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 1998. 11. 02」
도록 한 권의 행복
이 난국,
당혹스런 때에 「비우는 행복」이란 이름으로 전시회를 가졌다.
혼자 무슨 신선놀음이냐 싶어 송구함이 없지 않았지만 고통 없는 삶이 없듯,
아픔 없는 그림 또한 싱거운 것이 아닐까.
관람객 중엔 학구파 미술가 지망생들이 있는가 하면,
동창회를 전시 구경으로 연결한 멋쟁이 아줌마들도 있었다.
다 내겐 귀중했지만
조금은 피곤한 듯한 표정에 서류봉투를 들고 왔던 샐러리맨 관람자 모습은 아직 눈에 삼삼하다.
수줍게 전시장에 들어와서 그림 하나 하나를 찬찬히 보고,
때로는 차렷 자세로 작품을 관람한 후
얄팍한 지갑을 꺼내 전시 도록을 사간 그의 뒷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아마도 그에게는 쓸 데 없는 짓 하고 다닌다고 나무라기보다는
남편과 같은 마음으로 도록을 한 장씩 넘기면서
남편의 감상 소감을 찬찬히 들어주는 아내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감히 내 그림들이(비싼 도록 값 이상의) 행복을 주었기 바랐다.
그림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
전에 보지 못하던 이미지들,
새로운 형태-색의 조화, 잊고 있던 것들의 향수 등.
그림이 이렇게 열린 관객에게도 공감을 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특별 계층의 허영심을 채우는 고루한 장난질일 뿐일 것이다.
전시를 치르며 나는 우리가 문화를 사랑하는 순수한 민족임을 확인한다.
단지 이런 순수함들이,
서양 현대가 양산하는 어울리지 않는 조류들과
그의 무분별한 도입-모방의 거센 물결 속에 그냥 주눅 들어 뒷전으로 물러서는 비극이 없기를....
글 - 김원숙 (서양화가) https://www.art500.or.kr/kimwonsook.do?pageNumber=1
출처 - 조선일보 1998년 11월 2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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