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서재
신경숙
20대 때 여름이면 가방에 가득 시집과 소설책을 담아 시골집으로 내려가곤 했었습니다. 책 읽는 일이 내겐 여름휴가였습니다. 어느새 다 읽어버리곤 해서 나중엔 노트에 옮겨보곤 했죠. 시골이었으므로, 지금처럼 인터넷 서점이 있던 때도 아니었으므로, 책을 구하려면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나간 뒤 다시 도시로 나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했던 번거로움 때문에 한 일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일은 없나봅니다.
최근에 읽은 책들 중 이 여름에 읽으면 좋겠다 싶은 책 몇 권 골랐습니다.
"소설의 완성은 독자의 몫입니다. 소설의 마침표는 작가가 찍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독자의 마음에 어떤 무늬를 그리면서 찍혀진다고 생각합니다." 채널예스 2009-03-31
"책을 많이 읽게 되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남하고 비교하지 않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결핍, 금지, 부조화 등과 맞물려 있다. 그런 사람들과 부딪히다 보면 내가 정말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고 든든해진다. 혼자 있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된다."
오마이뉴스 2009-05-15
스콧 니어링 자서전 - 스콧 니어링 저/김라합 역
죽음까지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었던 한 실천적 진보주의자의 경건하고 검소한 삶이 펼쳐집니다. “한 근본주의자의 위대한 생애”라는 이 책의 소개말에 동의합니다. 스콧 니어링이 살았던 100년은 진정으로 의미 있고 충만한 인간적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인류가 아름다운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지구상에 그와 같은 삶을 완성시키고 간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에 존경을 느꼈습니다.
고독의 발명 - 폴 오스터 저/황보석 역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사가 직선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작가 폴 오스터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정보를 먼저 가지고 있다면 독서하기가 수월할 것입니다. 사라져가는 기억을 추적해가는 글 쓰는 자의 안타까움과 에너지가 충돌하여 조각조각 부서집니다. 한편의 부조리극이 연출되는 연극무대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어요. 그러다가 저 밑에 숨어 있는 깊은 상처 앞에서 서늘해지지요. 얼음구덩이 속에 파묻힌 아버지의 얼굴과 마주치듯 우리도 우리의 깊은 곳에 잠겨 있는 상처의 얼굴들과 만나게 되지요. 아버지가 왜 사랑을 잘 베풀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는지 알아가는 일은 고독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건 나를 알아가는 일이며 인간을 알아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 - 크리스토프 바타유 저/김화영 옮김
오래 전부터 책장에 꽂혀 있었던 걸 이제야 읽었습니다. 원제는 안남(安南)입니다. 어린 베트남 황제 칸과 번역자의 표현에 따르면 죽음의 의미를 찾아내려는 듯한 일단의 프랑스인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의 이야기. 내가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지를 모를 정도의 정갈한 고독의 세계로 끌려들어갈 것입니다. 기이한 것은 그 속에서 인간의 아름다움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을 쓰던 때의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나이가 스물 한 살이었다고 하여 책장을 덮으며 나의 스물한 살을 잠깐 생각해봤습니다.
죽음의 지대 - 라인홀트 메스너 저/김영도 역
이 책이 필요한 어떤 분이 책이 절판되어 구할 수 없다 하여 그분께 전해드리려고 챙기다가 다시 읽었습니다.
남한산성 - 김훈 저
김훈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독자들에게 포괄적으로 읽힌다는 것은 매우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훈의 문장이 독자들에게 별 거부감 없이 읽힌다면 이제 소설 읽기에 대해 독자들을 탓할 수 없게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김훈의 문장들을 소화시킬 수 있는 내성을 가진 독자들이 그토록 많이 존재한다면 우리 소설이 읽히지 않는다 할 때 책임이 작가에게 있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습니다.
감기 - 윤성희 저
감기에는 11편의 단편들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대부분 해결되지 않을 난제를 앞에 놓고 있는 가난하고 외로운 인간들입니다. 하지만 칙칙하지도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아요. 하소연을 늘어놓지도 튀어보겠다고 나서지도 않아요. 무덤덤한 것 같은데 가만 보면 위트와 재치가 넘쳐 흘러서 어느덧 웃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길 한번 주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 제 식대로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 은근히 안심도 됩니다. 상상이나 하고 말 것 같은 엉뚱하고 장난 같기도 한 일들을 윤성희의 주인공들은 간단하게 슬쩍 해냅니다. 그 순간을 목도할 때 무척 유쾌하지요.
언젠가 너도 - 앨리슨 맥기 글/피터 레이놀즈 그림/김경연 역
읽는 데 일 분이면 충분합니다. 일 분 후 마음이 쩡하니 갈라지는 듯한 여운과 만날 겁니다. 그 여운이 몇 주일이 흐른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토록 짧은 글이 생을 확 뚫고 지나갑니다. 곁에 두고 싶었으나 그림과 글을 찬찬히 다시 본 뒤 그날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던 어린 딸을 가진 엄마에게 건넸습니다. 그 엄마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일 분 후에 가만히 책을 가슴에 갖다 대더군요.
바리데기 - 황석영 저
황석영의 최근작입니다. 문장보다는 구성이 중요하다고 강변하셔서 문장에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으셨나? 했더니 아닙니다. 『바리데기』의 문장은 담백하고 쉽고 진취적으로 바리를 끌고 나갑니다. 이 지구상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과 대면한다고 보면 맞는 바리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그동안 어둡고 칙칙하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정당한 것을 외면해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인생이 이토록 험난하다면 어떻게 살아가나 바리를 염려하면서도 만약 바리가 생명수를 구해왔다면 실망했을 겁니다. 구해오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외면해왔던 많은 것들이 생명수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연을 쫓는 아이 - 할레드 호세이니 저/이미선 역
저자 칼레드 호세이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해서 이 소설을 영어로 썼습니다. 샨사가 중국에서 태어나 불란서로 이주해 그곳에서 불어로 소설을 쓴 경우와 흡사합니다. 우리 작가 중에서도 그런 작가가 나왔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주인공 아미르가 어른이 되면서 겪는 인생을 향한 도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빛의 제국 - 김영하 저
출간될 때 읽었던 것을 읽을 일이 있어 다시 읽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귀환 명령을 받은 남파 간첩 가족의 하루가 시간 단위로 쪼개져 펼쳐집니다. 구성이 절묘합니다. 스파이의 하루가 우리의 일상과 너무 닮아서 잠시 저이도 혹 스파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정해서도 따뜻해서도 안 된다고 굳게 다짐한 이처럼 그가 구사하는 문장은 대상과 거리가 뚜렷하고 사막을 껴안은 듯 건조합니다. 책장을 덮을 때쯤에야 이 작품의 주인공이 스파이가 아니라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우리의 오늘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어떤 소재든 이처럼 자유자재로 소화할 수 있는 작가는 드뭅니다.
신경숙 (1963 ~ )
1963년 1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야 겨우 전기가 들어올 정도의 시골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열다섯 살에 서울로 올라와 구로공단 근처에서 전기회사에 다니며 서른 일곱 가구가 다닥다닥 붙어 사는 '닭장집'에서 큰오빠, 작은오빠, 외사촌누이와 함께 한 방에서 살았다. 공장에 다니며 영등포여고 산업체 특별학급에 다니다 최홍이 선생님을 만나 문학 수업을 시작하게 된다. 컨베이어벨트 아래 소설을 펼쳐 놓고 보면서, 좋아하는 작품들을 첫 장부터 끝장까지 모조리 베껴 쓰는 것이 그 수업 방식이었다. 그 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1985년 『문예중앙』에 중편소설 「겨울우화」로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였다.
2007년 겨울부터 2008년 여름까지 「창작과비평」에 연재되어 뜨거운 호응을 얻은 『엄마를 부탁해』는 섬세하고 깊은 성찰, 따뜻한 시선의 작가의 절정의 기량으로 풀어낸 엄마 이야기이자 엄마를 통해서 생각하는 가족 이야기이다. 늘 곁에서 보살펴주고 무한정한 사랑을 주기만 하던, 그래서 당연히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 엄마가 어느날 실종됨으로써 시작하는 이 소설은, 가족들 각자가 간직한, 그러나 서로가 잘 모르거나 무심코 무시했던 엄마의 인생과 가족들의 내면을 절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2011년 'Please Look After Mom'라는 제목의 영문판이 제작되어 출간 전부터 호평을 받고 있으며, 미국 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22여 개국에 판권이 판매되었다
이외의 작품으로 소설집 『강물이 될 때까지』, 『감자 먹는 사람들』, 『오래 전 집을 떠날 때』, 『딸기밭』, 『종소리』, 장편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짧은 소설집 『J이야기』,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 『자거라, 내 슬픔아』, 『산이 있는 집 우물이 있는 집』 등이 있다.
출처 - 매거진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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