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 「적정한 삶」
‘분노’는 다른 어떤 감정보다도 강하다.
크게 성이 난 상태이며 매우 극단적이고 파괴적이며 강한 에너지가 분출된다.
에너지가 사라지는 상태인 ‘우울’과는 정반대의 심리 상태다.
분노가 일어나는 상황은 다양하지만 주로 배신과 같은 충격적인 상황이 뒤따르는 경우가 많다.
무언가를 기대했으나 그것이 비참하게 꺾인 상태에 많은 사람들은 강력한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
기대가 꺾일 때 분노한다니,
우리 이쯤에서 ‘기대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 더 세심하게 봐야 할 필요가 있겠다.
일단 영어로 바꿔 보면 어떨까?
학교 다닐 때 열심히 단어 좀 외워 보신 분들이라면 ‘expect(익스팩트)’라는 동사를 바로 떠올릴 것이다.
“내일은 날씨가 좋을 것으로 기대된다.”거나
“검사 결과가 좋을 것으로 기대된다.”
는 말을 하고 싶을 때 expect를 넣어서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당신에게 거는 기대가 커.”
“이번 프로젝트, 기대해도 되지?”
같은 표현은 어떤가?
이런 데까지 expect를 넣기에는 조금 머뭇거려진다.
영어 좀 하시는 분들은 trust(트러스트)라든지 다른 그럴싸한 숙어가 입안에서 맴돌 것이다.
expect, trust, believe처럼 영어에서는 예측, 믿음, 신뢰 등으로 쪼개 놓은 말을
한국어에선 ‘기대’라는 말 한마디로 사용하다 보니 생기는 소통의 차이다.
전 세계 다양한 나라와 민족의 생각과 감정을 담은 그릇이 언어이니 만큼,
이런 경우들은 찾아보면 상당히 많다.
다른 나라에서는 한 단어로 일컫는 말을
어느 나라에서는 미세하게 분절하여 여러 단어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용하는 감정 표현이
어떤 국가에서는 존재하지 않아 비슷한 말로 번역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언어와 심리는 함께 간다는 것.
언어에서 의미가 구분되면 사람의 심리도 선을 긋는다.
그러나 언어가 혼용되면 심리적으로도 혼동이 일어난다.
그래서일까.
많은 한국인이 ‘예측’과 ‘신뢰’를 심리적으로 혼동한다.
예측은 이성의 측면이다.
머리로 생각한 예측이 빗나가거나 틀릴 수 있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이때 굳이 배신감이라는 감정까지 끌고 올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신뢰’와 혼동한 사람들은 배신감과 함께 격한 분노를 표출하곤 한다.
선거가 끝난 후의 대한민국 거리를 보자.
예측이 빗나갔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분노하는지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측과 현실이 빗나갔을 때 표출되는 분노라는 감정. 이 감정의 시제는 참 묘하다.
과거, 현재, 미래가 혼합되어 빚어진 심리이기 때문이다.
최초에 어떤 미래를 예측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신의 예측이 틀렸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지점이 바로 분노가 시작되는 곳이다.
감정이 발현된 시점은 ‘현재’지만 예측의 시점은 ‘과거’다.
바로 이 시차가 분노를 통제하기 어렵게 만든다.
현재 시점의 정확한 사실로는 절대 분노를 다독일 수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8년에 벌어진 광우병 사태다.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둘러싸고 인간 광우병을 우려한 시민들이 분노에 휩싸여 거리로 나섰다.
사람들은 위험천만한 쇠고기 수입을 허가한 정부를 비난하고 결정을 무효화하길 주장했다.
그런데 그 병이 그렇게 위험했는가 하면 또 그렇지 않다.
병 자체만 놓고 보면 사실 100만 분의 1 정도의 리스크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많은 전문가들이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한 다양한 학술 자료를 근거로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하다는 예측은 이미 과거에 끝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확한 사실을 들이대도 과거의 예측을 바꾸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분노의 심리기제인 것이다.
이 당시 사람들이 원하던 것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먹어도 괜찮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미국의 안전 기준에 따라야 했던 이유’라는 진실을 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상대의 분노를 컨트롤하고 싶다면 현재의 사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럴 때 타임머신을 타고 분노의 원인이 발생한 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과거에 해결의 열쇠가 숨어 있으니 말이다.
노사분규는 항상 극적 타결된다.
대체 왜 그럴까? 타결의 장소가 회의장이라면 전혀 극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회의장은 조건이나 대안과 같은 ‘현재의 사실’을 말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갈등이 해결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회의실 밖, 전혀 다른 장소에서는 가능하다.
대체로 이 경우엔 양측 모두 신입사원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극적인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노측과 사측이 10년 전 과거에서 문제의 원인을 발견하고 진실과 마주하면서 분노는 가라앉는다.
여기에 추억은 덤이다.
노사관계든 부부관계든 마찬가지다.
함께 추억할 과거가 있는 관계는 안전하고 단단하다.
아무리 큰 분노의 상황이 몰려와도 좋은 기억이 있다면 넘어설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 불행하다고 해도, 행복한 과거를 가진 사람들은 이겨 낼 힘을 갖는다.
우리 주변의 소박하고 착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
우리들은 모일 때마다 그렇게 시답잖은 옛날이야기를 하지 않는가.
“그때 참 좋았어.”
“그때 정말 행복했어.”
돈 없어도 행복하고 따뜻했던 기억,
좋아하는 친구들과 낄낄대던 밤들,
아름다운 곳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재미있게 놀고 마음을 울린 대화들을 나누던 시간,
내가 응원하는 프로야구 팀이 3년 연속 우승을 해 버린 경이적인 사건 등.
별것도 아닌 옛날 일들을 두고두고 꺼내서 미소 짓는 사람들에게 사실 큰 문제가 없다.
이들에겐 분노를 조절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화가 나는 상황이 벌어져도 좋았던 과거를 통해 감정을 조절하고 결국 새로운 행복을 찾을 것이다.
문제는 반대의 경우다.
너무 쉽게 분노하는 사람,
불같은 화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
끊임없이 다른 이를 해하려는 사람,
타인과 사회에 화풀이를 하며 언제고 다시 분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많은 경우 이들은 추억이 없다.
아니, 어쩌면 행복했던 척은 할 수도 있겠다.
“그때 참 좋았지. 당시 돈을 엄청 벌었거든.”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정말 이게 행복한 경험일까? 행복해 본 사람은 안다.
돈은 행복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행복한 지금은 훗날 괜찮은 과거가 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행복한가?
소소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거나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 착각하고 있다면 한번 멈춰 서 보자.
미래의 어느 지점에서 분노 속에 고통 받게 될지도 모른다.
※ 이 글은 <적정한 삶>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김경일 - 적정한 삶
진성북스 - 2021. 0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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