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 적정한 삶」
총량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감정
참 기한 일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80%는 자기가 ‘욱’하는 성격이라며 고민한다.
보는 사람마다 자기가 문득문득 솟아오르는 화 때문에 힘들다고 하니,
이제 특별한 고민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사실 누구나 화를 낸다.
분노라는 감정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문제는 ‘홧김에’ 저지른 일들이다.
인간이란 동물이 얼마나 연약한지 홧김에 해 버리는 게 너무 많다.
홧김에 싸우고, 홧김에 물건을 던지고, 홧김에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린다.
더 심각한 건 홧김에 질렀다는 것.
화가 난 상태에서 쇼핑들을 그렇게 많이 하는 모양인데,
오죽 많이 했으면 ‘시발비용’이라는 거친 신조어까지 생겼겠는가.
화가 나서 택시 타고, 화가 나서 불닭 시켜 먹고, 화가 나서 명품을 사 버렸단다.
이 정도면 화만 다스려도 충동구매로 낭비되는 비용이 줄어들 테니,
감정 조절이 마음의 건강뿐 아니라 가정 경제에도 도움이 될 법하다.
그런데 도대체 왜 화가 나면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화가 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다.
제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감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게 ‘화’이니 제어가 어려운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화를 비롯한 모든 감정은 ‘총량의 법칙’을 따르지 않으니 말이다.
의지력 총량의 법칙
총량의 법칙이라. 낯설면서도 친숙한 용어일 것이다.
학창시절 과학 시간에 배웠던 ‘질량 보존의 법칙’은 물질이 상태 변화에 관계없이
같은 값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자매품으로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다.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이 정해져 있다는 뜻으로
변호사로도 활동 중인 김두식 교수의 명언이다.
나는 이제 인간 심리의 양적 변화에 대해 새로운 총량 법칙을 말해 보고자 한다.
사람의 심리기제 중에는 정해진 총량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게 있다.
일단, 총량의 법칙을 따르는 것에 대해 얘기해 보자.
어느 날 아침, 나는 지갑에 10만 원어치 현금을 들고 집에서 나왔다.
오전에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서점에 들러 책 두 권을 구입하면서 3만 원을 썼다.
점심때는 동료에게 밥을 살 일이 있어 점심을 먹고 2만 원을 계산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저녁, 지갑에는 5만 원이란 돈이 남아 있었다.
그때 오랜만에 동창 녀석이 시간 되면 잠깐 한잔하자고 한다.
동네 호프집에 들러 치킨과 맥주를 신나게 먹고 5만 원을 썼다.
이제 내 지갑에 남은 돈은 0원이다.
10만 원에서 3만 원, 2만 원, 5만 원을 차례대로 빼 썼으니 말이다.
10만 원이란 돈은 더 넘치거나 없어지지도 않고, 내가 쓴 만큼 사라지고 말았다.
이게 바로 총량의 법칙이다.
이처럼 현금과 같이 철저하게 총량의 법칙을 따르는 심리기제가 있으니, 바로 인간의 의지다.
어느 날, 나는 마음의 지갑에 10만 원어치 의지력을 담아 집에서 나왔다.
교수 연구실에 출근하여 커피 한잔 하려는데 학생 하나가 들어와 논문을 봐 달라고 한다.
어디 보자… 한 장 한 장 읽어 내리는데 세상에, 이런 엉망진창 논문이 없다.
“이 호랑말코 같은 녀석아,
이까짓 거 쓰느라 그 귀한 시간과 학비를 낭비하고 앉았느냐!”
당장이라도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진심을 내뱉고 싶지만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인자한 교수가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욕지거리를 꾹 눌러 담고 사람 좋게 웃는다.
“허허허, 조금 부족하군,
하지만 괜찮아. 이러면서 발전하는 거니까.”
품 안에 넣어 두었던 10만 원어치 의지력 중에 3만 원을 꺼내 쓰는 순간이다.
점심시간,
교직원 식당에서 평소 얄미웠던 동료 교수가 멀리서 다가오더니 식당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외친다.
“어머나, 김 교수!
이번에도 프로젝트 떨어졌다며? 그것 참 안됐구먼, 껄껄껄!”
‘이 인간아! 사람 많은 데서 해 보자는 거냐?’
당장이라도 멱살을 부여잡고 싶지만 사회적 지위와 품위가 있기에 미소로 응답한다.
“그러게 말이야.
박 교수야 워낙 훌륭해서 이런 일 없겠지만 나야 뭐, 능력이 부족한 탓이지, 허허허.”
가증스러운 겸손의 말을 하는 순간, 4만 원 가량의 의지력이 소비되었다.
이제 남은 건 겨우 3만 원의 의지력뿐이다.
오후 2시,
잠시 산책 겸 걷고 있는데 막내 딸 채원이에게 전화가 온다.
어울리지도 않게 귀여운 목소리다.
“아빠, 나 어쩜 좋아요!
지난번 시험 결과 나왔는데 수학 40점이래……. 힝.”
뒷골이 당기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너 이놈의 자식, 공부 안 하고 유튜브만 볼 때 알아봤다.
이따 저녁 때 죽을 줄 알아!’라고 말하면
사춘기의 정점을 달리고 있는 아이의 뒷감당을 어찌 할 것인가.
마지막 의지력을 박박 긁어 웃으며 말한다.
“괜찮아, 우리 딸. 고생 많았어! 다음엔 더 잘하자~.”
모든 의지력을 쓴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 담배가 물려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갖고 있던 의지력이 바닥났기에 금연할 의지력이 남아 있지 않은 탓이다.
이처럼 의지력은 지갑 속 현금처럼 쓰는 만큼 없어진다.
이유 없이 사라지지도 않고 기적처럼 불어나지도 않는다.
이게 바로 의지력 총량의 법칙이다.
총량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감정
그런데 총량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게 있으니, 바로 인간의 감정이다.
기쁨, 슬픔, 분노, 우울 등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총량이란 게 없다.
써도 써도 마르지 않고 처음 그 양이 유지가 된다.
아니, 유지가 아니라 전이되거나 확산될 정도다.
직장생활 하다 보면 이런 경험 한 번쯤 해 보지 않았을까?
이른 아침, 결재를 받으려는데 부장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엄청 화가 나 있다.
사실 부장님은 아침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집 막내아들 입시에 온 가족이 사활을 걸었는데 시험 결과는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출근 직전 본인과 똑 닮은 아이에게
“넌 누구 닮아서 이 모양이야!”라며 이미 한바탕 해 버렸다.
감정이 총량의 법칙을 따른다면 화 낸 만큼 소모되어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않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문을 쾅 닫아봤자
분노의 감정은 여전히 가득 차 아예 넘쳐흐르기 직전이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출근하자마자 처음 결재 서류를 들이미는 직원은 지지리 운도 없는 사람이다.
“경력이 몇 년인데 이 따위 걸 기안이라고 써 왔어?!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뒤돌아 억울해했던 기억,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특별한 이유도 모른 채 온갖 수모를 겪었던 직장인의 비애에는
총량의 법칙을 따르지 않은 감정의 비밀이 숨어 있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막내아들이 어디서 큰 상 하나를 받으면 부장님의 기분은 아침 내내 좋다.
귀여운 아이를 보며 느꼈던 기쁨이 출근길에도 지속된다.
옆에서 아무리 끼어들어도 ‘예~, 예. 먼저 가세요.’ 하고 평소답지 않게 양보도 척척이다.
회사에 도착해서도 기쁨이 마르지 않는다.
출근 직후 결재할 서류가 조금 엉망이어도 미소 가득한 얼굴로
“자네, 열심히 하는 게 보기 좋구먼!” 하고 급작스럽게 칭찬을 하질 않는가.
분명 기쁨의 원인은 따로 있는데 감정이 선을 넘어 부하직원에게까지 넘친 경우다.
물론 좋은 감정의 영향을 받으면 나쁠 일이 없다.
그러나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한다고 불합리하게 당하는 일이 생기니 문제다.
원인 모를 타인의 감정에 당하지 않으려면 분명한 경계선을 그어 줄 필요가 있다.
감정의 선 긋기
프랑스의 심리학자들은 낭만의 나라답게 로맨틱한 연구를 참 많이 한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연애와 관련된 심리학 실험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탁 트인 광장에 중간 정도 되는 외모의 남성을 실험맨으로 준비시킨다.
그의 임무는 그곳을 지나는 젊은 여성들에게 다가가 소위 작업을 거는 것.
실험에 참가한 여성 중 몇 퍼센트 정도가
그에게 흔쾌히 전화번호를 줄까? 결과는 날씨에 따라 달랐다.
햇빛이 반짝이고 바람은 살랑이고
파란 하늘에 조각구름이 떠 있는 화창한 날씨엔 40% 정도의 여성들이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외모의 남자가 접근했지만
흐리고 꾸물꾸물한 날씨엔 15% 정도만이 번호를 알려 준다.
역시 감정은 총량의 법칙을 따르지 않았다.
맑은 하늘을 보고 좋아진 기분은 나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볼 때도 유지되었지만
흐린 날씨 때문에 생겨 버린 나쁜 기분은 낯선 남자에게도 그대로 전이된다.
전혀 별개의 상황에서도 감정이 연결된 셈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다음 실험이다.
로맨틱한 감정이 샘솟는 아름다운 날씨에도 작업을 실패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
실험맨이 이 말 한 마디를 덧붙임으로써
번호를 알려 주는 여성의 수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고 한다.
바로 “오늘 날씨 참 좋죠?”라는 인사말이다.
화창한 날씨 때문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여성에게 중간 수준의 외모를 가진 남성이 다가간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오늘 날씨 참 좋죠?”라고 말을 건넨다.
여성은
“네, 참 좋네요.”라고 대답하는 동시에
지금 느끼는 좋은 감정의 원인이 날씨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녀의 뇌 안에서 선을 넘나들며 전이되던 감정이 잠시 멈춰진다.
그리고 확실한 경계선 한 줄이 그어지는 것이다.
‘날씨는 좋고, 남자는 별로고.’ 이로써 번호를 알려 달라는 요청에 당당히 거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결재를 받아야 되는데 부장님의 얼굴빛이 좋지 않다면? 물어보는 게 답이다.
타오르는 불처럼 제어가 되지 않는 그의 감정에 브레이크를 거는 한 마디는 간단하다.
자, 직장인이라면 그냥 외우자.
“부장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물론 어떻게 대답하느냐는 부장님 마음이다.
“어휴, 상무님한테 된통 혼나고 왔잖아.”라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도 있고,
“아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라고 정색할 수도 있다. 상관없다.
그 대답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부장님의 뇌는 자기가 기분 나쁜 이유를 한 번은 떠올릴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나를 화나게 한 일과 부하 직원의 서류는 다른 영역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감정의 경계선이 그어지면 쓸데없는 트집을 잡는 일도 줄어든다.
이것만으로도 엉뚱한 화를 뒤집어쓰는 억울한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결재를 앞두고 싱글벙글한 부장님에게
“아이고, 부장님.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봐요.”라고 묻는 어리석은 짓은 제발 좀 하지 말자.
부장님의 감정의 경계선이 생겨 ‘그건 그거고, 서류는 엉망이고.’로 연결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감정의 조절, 경계선 긋기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가
하루 종일 복작거리다 보니 총량을 넘어서 철철 흘러넘치는 감정이 문제가 된다.
배우자나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화를 내는 빈도가 많아지고 강도도 세진다.
외국의 경우엔 가정 폭력으로 번지거나 이혼율이 높아지는 등
가정 내 불화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연결된다고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가정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다들 ‘오늘은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야지’ 하고 다짐하며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의지력은 총량의 법칙을 따르니 얼마 후 바닥이 나게 마련이고
의지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총량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화가 불붙어 버리면 제어가 되지 않는다.
하루만 지나도 땅을 치고 후회할 만한 폭언과 낭비를 해 버리기 일쑤다.
감정을 잘 다루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감정이란 것이 마음대로 조절하고 컨트롤할 만한 것이 아니다.
웬만큼 도를 닦지 않는 이상
불붙은 화를 순간적으로 소거하거나 없는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없지 않겠는가.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화가 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슬기롭게 화를 내야 한다.
그 차이는 감정의 경계선을 그을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다.
제멋대로 선을 넘나드는 감정을 컨트롤하고 싶다면 경계선을 긋자.
그 순간 뇌는 나를 되돌아볼 것이다.
어떻게 경계선을 긋는단 말인가?
이때 튼튼한 두 다리가 도움이 된다.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나를 감쌀 때, 왼쪽 가슴에서 사직서가 나오려 하거나,
오른쪽 주머니에서 신용카드가 나오려고 꿈틀댈 때,
내 세 치 혀가 소중한 가족들의 가슴에 큰 상처를 입히려고 할 때,
두 다리를 움직여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나오거나 집 밖으로 도망치자.
쇼핑을 하는 중이라면 가게에서 나와도 되고 자리에서 인터넷 상거래를 하고 있다면
일단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버리자.
심리학자들은 화가 난 장소에서 피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브레이크를 걸 수 있다고 한다.
한 가지 팁을 더 주자면
천천히 걸어서 나오지 말고 최대한 빠르게 달려서 잽싸게 도망쳐 나오는 것이다.
우리 뇌는 몸을 움직이는 동작을 더 적극적인 의지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걷는 시간은 3분이면 충분하다.
단 3분이라도 다른 장소에 머물다 보면 ‘저 사람은 항상 왜 나를 화나게 만드는가?’에서
‘내가 왜 화를 내고 있지?’로 경계선이 그어진다.
사실 걷다 보면 많은 것이 해결된다.
감정은 정돈되고 논리는 연결되며 생각은 차분해진다.
예부터 심리학에서는 걷는 행위를 일컬어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고대 철학 중에서는
‘소요학파’라고 하여 도심 속을 그저 천천히 산책하는 행동을 곧 철학과 연결시키는 학파도 있었다.
실제로 뇌 사진을 찍어 봐도 발뒤꿈치가 지면에 닿을수록 뇌 속 편도체 활동은 진정된다.
편도체는 불안감, 화, 우울 등 부정적인 감정들을 만들어 내는 영역이다.
편도체 옆에는 ‘해마’라는 영역이 존재하는데 편도체와 해마는 서로 길항작용을 한다.
편도체의 활동이 클 때 해마는 위축되고, 편도체가 움츠러들면 해마는 확장된다.
그런데 이 해마가 담당하고 있는 활동이 바로 새로운 생각과 기분 전환이다.
마음이 헝클어지고 감정이 엉망일 때,
머릿속이 복잡하고 생각이 너무 많을 때,
스트레스와 분노가 가슴을 짓눌러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때,
그냥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와 천천히, 혹은 빠르게 걸어 보자.
생각보다 많은 것이 좋아질 것이다.
당신의 의지를 과신하지 말길 바란다.
강한 의지력으로 감정을 다스리려고 애쓰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자신을 탓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지 말고 상황을 조금만 변화시키자.
감정 정리는 의지력의 몫이 아니다.
이는 감정의 파도로 고통받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인지심리학이 전해 주는 작은 지혜다. (p94)
※ 이 글은 <적정한 삶>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김경일 - 적정한 삶
진성북스 - 2021. 03. 30.
[t-22.08.30. 220827-163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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