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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시와 산문

by 탄천사랑 2007. 5. 4.

(단행본) 미셸 투르니에 -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

 

 


우리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상점, 고물상과 철물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철물점의 진열장에는 검은 베이클라이트 손잡이가 달린 빛나는 알루미늄 냄비 몇 개가 진열되어 있다.
식기류만큼 맵시 있는 냄비가 다용도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냄비의 존재 근거는 텁텁한 요리, 불, 양념, 설거지에 의한 침식이다.
사용 가치가 있는 물건들은 유용성이 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사용되다가 곧 폐기되고 바뀔 것이다.

 

고물상 역시 냄비 진열해 놓는다.
그러나 순구리로 만들어진 이 냄비들의 표면은 18세기 장인이 수공으로 정교하게 두들긴 것처럼 보인다.
이 냄비들은 불에 올려 놓을 수 없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이것은 실제 냄비라기보다 냄비라는 관념에 불과하다.

 

우리가 낱말을 산문으로 된 텍스트에서 찾아내든 시에서 찾아내든 상황은 똑같다.

 

산문의 존재 이유는 그 유효성에 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산문은 본질적으로 실용적이다.
  나는 산문가를 낱말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정의할 것이다.
  주르댕씨는 실내화를 요구하기 위하여 산문을 썼고,
  히틀러는 폴란드에 선전포고를 하기 위하여 산문을 썼다."고 말했다.

 

그들은 서로 말에 대한 유효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주르댕 씨는 말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자기에게 실내화를 가져오기를 바랐고,
히틀러는 그의 사단이 실제로 폴란드를 침략하기를 바랐다.
결과를 얻은 이상, 이런 명령은 통용되지 않고 그 고유의 유효성에 앞서 사라지게 된다.
철물 장수의 냄비와 마찬가지로 산문은 그 본질의 파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영원성을 갈망하는 낱말은 시의 낱말이다.
작시법과 각운은 기억을 돕는 덕에 정당화된다.
왜냐하면 운문의 성향은 암기되어 끊임없이 낭송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폴 발레리는 데생화가 드가와 시인 말라르메의 이런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드가가 말하길,
‘나는 머릿속에 많은 관념을 가지고 있다. 나 역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말라르메가 드가에게 응수하길,
‘하지만 사랑하는 친구야,
 시란 관념으로 씌어지는 것이 아니라, 낱말로 씌어지는 것이야’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관념에서 나오는 것은 산문이기 때문이다.
주르댕 씨는 실내화를 신을 생각을 먼저 하였고,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략할 생각을 하였다.
두 사람은 자기들의 생각에 맞추어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시에서는 낱말이 우선이다.
시는 울림과 리듬에 따른 낱말의 연결이다.
낱말들이 전달하는 관념은 부차적인 것이다.
산문을 이해하는 것이 산문을 지배하고 있는 관념을 파악하는 것이라면,
시를 이해하는 것은 시에서 연유하는 영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산문이 명쾌함과 정확성에 가치를 둔다면, 시는 감정과 연상력에 가치를 둔다.
그 결과 우리는 관념을 중시하는 조건하에 항상 낱말들을 산문으로 바꿀 수 있고,

특히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반면에 시는 구성된 낱말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에 다른 언어로 번역될 수 없다.
한 편의 시를 다른 언어로 번역했다면, 그것은 주제가 같은 두 편의 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내용과 형식의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같은 관념을 설명할 수 있다.
같은 내용물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산문에서 내용과 형식은 쉽게 분리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시에서는 형식이 내용의 구실을 하고,

내용이 정해진 형식과 혼동되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은 분리될 수 없다.


인용 : 우리는 깊은 사고가 철학자들보다 오히려 시인들의 작품 속에서 발견된다는 데 놀란다.
           그 이유는 시인들이 열정과 상상력으로 시를 쓴다는 데 있다.
           철학자들은 이성에 의하여 추출해내지만, 시인은 상상력으로 분출시킨다.
           더 한층 빛나게 만드는 과학의 근원이 부싯돌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내면에 있다.
           -  르네 데카르트의  <개인적 사고> - (P139)

 

※ 이 글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의 일부를 필사한 것임.

 

 

 

미셸 투르니에 -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
역자 - 이용주
한뜻 - 1995.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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