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선 -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기분 좋은 하루는 내가 만든다.
아침 열 시쯤 빵집에 가니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수북하게 쌓인, 내가 좋아하는 샐러드 빵을 집으려는데 아직 어리기만 한 아르바이트 직원이 말한다.
"오늘은 샐러드빵을 제일 일찍 만들어서 지금은 맛이 덜해요.
내일 맛있게 준비해 놓을 테니 오늘은 다른 것 사세요."
나 말고도 여러 명에게 그렇게 말했는지 다른 빵들보다 높이 쌓여 있었다.
'남으면 버려야 할 텐데. 더 팔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면서도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줄 빵까지 쟁반에 챙겨 담았다.
예산보다 지출이 늘었지만 기분은 가볍기만 했다.
오후에 들렀던 구청의 직원들은 또 왜 이리 친절한가.
너무 친절해서 고마운 마음에 지갑에서 덜컥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그러는 내가 더 어색했다.
무슨 음식점도 아니고 팁이라고 줄 수도 없는 공공기관에서 마음만 앞세운 것 같아 쑥스러웠다.
"더운데 직원들과 음료수라도...." 고작 내가 말한 명분이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어떻게 이렇게 친절하실 수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어휴, 10년도 넘게 한 일인데 이 정도도 못하면 말이 됩니까?"
이렇게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그가 존경스럽다.
만인 내가 불친절한 직원에게 '왜 이리 불친절해요?'라고 물었다면 아마 그 답도 비슷할 것이다.
"10년 넘게 매일 똑같은 일만 해봐요.
이 정도가 불친절하다고요?"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니 이게 웬 운수 좋은 날인가.
늦은 오후 경기도 한 연수원에서 강의가 있다.
늘 시간에 쫓기는 나는 뚫린 길만 보이면 과속 본능이 발동하는 '과속의 여왕'이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여 강의 시간을 기다리는 한이 있어도 일단은 밟고 본다.
그렇게 고속도로를 달려 1차선 국도로 접어들었는데,
화물트럭이 내 앞에서 느린 속도로 가고 있었다.
약간 갑갑한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 압박도 하지 않았는데 화물 트럭이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 길가로 바짝 붙으며 속도를 줄였다.
먼저 가라는 뜻이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호의를 받은 덕분에 길마저 넓어 보였다.
비상등으로 감사의 표시를 전하고 나니 가는 길이 개운하다.
16년 전 일이 떠올랐다.
영동고속도로가 공사를 하던 때라 용인 쪽 연수원을 가려면 시간 예측이 어려웠다.
휴대폰을 갖기 바로 전 해다.
비까지 억수같이 오던 날이다.
너무 막혀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앞차 후미에 안테나가 달린 것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카폰이 있는 차라는 걸 의미했다.
차 안에서 급하게 메모를 썼다.
'이종선입니다.
강의 20분 전 도착하려 했는데 차가 막혀 그건 어렵고 5분 전에는 도착할 듯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거의 정차상태이다 시 피한 상황이었기에 전화 한 통을 부탁하러 메모지를 들고 앞차로 갔다.
운전석의 유리창이 열리자 군복을 입은 이가 나타났다.
그를 보고 순간 망설였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잠시 후 빗 속을 뚫고 내 차까지 와서 통화됐다는 보고(?)까지 해주었다.
참 고맙다는 느낌으로 그 일은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그룹 연수원에 도착하니 담당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이 선생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도착 시간을 국방부에서 알려주네요"
추측해 보건대 앞차에 있던 것은 카폰이 아니라 무전기였던 모양이다.
군복 입은 그분은 국방부에 무전기로 연락했고,
국방부에서는 내가 적어 준 연수원 번호로 전화했을 것이다.
양보해 준 트럭 덕분에 지워질 뻔했던 감사한 옛 기억이 흐뭇하게 떠올랐다.
그날의 군복을 입은 그분이 참 감사하다.
번거로운 상황을 말하고 거절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다급한 내 마음을 알아주었던 것일까. 그는 생판 남인 나를 도와주었었다.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새삼 이름도 모르는 그에게 감사하고 싶다.(그가 제발 이 책을 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그때를 떠올리며, 강의하기로 되어 있는 연수원에 도착했다.
경비 아저씨의 거수경례가 멋지다.
뒷짐 지고 나와 턱을 치켜들며 '어디서 왔냐'라고 퉁명스럽게 묻고는
신분증을 달라고 요구했던 지난주 강연 장소와는 너무 다르다.
손가락을 모으고 방향을 지시하는 손동작 하나도 나를 강의실까지 배웅해 주는 듯 살갑기만 하다.
교육 담당자는 그 회사 사장이라도 온 것처럼 최선을 다해 나를 정중히 대해준다.
강의는 또 왜 이리 잘 되는가.
이게 설마 내 능력일까,
아니, 오늘 내가 앞서 만난 사람들이 준 기운임을 나는 안다.
그들의 긍정적인 기운이 네게 기를 불어넣어 준 것일 테다.
강사료는 흰 종이로 두 번 감싼 기분 좋은 신권으로 받았다.
감사 메시지까지 쓰여 있다.
두 손으로 정중히 전하는 담당자 덕에 받은 금액보다 열 배는 더 받은 듯한 기분이다.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 톨케이트 직원이 거스름돈을 건네며
"비가 좀 오네요. 조심하세요" 하고 웃는다.
참 기분 좋은 응대다.
얼마인지 금액만 말해도 되는데 이게 왠 복인가.
나 역시 그녀의 웃는 얼굴이 예쁘다는 인사를 전하며 잠시 힘께 웃었다.
집에 들어오기 전 들른 마트에서는 단골이라며 덤을 주는데,
오늘 몇십 번은 했을지도 모르는 그 인사가 마치 처음인 듯 싱싱한 음성이다.
집에 들어와 재킷을 벗다가 멈추었다.
도대체 이게 뭔 일일까.
오늘 내가 보낸 하루가 진정 꿈이 아닌 현실이란 말인가.
이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빵 집의 아가씨다.
그때 시작된 오늘 하루의 좋은 기분이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계속 전달되어 그들도 내게 그럴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하루는 어젯밤에 무슨 꿈을 꾸었는 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만난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 시작 덕분에 나는 오늘 억세게 운이 좋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하루다. (p129)
※ 이 글은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이종선 - 멀리가려면 함께가라
갤리온 - 2009. 08. 12.
[t-23.04.06. 230402-152248-3]
'성장교육(인문.철학.교양. > 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관계론 -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7가지 비결 (0) | 2024.06.15 |
---|---|
여자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 매듭은 만남보다 소중하다 (0) | 2024.03.25 |
정리하는 뇌 - 제1부 01 정보는 넘쳐나고 결정할 것은 너무 많다 (0) | 2023.04.04 |
김경일-적정한 삶/5. 분노의 시제 (0) | 2021.11.13 |
박이문 인문 에세이 (0) | 2017.07.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