어떨까?
신혼 여행 갔다 와서 당신하고 내가 한 그대로지 아직?
기분 전환도 할 겸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혼자서 못 한다구?
그래, 당신 혼자서 하긴 힘들지.
병일 아저씨에게 부탁드려 봐.
혼쾌히 도와주실 거야.
추운 겨울이니까 따뜻한 색의 벽지를 바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엷은 분홍이나 갈색 계통은 어떨까 싶어?
아무튼, 당신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인천 누님을 한 번 찾아가 뵙는 것도 좋을 거야.
외롭게 살아오신 분인데 당신이 내 몫까지 사랑해 드렸으면 해.
너무 좋은 우리 매형께도 꼭 사랑한다는 말 전해 주고.
장모님, 장인 어른, 많이 상심해 하셨지?
아마 그 이상으로 노여워하시기도 했을 거야.
꼭 용서를 빌고 싶었는데,
두 분이 당신과 날 용서하시게 할 자신이 있었는데....,
제대로 한번 찾아 뵙지도 못하고 말았으니 어쩌면 좋아,
나 대신 용서를 빌어 줘.
벌써 당신 올 시간이 됐었네.
오전엔 누워 있느라 얼마 전에야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거든,
편지 쓰는 것도 점점 힘이 들어.
저 문을 들어서는 당신 얼굴이 밝고 환하면 좋겠어.
다음에 또 쓸게.
그럼, 안녕.
새해 연휴 마지막 날,
정인은 인천으로 갔다.
정인이 그때 처음으로 편지 얘기를 했다.
얘기를 하며 정인은 어쩌면 환유 누나가 편지의 발신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혹은 매형일지도 몰랐다.
누나는 무척 놀라워 했다.
환유가 엉뚱한 구석이 좀 있기는 했지만 편지 얘기는 믿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죽고 난 뒤까지 사람을 울리는 녀석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매형은 정인더러 부럽다는 말부터 했다.
"처남댁, 정말 부럽습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남편한테서까지 그런 사랑을 받다니요.
죽은 우리 처남도 참 대단하지만, 그런 처남의 사랑을 차지한 처남댁은 더 대단해요."
"맞아, 올케.
올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야.
그걸 알아야 해."
누나가 맞장구를 쳤다.
2월에 정인은 서울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짐은 그대로 관사에 둔 채로었다.
아버지는 새해 들어 다시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
7년 전, 송천으로 내려가며 자신과 가족에게 약속했던 기간보다 2년이 더 지난 뒤였다.
정인은 관사에 있는 것이 점점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환유가 없는 지금 정인이 관사에서 계속 살 명분이 없었다.
물론 그 동안은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고,
환유의 편지를 받아 보기 시작하면서는 억지로나마 남아 있을 이유가 생긴 셈이었다.
그러나 환유의 편지가 언제까지 계속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목원에는 병일도 있어 정인에게 오는 환유의 편지를 소흘히 할 리는 없었다.
단지 처음엔 그런저런 생각을 차분히 하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정인에게 편지를 어디서 받아 보느냐 하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환유의 편지를 누가 대신해서 보내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정인이 어디에 있든 환유는 편지를 보내 올 것이었고,
그 편지 속에서 환유는 여전히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 있을 것이었다.
몸이 아프기도 했다.
환유의 편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쌓였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환유가 먹지 못하는 만큼 정인도 먹지 못했고,
환유가 고통스러워하는 만큼 정인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환유를 간병하면서 논문 준비를 같이 했던 것이 결정적으로 몸을 해쳤다.
휴식이 필요한 때였다. (p218)
※ 이 글은 <편지>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권형술-편지
바다출판사 - 1997.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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