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 - 자객열전」
동서고금에 간약무도했던 인간이 어디 한두 명이라.
하동 河東 진갈성 秦鞨省 북문 부근에 도위 都尉 직급의 마현 馬懸이라는 자가 살았는대,
어제까지만 해도 호리병을 들고 벗을 찾아가,
세상 풍진것을 한탄하며 어려운 일을 부탁하고,
함께 밤을 세워 서로 술잔을 권하더니,
오늘 갑자기 그 형편이 달라지자 정답던 그 벗을 모함하여 참수토록 만드는구나.
아예 인간으로 취급치 아니하여 더 이상 부연치 않거니와,
만약 앞으로도 그런 인간이 다시 나타난다면 반드시 큰 재앙을 면하기 어렵도다.
그 아비가 요행히 그 재앙을 피한다 하더라도 그 자식이 대신하여 그 재앙을 받게 되리라.
후세인은 부디 명심하여 신의를 바로 하고 함부로 남의 목숨을 해하지 말라.
한 세상 사는 것도 뜬구름 같은 일, 욕되게 살아 무엇을 하랴.
담 譚의 아비가
그 어미와 함께 나졸들에게 끌려갔다는 말을 듣고 유노인이 지은 시 한 수였다.
그늘에 묻혀 있는 죽마고우가 딱해서 도위 벼슬에라도 앉도록 만들어 준 것이 누구인가.
제가 이제 와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본디 선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어서 누구나 차별없이 도와주었음이 흠이로구나.
도둑을 지키라고 쥐어 준 칼로 돌아서서 주인의 목을 치다니
노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했다.
담은 다행히 하인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급한 형국을 벗어나 유노인의 움막까지 도망쳐 올 수 있었다.
유노인은 수년간 화공 畵工으로 일해 왔었다.
남들은 모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담의 아비만은 그 붓의 신묘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역작을 하나씩 만들어 낼 때마다 그것을 주저없이 비싼 값으로 사들이곤 했었다.
신품 神品이구나.
그대는 하동 제일의 화공이로다.
담의 아비는 언제나 그를 격찬했었다.
그러나 그 무엇이 그의 손을 시기했을까.
그만 그는 문둥병으로 붓을 꺾고 말았었다.
그리고 수 년을 이리저리 떠돌다가 다시 노년에야 진갈성으로 돌아왔었다.
지금은 갈대 무성한 정심리 淨深里 산비탈 아래 움막 하나를 지어 놓고,
역시 문둥이가 된 그의 늙은 아내와 살고 있는데
슬하엔 자식도 하나 없고 부근엔 친척도 하나 없는 아주 외로운 처지였다.
문둥병으로 다 뭉그러져 버린 조막손으로 그는 다시 화필을 잡아 보려고 안간힘 중이었다.
비록 조막손이기는 하지마는 그 조막손 사이에다 붓을 끼우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난초 한 수라도 쳐 놓으면 역시 그것은 범인의 그것과는 차이가 두드러졌다.
여전히 신품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부친께서 참수를 당하셨다는 소식입네다.
이제 정말로 누가 신선의 경지에 달한 손놀림을 펴 보인다 해도
하동에서는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소이다."
담의 아비가 참수를 당해 그 목이 북문 앞에 높이 걸리던 날,
담의 어미도 옥중에서 혀를 물고 자결했다.
유노인은 사흘 낮 사흘 밤을 꼬박 식음을 전폐한 채 하염없이 울었다.
담은 왼쪽 새끼손가락 하나를 잘라 땅에 묻고
북문을 향해 크게 세 번 절한 뒤 기필코 이 원수를 갚으리라 맹세했다.
그러나 우선 성문을 빠져 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유노인은 가끔 저자 거리로 나가 소문들을 챙겨가지고 돌아오곤 했었는데,
곳곳에 그를 잡아들이라는 방이 나붙고 나졸들의 경계 또한 삼엄하기 그지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하동 땅에는 바야흐로 새로운 세력이 태동해서 붓이 쓰러지기 시작하고
검이 일어서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진갈성 구석 구석마다 칼과 창이 살벌하게 번뜩이고,
시들고 기를 못펴는 양반 일족들의 변화 급전함이 예전에 비길 바가 아니라는 소문이었다.
유노인은 집도 언제 나졸들이 밀어닥칠지 알 수 없었다.
담은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붙잡히면 끝장이었다.
큰 뜻을 천하에 펴보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그리 억울하지 않으나,
부모님의 원수를 지척에 두고 개죽음을 당하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다.
우선 살고 봐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마땅한 방도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모든 나졸들이 공자를 찾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았소이다.
아무래도 내일 쯤은 여기까지 밀어닥칠런지도 모릅지요.
무슨 방도를 생각해 봅시다."
저자 거리를 한 바퀴 돌고 온 어느 날 저녁 무렵, 유노인은 불안한 낯빛으로 담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을 잃고 묵묵히 한 시간여를 앉아 있었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임자, 찹쌀 좀 있나."
갑자기 유노인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부엌을 향해 소리질렀다.
"있지요.
지난번 방앗간에서 동냥해 온 건데 반 됫박이나 될까 말까."
밥을 하던 그의 늙은 아내가 대답했다.
"충분하구만. 따로 찹쌀밥 한 그릇만 지으시오."
"그러구랴."
그리고 저녁상을 물리자 마자 유노인은 찹쌀밥을 멧밥과 섞어 오래도록 공이로 찧어대기 시작했다.
"제대로 될는지......"
그는 그 밥 속에다 도화물감을 조금씩 뿌려 넣으며 혼잣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가물거리는 등잔불이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유노인은 이따금 찧은 밥을 경단알처럼 손바닥에 굴려보기도 하고
자기의 늙은 아내 얼굴에 갖다 대보기도 하면서 물감을 좀더 섞어 보는 등,
무엇인가를 조절하고 있는 눈치였다.
시간이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제대로 될런지......"
그는 다시 한번 혼잣소리로 낮게 중얼거리고는 자기의 늙은 아내에게 물을 떠 오게 하고
그 물에다 일단 문둥병으로 문질러진 조막손을 씼었다.
"좋소이다. 어쩌면 제대로 될 것도 같소이다.
자, 이리로 얼굴을 갖다 대 보시오. 좀 거북하더라도 참으셔야 합네다.
우선은 목숨을 부지하고 봐야지요."
그는 담에게 말했다.
그리고 물들인 밥을 조금씩 떼어 담의 얼굴에다 갖다 붙이기 시작했다.
깊이 가라앉았던 시간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봐 저봐, 잠들어 있던 실내의 모든 사물들이 너도 나도 눈을 뜨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유노인은 온 신경을 그 일에다 집중해 놓고 있는 것 같았다.
차츰 그의 눈이 광채를 더해 가기 시작했다.
이제 움막 속의 모든 사물들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숨을 죽이고 그 광경만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엄숙한 분위기였다.
그 작업은 유노인 일생일대의 승부를 건 작업 같았다.
동작 하나하나가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더러는 몇 가지의 자잘한 도구들이 담의 얼굴을 옮겨 다니기도 했고,
또 더러는 조금씩 물을 찍어 바르거나 하기도 했는데
그러는 동안 말을 입 밖에 꺼내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 시간이 무겁게 죽어 나갔다.
"됐소이다.
다소 불편하시겠지만 얼굴 근육을 움직이거나 손을 대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이윽고 유노인은 손을 놓았다.
탈진한 듯한 모습이었다.
"영락없오.
이제 성문을 빠져나가는 것은 시간 문제요. 햘햘햘"
유노인은 아내가 노파 특유의 허기진 웃음을 웃으며 쉰 목청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담의 앞에다 거울을 갖다 비춰 주었다.
아!
이럴 수가 있을까.
거울을 보는 순간, 담은 숨이 컥 막혀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놀랍게도 거울 속에는 또 하나의 문둥이로 변해 버린 담의 얼굴이
흉직한 모습으로 들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누가 보아도 외면해 버리지 않을 수 없는, 아주 흉칙하고도 흉직한 얼굴이었다.
하동 제일의 화공이었던 유노인은
마침내 그 손의 신묘함을 이용하여 또 다른 한 생명을 탄생케 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 할멈의 옷을 갈아 입으시오.
겉에다 누더기도 한 겹 뒤집어 쓰는 것이 좋겠소이다.
손은 변장을 시키지 않았으니까 절대로 누더기 밖으로 내보여서는 안됩니다."
담과 유노인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서둘러 움막 밖으로 기어 나왔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성문을 닫을 시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유노인의 늙은 아내의 전송을 받으면서 북문을 향해 어둠 속을 걸어 나갔다.
보아라.
나는 반드시 네놈의 목슴을 내 손으로 절하고야 말리라.
담은 잠결에도 몇번이나 어금니를 악물어 왔다.
첩첩산중으로 도망쳐와 토굴 하나를 파놓고
가슴 복판에 대못이 박히는 듯한 아픔을 참으며 살아온 지 일 년여.
이제 그에게는 오직 복수의 일념 하나뿐이었다.
이미 그는 높은 학문과 고결한 성품을 가진 선비의 모습이 아니었다.
초근목피로 주린 배를 달래며 날마다 비수를 던지는 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봉두난발 그대로 검귀 劍鬼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검귀와 같다고 해서 그의 칼솜씨까지 검귀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던지는 비수는 이제 겨우 몸을 가누어 표적에 날이 바로 날아가 박힐 정도였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한해서였다.
조금만 거리를 멀리해도 표적은 빗나가 버리거나 거꾸로 날아가 튕겨졌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장족의 발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처음엔 백 번을 던지면 백 번이 모두 비수가 제멋대로 놀아났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꽂혀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평소 호신용으로 몸에 지니고 다니던 비수였다.
부러지거나 잃어버리면 큰일이었다.
무기라곤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비수를 던질 때면 언제든지 그 비수가 부러지는 것을 염려해서
표적이 되는 나무둥치 부근의 돌들을 모두 치우고 건초들을 한 겹씩 마닥에 다 깔아 놓곤 했었다.
칼솜씨는 좀처럼 늘지 않았었다.
차라리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 많은 낮과 밤을 책을 위해 바치느니 강가에 나가 돌팔매질이라도 익혀 둘 것을.
담은 비참함까지 느끼곤 했었다.
그러나 칼솜씨는 좀 둔하다 하더라도 체력만은 상당히 단련되어져 있었다.
나무타기, 절벽 기어오르기, 바위 들기, 비탈 치달아 오르기 따위를 밤낮없이 쉬지 않고 행해 왔다.
산에 들어오자마자 그가 가장 곤란을 느꼈던 문제는 바로 먹이에 대한 문제였다.
그는 무턱대고 아무것이나 일단 먹어 보고 나서 멋대로 먹이다 아니다를 결정했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버섯을 잘못 먹어 나흘 동안이나 사경을 해맸던 적도 있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그는 차츰 토굴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덫을 만드는 지혜를 갖게 되었고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의 외형적 공통성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섬유질 같이 결이 곱게 찢어지는 버섯은 먹을 수 있는 버섯이고
색깔이 화려하고 무늬가 요란한 버섯은 먹을 수 없는 버섯이다 따위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먹이에 대한 걱정을 덜게 되자 자연히 많은 시간이 절약되고
그만큼 복수를 위한 준비 작업에 더 많이 열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이 정도로는 언제 원수를 갚게될지 까마득하기만 했다.
산 속에는 다시 여름이 당도해 있었다.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산 전체가 빗소리에 젖어 있었다.
모든 것이 빗소리에 침잠해서 어디론가 떠내려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거적문을 걷어 올린 토굴 밖은 온통 물안개 투성이었다.
담은 토굴 안에 앉아서 칼던지기에 열중해 있는 중이었다.
앞으로 한번만 더 던지면 이백 번을 채우게 되는 셈이었다.
오늘은 전혀 실수가 없는 날이었다.
내일부터는 거리를 좀 멀리해서 연습을 시작해 볼 심산이었다.
그는 이제 겨우 칼의 성질을 어슴푸레하게 알 것 같았다.
무엇이다라는 딱 꼬집어서 말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자신의 호흡이 칼에 닿아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천천히 팔을 허공으로 쳐들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호흡을 끊으면서 날렵하게 팔을 한 번 움직였다.
반짝!
물고기의 비늘처럼 칼은 흐린 날에도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고 바람을 가르며 나무토막에 날아가 꽂히더니 꼬리를 파르르 떨면서 낮게 울었다.
담의 경험에 의하여 알아낸 사실을 따르자면, 칼이란 힘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육감에 의해서 조종되어지는 한 생명체였다.
믿지 않을런지도 모르지만 칼에게도 감정이 있었다.
감정과 감정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한 칼은 제대로 꽂혀주지 않았다.
칼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 주인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 상태였다.
만약 그 상태에서 칼을 던지면 백이면 백이 모두 튕겨져 나오곤 했다.
따라서 그 주인은 될 수 있는 한 이번에도 칼이 보기 좋게 꽂혀 주리라 믿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신통일이라는 것이었다.
칼을 쥐고 있으면서 칼 밖의 것을 생각하면 그것 또한 실패의 원인이었다.
담은 그 이백 번째의 칼을 꽂아 놓고 물끄러미 토굴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뽀얀 물안개 속에서 문득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 젖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서 곧 생각을 떨쳐 버렸다.
무릇 살아 있는 인간이란 유노인 내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에겐 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산 속에서 혼자 고통스럽게 사는 동안 그가 배운 것은 오직 증오심 한 가지 뿐이었다.
만약 원수를 갚고 나서 무사히 탈출할 수만 있다면 다시 이 토굴 속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비록 이 토굴에서의 생활이 불편하기는 하지마는
인간들이 얼마나 무서운 음모와 암투와 배반을 거듭하며 살아왔던가를 생각하면
또다시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 1 -
※ 이 글은 < 자객열전>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이외수 - 자객열전
나남 - 1983. 03. 25.
[t-07.06.14. 20210728-062311]
'작가책방(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객열전 - 3 (0) | 2007.06.21 |
---|---|
자객열전 - 2 (0) | 2007.06.19 |
방황(彷徨) - 1. 고독한 사람 - (0) | 2007.06.03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0) | 2007.05.27 |
25-26. 생텍쥐페리 - 어린왕자 (0) | 2007.05.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