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Zeit zu leben und Zeit zu sterben)」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 독일과 러시아의 전선, 독일군은 서서히 다가오는 패전의 그림자를 느낀다. 병장 에른스트 그래버는 2년
만에 휴가를 받아 고향에 돌아오지만, 집은 공습을 받아 폐허로 변해 버렸고 부모님의 생사도 알 길이 없다. 산산이 부서지고 파괴된
거리, 그나마 온전한 문짝에 붙어 있는, 가족을 애타게 찾는 쪽지들. 그리고 불안한 눈빛으로 ‘조심’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는
사람들. 평안한 휴가를 꿈꾸던 그래버에게 이런 고향의 모습은 전장보다 더 낯설게 느껴질 뿐이다.
그래버는 부모님의 소식을 찾아 헤매다 동창생이었던 엘리자베스를 만난다. 그녀의 아버지는 독일의 승리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단 수용소에 끌려가 있다.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도시에 홀로 남겨진 두 젊은이는 서로를 의지하며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기에
이른다. 3주간의 짧은 휴가가 끝나고 그래버는 사랑하는 아내를 남겨 둔 채 다시 최전방으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돌아간다.
전선은 떠날 때보다 훨씬 불리해졌고 이어지는 공격에 동료들은 하나둘 죽어 간다. 어느 날 그래버에게 러시아인 포로들을 감시하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다시 러시아군의 맹공격이 시작되자 친위대 병사가 포로들을 사살하려 하고, 그래버는 급박한 상황에서 최후의 결단을 내린다.
“둘 중 하나는 놈들을 처치해야 돼.
끌고 갈 수는 없어. 물렁한 생각은 버려. 어서, 나도 도울 테니.”
“안 돼, 쏘지 마.” 그래버가 말했다.
“안 된다고?” 슈타인브레너가 눈을 치켜뜨며 쳐다보았다.
“안 된다고?” 그가 천천히 반복했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기는 아는 건가?”
“알아. 알고말고.”
“그래, 안다고? 그렇다면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슈타인브레너의 얼굴이 돌변했다.
그가 권총을 잡는 순간, 그래버가 총을 뽑아 그를 쏘았다.
슈타인브레너는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그는 아이처럼 한숨을 쉬었고, 그의 손에서 권총이 떨어져 나갔다.
그래버는 그의 몸뚱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포탄이 정원 위로 울부짖으면서 통과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창고로 걸어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활짝 열었다.
“가라.” 그래버가 말했다.
러시아인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총을 던져 버렸다.
“가, 어서 가란 말이야.”
그가 다급하게 말하면서 자신의 빈손을 보여 주었다.
젊은 러시아인이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밖으로 내디뎠다.
그래버는 등을 돌려 슈타인브레너가 누워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살인자.”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슈타인브레너를 들여다보았지만 아무 느낌도 없었다.
“살인자.”
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것은 슈타인브레너와 자기 자신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절규였다.
그러고 나자 갑자기 여러 생각들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돌멩이 하나가 굴러 나간 것 같았다.
무엇인가가 영원히 결정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런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붙들어야 할 것 같았다.
머릿속이 휘청거렸다.
그는 가로수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었다.
무엇인가 너무도 중대한 일을 단행해야 하지만 아직 할 수 없었다.
아직, 그것은 여전히 너무 멀리 있고 너무 새롭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분명했다.
그는 러시아인들을 보았다.
그들은 허리를 구부리고 여자를 앞세운 채 한 덩어리가 되어 달아나고 있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그를 발견했다.
남자의 손에는 뜻밖에도 총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총을 들어 겨누었다.
그래버는 총구의 검은 구멍을 보았다.
구멍은 점점 커졌다.
그는 큰 소리로 부르고 싶었다.
큰 소리로 급히 소리를 질러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버는 총격을 느끼지 못했다.
갑자기 눈앞에 풀이 보였다.
밟혀서 반쯤 짓이겨진, 불그레한 꽃망울과 이파리가 달린 식물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그 풀은 점점 더 커졌다.
이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풀은 흔들거렸고,
수그러지는 그의 머리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지평선을 배경으로 소리도 없이 홀로 서 있었다.
물론 작디작은 질서에서 오는 위안과 그 모든 평화도 함께했다.
풀이 점점 더 커져 마침내 하늘 전체를 가렸다.
그리고 그의 눈이 감겼다. (p535)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에서
[t-07.05.27. 20210513-18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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