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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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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버리고 떠나기/남의 삶과 비교하지 말라.

by 탄천사랑 2022. 8. 5.

법정 - 「버리고 떠나기



입추(立秋)를 전후에서 아침 저녁으로 선들거리는 바람결에 홑이불만으로는 잠자리가 편치 않다.
초저녁에는 쾌적하던 홑이불도 새벽이 되면 한기에 자주 깨어나 옹송그리게 된다.
잠결에서 환기창을 닫아야겠다고 벼르면서도 막상 일어나기가 머리 무거워 더욱 옹송그릴 뿐이다.
장마철에는하루 걸러 지피던 군불을 입추가 지나면서부터는 거의 날마다 지피게 되었다.

지난 여름에는 실로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아랫절에 내려가 보면 앞마당이 그득하도록 여름철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로 장바닥을 이루었다.
사무실쪽 이야기로는 봄철의 관광시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했다.
따라서 산 위에 있는 암자에까지 그만큼 발길이 미칠 수밖에 없다.

새벽과 밤 시간 말고는 정상적인 일과를 치르기가 곤란할 지경이었다.
물론 내 스스로 지어서 받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인 줄 알고 있다.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할해한 만큼 나는 또 그들을 통해서 세상을 배우고 물정을 인식한다.
우리는 같은 땅덩이 위에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기 때문이다.

휴가철만 되면 너도 나도 할것없이 한꺼번에 집을 나서는 것은 어찌된 노릇인가.
그 대열에 끼지 못하면 마치 주민등록이라도 말소되는 것처럼 모두가 떨치고 나서는 것 같다.
그래서 고속도로고 국도고 가릴 것 없이 길목마다 주차장을 방불케 하고 있는 실정 아닌가.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물결을 이루게 되었눈가, 물론 그만큼 생활에 여유가 생긴 덕이겠지만, 

한꺼번에 쏟아져 밀리는 것은 자기 삶의 특성이 없이 그저 남을 닮아가려는 경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쩌다 한두 사람씩 휴가철이 아닌 때 휴가를 얻어 산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 기특하고 좋게 보인다.
한적과 여백을 즐길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의 인품에 초면이면서도 신뢰감이 간다.

사람은 저마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독창적인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마다 삶의 조건이 다르고, 삶의 양식이 다르며, 또한 그 그릇이 다르다. 
그래서 저마다 자신의 그림자를 이끌고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의 빛깔을 지니고 진정으로 자기 자신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삶을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의 자기 처지와 이웃의 처지를 견주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나보다 잘사는 사람과 비교를 하면 스스로 기가 죽고 불행해지며,
어렵게 사는 사람과 견주다보면 자칫 안일과 오만에 빠지기 쉽다.

가령 내 삶의 형편이나 그릇이 30평짜리 아파트인데 친구의 50평이나 60평짜리와 비교를 한다면,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주거공간이 새삼스럽게 초라하고 옹색해 보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다운 우리집'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채 넓고 훤출하고 '비까번쩍'하는 남의 집이 내 눈을 흐리게 만든다.

지금까지 1300cc짜리 승용차를 아무 탈없이 잘 굴리고 다녔는데,
어느 날 친구의 2400cc짜리 승용차를 타본 뒤로는, 
갑자기 엔진의 소음이 더 요란해진 것 같고 승차감이 껄끄럽고 차가 덜 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된다면, 

이도 또한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

이런 비교는 마침내 자기 몫의 삶마저 스스로 걷어차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의 불행을 가져온다. 
각기 삶의 조건과 양식이 다른데 어째서 남과 비교를 하려고 하는가.

비교는 좌절감을 가져오고 시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것이 이른바 현대사회의 경쟁이요 투쟁이다.
부질없는 비교는 배움을 저해하고 두려움만을 키운다. 
비교적인 평가는 멀쩡한 우리들의 정신상태를 불구로 만든다.
오늘날 분수에 넘치는 과소비 풍조와 소득 수준에 걸맞지 않는 비싼 과외학습 풍조도 

부질없는 비교에 그 요인이 있을 것이다.

지난 봄, 우리 시대의 스승 크리슈나무르티가 최초의 영적인 체험을 했고, 
오랫동안 머물면서 91년의 생애를 마친 캘리포니아의 '오하이 밸리'에 있는 그 집을 찾아갔을 때,
마침 오랜지밭 위로 물든 저녁노을 앞에 마주서게 되었다.

그때의 그 노을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한동안 나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지극한 아름다움은 떨림이오 환희였다.
그런 노을 앞에서라면 삶의 끝장인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만약 그때, 
그 전해 겨울 스리랑카의 티크나무 숲 너머로 불타던 그 눈부신 노을빛과 비교를 했다면,
나는 그날 내 앞에 펼쳐진 그 떨리고 숨막히던 아름다움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비교는 이와 같이 사물의 실상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든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현재의 자기 자신과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를 자신을 견주지 말아야 한다.
이 또한 부질없는 것, 
'만약 그때 그 상황에서 그렇게 했더라면---' 이런 가정법은 차가 이미 떠나가버린 후에 손을 드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삶은 항시 '지금 이자리에서 이렇게' 사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사를 가지고 후회하며 가정법으로 안타까워 하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불확실한 미래를 앞당겨서 가불해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저마다 주워진 독창적인 삶을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무슨 일이든지 흥미를 가지고 해야한다. 
야심과 흥미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그 자체가 좋아서 하는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무엇이 되기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야심이요 야망이다. 
좋아서 하는 일은 그 자체가 삶의 보람이고 충만이지만,
무엇이 되기 위해서 그 일을 한다면 그것은 충만된 삶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된 메마른 삶이다.

내가 아는 아마추어 서예가가 있는데, 

해마다 서예전에 입선을 하다가 작년에는 입선에 들지 못한 것을 못내 비관하였다.
나한테 와서 한숨을 쉬면서 심사에 정실 운운하기에 야단을 쳐주었다.
심사를 의식하지 말고 그저 열심히 써보라고 일러주었다.
쓰는 일 그 자체가 삶의 보람이 되고 충만이 된다면 누가 알아주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 자신의 삶을 어째서 남의 자로써 재려고 하는가.

결과는 쌓은 공을 따라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무엇이 되려고 애쓰면 그건 흥미가 아니고 야심이기 때문에 기쁨도 순수한 행위도 아니다.
기쁨과 순수가 따르지 않은 일에는 진정한 창조가 이루어질 수 없다.

비교는 또 어리석음을 낳는다. 
어째서 우리는 하나같이 부자가 되기만을 원하는가.  
모두가 남보다 잘나보기를,  위대해지기를,  출세하기만을 원하는가. 
어째서 우리는 있는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처럼 부자가 되고 싶고, 잘나고 싶고, 위대해지고 싶고, 

출세하고 싶은 그 순간부터 나에게는 불행과 갈등이 따르고 시기와 질투와 좌절과 비애가 움트게 마련이다. 
그것은 내 자신에게 주어진 내 몫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시로 겪는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갈등의 대부분은,
분수에 넘치는 탐욕과 배타적인 증오심과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움에서 그 싹이 튼다.
정치적인 흑막이나 경재적인 문제, 혹은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온갖 갈등도 이 밤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탐욕과 증오심과 어리석음은 어두운 독소다.
이를 극복하려면 긁어모으는 대신 나누어 가질 줄을 알아야 하고, 
이해와 사랑으로 증오를 털어버려야 하며, 밝고 떳떳한 마음인 지혜로써 어리석음을 밀어내야 한다.

사람은 근원적으로 자기에게 주워진 , 
자기 그릇에 채워진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갈때 인간다운 삶을 이룰 수 있다. 
자기의 몫의 삶을 남의 것과 비교하지 말라. 
비교하면 불행해진다.    (p314)
 이 글은 <버리고 떠나기>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입니다.


법정 - 버리고 떠나기
샘터(샘터사) - 1993. 0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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