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리 월터스 - 「아름답게 사는 기술」
교수대 위에서의 죽음
1945년 4월 9일에 있었던 디트리히 본회퍼의 사형 집행을 목격한 군의관은
자신이 지켜본 그 당시의 장면을 결코 잊지 못했다.
당일 아침, 전원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한 죄로 복역 중이던 본회퍼와 5명의 동료 수인들은
플로센부르크 포로 수용소 독방에서 끌려나왔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자신들이 국가 반역죄로 몇 시간 내에 교수형에 처해지리라는 짤막한 통보를 전해 받았다.
얼마 후 그들은 옷이 벗겨진 채 알몸으로 처형 장소로 인도되었다.
올가미가 그의 목에 걸쳐질 때 본회퍼는 고요해 보였다.
군의관은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이 사랑스러운 남자의 기도하는 모습에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매우 경건해 보였고,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라는 확신으로 가득 차 보였다.
…… 그는 용감하고 차분하게 교수대 발판을 딛고 올라갔다.
…… 나는 일찍이 그렇게 온전히 하느님 뜻에 자신을 내맡기며 죽어 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죽음의 순간에 드러난 본회퍼의 의연함은 평생토록 그가 짊어져 온 노고의 산물이었다.
용기의 덕.
용기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곧 신체적 상해나 죽음을 무릅쓰고 발휘되는 신체적 용기,
비주류의 사상들을 수호하거나 권위에 도전하는 도덕적 용기,
그리고 무의미함이나 두려움의 감정을 딛고 일어서는 영적 용기 등이 있다.
이들 모두를 용기라는 개념으로 포괄하는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신학자 폴 틸리히는 그의 저명한 저술에서 용기란,
-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든 간에,
우리에게 가해지는 허무나 '비존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는 것이라 밝혔다. -
대게 우리는 용기를 일컬어 어떤 가시적으로 규정된 상황에 대한 특정한 반응으로,
예를 들어 전쟁터에서의 용맹 내지는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는 용감함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틸리히의 지견에 따르면, 용기는 그 외에도 보다 근원적 차원의 것을 내포한다.
용기는 우리의 모든 개별적 결단과 행위에 영향을 끼치는 전반적인 삶의 태도,
곧 우리 실존에 가해지는 일상의 온갖 위협에 맞서 '예!'하고 우리 실존을 긍정하는 태도이다.
이처럼 모든 용감한 행위들의 뿌리가 되는 근원적 긍정을 일컬어 틸리히는 '존재할 용기'라고 불렸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가 연악해서 줄곧 위협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존재를 긍정하고 경축하려는 결단이다.
비겁한 사람은 삶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인정하는 게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러한 현실을 억압하려 든다.
반면에 용기 있는 사람은 자신의 연악함을 껴안고 그것을 자기 존재의 불가피한 요소로 인정할 줄 안다.
우리에게 가해지는 허무의 위협을 회피하는 것은,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지닌 고유한 인간성의 일부를 상실하는 꼴로 이어진다.
생각이 올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과연 그토록 엄청난 대가를 치르러 하겠는가?
허무는 늘 우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면서 가장 깊은 차원에서 불안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우리의 실존 상황이 우리가 믿고 싶은 만큼 그렇게 안전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죽음은 허무가 우리를 위협하는 가장 분명한 방식이자, 분명 우리가 가장 의식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다.
마치 겟세마니 동산에 계신 예수님처럼, 우리는 언젠가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삶이 정지할 테고,
그러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우리 편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심한 공포감에 이은 무력감을 체험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허무가 우리의 영속성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윤리적 결정에 수반된 불확실성이다.
우리는 우리가 내린 선택이 올바른 것이라고 철저히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윤리적 삶은 지속적인 불안감과 심지어 죄책감마저 띠고 있다.
마지막으로 허무가 우리를 위협하는 세 번째 방식은 우리의 개별적 삶과 인간 실존 전반이 부조리하다거나,
결국 백치가 지껄이는 무의미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 이따금씩 불안한 회의감을 품는 것이다.
우리는 공허함에서 빠져나오다가도
이내 다시 공허감으로 빠져들면서 궁여지책으로 공허한 나날을 메워 가려 한다.
그러다가도 사는 게 고작 이런 것인가 하는 허무가 밀려들기 십상이다.
이러한 세 가지 허무 체험은 우리에게 심각한 위협을 가한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안정적이고 영속적이며 안전한 존재로 생각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괜한 걱정은 왜 해?'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며
우리 자신의 필연적으로 죽을 운명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하는가 하면,
윤리 규칙의 공식을 세워 삶의 윤리적 진퇴양난에 대한 손쉽고 편안한 해답을 찾으러 든다.
또는 일상생활의 자잘한 일들에 지나치게 집중함으로써
일상사 배후에 자리 잡은 어떤 전반적인 반복 형태를 바라보는 것조차 회피하는가 하면,
완강히 저항하며 온갖 불안을 막무가내로 몰아내려 한다.
우리 중 어떤 이는 세상 도처의 신체적 위험이나 윤리적 결단에서 오는 책임으로부터
자신을 멀리하는 고립된 이가 되기도 한다.
최종적 필요.
1945년 2월이 되자 불길하게도 그는 부켄발트로 이송되었다.
4월초에는 그와 다섯 명의 다른 국가 반역 정보국 요원들이 플로센부르크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4월 8일에 그곳에 도착하여 다음 날 아침 교수형에 처해졌다.
며칠이 지나 폰 도나니와 본회퍼의 또 다른 매형, 그리고 본회퍼의 형 클라우스도 처형되었다.
본회퍼 가족은 나치 저항에 대해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교수대로 끌러간 본회퍼는
'이제 끝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명의 시작이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고 한다.
처형 뒤에 그의 시신은 매장되었다.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나치 당국으로부터 그의 처형에 대해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전운 속에서 실종되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들이 그의 죽음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은 7월 말이 되어 히틀러가 죽고 제 3제국이 몰락한 후
BBC 방송이 런던에서 열린 그를 위한 추모식에 대해 보도했을 때였다.
용기와 하느님의 이끄시는 손.
삶은 우리에게 기쁨과 동반과 통찰의 경이로운 순간들을 선사하는 선물이다.
하지만 삶은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우리를 인간답게 하고 우리에게 삶의 경이로움을 체험하도록 허용하는 자유가
쉴 새 없이 불안의 원인으로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를 행사할 때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허무에 맞서게 된다.
우리의 선택들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유의 환희는 암울한 현실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우리 삶이 끝날 때 찾아올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우리 대다수에게는 불가피하게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먼 훗날 용기 있게 죽음에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은
(삶과 이별하는 가운데에서도 삶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
평생 헛된 희망에 매달리지 않고 얼마나 용기 있게 허무 체험들에 직면해 왔는가에 달려 있다
허무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 기저에는 불멸의 신적 존재 근거가 놓여 있다고 여긴 본회퍼의 확신이
그의 용기를 지탱했다.
그는 테겔에서 프린츠 알브레히트 슈트라세 교도소로 이송되기 직전에
'나는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을 굳게 확신하기에 그러한 확실한 보루 안에서 항상 지켜지리라 희망한다'고 썼다.
그는 여느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내다보며 두려워했고,
특히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한 뒤로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더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를 지탱해 주었다.
(심지어 교수대에 그의 발을 디딘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그는 평생 동안 용기 있게 삶을 긍정하는데에 길들여져 있었기에,
평정심을 앓지 않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의 용기 있는 삶은 오래 기릴 표양으로 남는다. (p239)
- 디트리히 본회퍼.
※ 이 글은 <아름답게 사는 기술>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케리 월터스 - 아름답게 사는 기술
역자 - 김성웅
생활성서사 - 20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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