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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 월터스-아름답게 사는 기술/순명

by 탄천사랑 2022. 12. 1.

케리 월터스 -  「아름답게 사는 기술

 

 

앨라배마의 피살 사건.
삶의 마지막 몇 초를 남겨 둔 채, 조나단 다니엘스는, 보안관 대리 톰 콜만이
전미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 (SNCC)의 현장 간사인 17세 소녀 루비 살레스를 향해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다.
곧이어 콜만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존(조나단의 애칭)은 루비를 밀쳐 내면서 가슴에 전통으로 총알을 맞아 즉사했다.
그의 시신은 거의 한 시간 동안 거리에 방치되어 있다가 마침내 몽고메리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나중에 루비는 기자들에게 1965년 8월의 어느 뜨거운 여름날 오후에 벌어졌던 사건의 정황을 설명했다.

 

순명의 의미.
그릇된 믿음을 깨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순명의 참된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려면,
순명을 '법 준수'나 '규칙 준수'나 '명령 복종'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순명의 율법주의적 이해 방식을 깨야 한다.
율법주의적 이해 방식에 따르면, 순명적인 사람은 지시를 잘 따르고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 중의 상당수는 순명을 떠올리면 불쾌감을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순명에 대한 유다교-그리스도교적 이해는 상당히 다르다.
구약 성경에서 대개 '순명'으로 번역되는 히브리 말은 문자 그대로 하면 '들음' 또는 '귀 기울림'을 뜻한다.
이와 비슷하게 '순명'애 해당하는 신약 성경의 그리스 말은

각각 '들음'과 '아래'를 뜻하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복합어이다.
이에 따라 순명하는 것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귀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하다'에 해당하는 라틴어 '오베디레(obedire)는 대게 지혜로운 권고에 주의를 모은다는 의미를 지닌다.
성 베네딕토 역시 그러한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면서
자신의 수도 규칙서를 통해 수련자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 순명하라고 가르쳤다.


순명과 관련하여
'이 규칙을 따르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 혹은
'이 법을 어기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하고 묻는 것은 순명의 그릇된 이해방식에서 기인한다.
오히려 '나는 누구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귀담아 듣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하고 묻는 것이 옳은 질문이 될 것이다.

 

내 뒤에서 불어오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되는 바람.
조나단 다니엘스는 성공회 신학교의 어느 신약 교수의 말을 줄곧 마음에 새기며 기억해 왔다.
'부르심이 들려오면 여러분이 하던 일을 접고 가야 합니다.
간혹 부르심은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응답하기 가장 어려운 형편의 때에 찾아옵니다.
하지만 부르심이 찾아오면, 그때가 언제이든 반드시 여러분은 가야 합니다.'


존은 자기 생애 동안 세 번에 걸쳐 부르심을 들었다고 기록했다.
첫 번쨰는 예수 재림 성공회 성당에서였고, 두 번째는 어느 저녁 기도 중에 마니피캇을 노래했을 때였으며,
세 번째는 캠던 시위에서였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적어도 한 번 더 부르심을 들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그가 루디 살레스를 밀쳐 내고 그녀를 향해 쏜 탄한을 대신 맞았을 떄 였으리라.


존은 부르심에 대해 묘사하는 중에 이러한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마치 성령께서 내 목덜미를 잡고 나를 낚아채신 듯,,, 내가 정확히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 헤아릴 수 없지만,
  내가 내 뒤에서 불어오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되는 바람을 타고 비상하고 있다는 예감이 재차든다.'


조나단 다니엘스가 깨달은 것처럼, 심지어 그 선택이 순교로 이어지는 경우마저 그러하다.


분명 우리 대부분은 순교자로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반드시 죽을 것이고, 죽음은 우리가 부름 받아 향해 가는 영적 여정의 필수 경유지이다.
또 죽음은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고, 말하자면 우리가 순명해야 할 명령이다.
어떻게 죽음에 순명하는지는

우리가 평생 마음의 습관으로서 순명을 얼마나 잘 함양했는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에 완고하게 저항하며, 순순히 어둔 밤에 들어서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듣고서,
진정 귀 기울여 듣고서 죽음을 하느님의 마지막 부르심이자 우리 여정의 최종 본향을 향한 교차로로 깨달으며,
부활과 이어지는 하나의 십자가로서 죽음을 껴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죽을 운명 앞에서 그저 수동적인 운명론을 함양하라는 말은 아니다.
더구나 유쾌하게 맞이할 일이거나 학수고대할 사건인 양 죽음을 비현실적으로 바라보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죽음에 수반된 슬픔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하나의 엄연한 부르심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부르심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분명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이 되는 바람이 우리 뒤에서 불어오리라는 것이다. (p201)


- 조나단 다니엘스.

이 글은 <아름답게 사는 기술>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케리 월터스 - 아름답게 사는 기술
역자 - 김성웅
생활성서사 - 20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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