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무서워지면 지혜로워지기 시작한다." 이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존경할 만한 속담은, 겁을 집어먹는 사람은 경멸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벌 받는 것이 무서워서 훌륭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모든 나쁜 성향에다가 비겁함까지 아울러 갖추고 있는 악당이다.
(벌 받을 위험이 사라지면, 그는 온갖 종류의 파렴치한 짓을 저지를 수도 있다)
두려움은 분명한 인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동물과 적에 의하여 촉발된다.
그것은 무욕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패배의 전조이기 때문이다.
겁을 집어먹은 사람은 벌써 게임에 진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인과 적들의 노예이다.
사람들은 때로는 팬티에 오줌을 지리는 모습으로 겁먹은 사람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기 드 모파상은 유명한 다편 소설 <두려움>에서 두려움과 고뇌를 이어놓고 있다.
과학주의 때문에 신비(무지의 소산인)가 과학의 빛 앞에서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던 시대에
그가 이 글을 썼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하자.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미신만이 아직도 사람들 주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나 모파상은 잊혀지지 않는 무의식 안에서 두려움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발견해 냈다.
모파상은 이렇게 쓴다.
"두려움에 지난 세기들의 미신적 두려움이 섞여들 때에만 사람들은 공포라고 불리는 영혼의 끔찍한 발작을 경험한다."
그러니까 격세 유전적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는 선조의 과거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신비 앞에서 우리는 앞서 살았던 인류 전체와 함께 떠는 것이다.
고뇌는 분명한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적대적인 현존이라면, 고뇌하게 만드는 것은 부재이다.
가장 유년기 적인 고뇌의 형태는 어둠에 의해 촉발된다.
캄캄함은 그 속에 숨어 있는 괴물들 때문이 아니라, 캄캄함 그 자체 때문에 사람들을 두렵게 만든다.
그다음으로 우리는 현기증을 언급할 수 있다.
그것은 위험한 추락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공허 때문에 생겨나는 고뇌이다.
"이 무한한 공간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파스칼의 이 유명한 문장은 고뇌의 세 가지 근원을 지적하고 있다.
즉 침묵과 무한과 영원이 그것이다.
어둠 속에서 걸어가는 어린아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혼자서 노래를 부른다.
장 콕토는 어둠의 공포를 극복하려고 혼자서 노래를 불렀더니,
나중에는 자기가 지어낸 노래의 노랫말이 자기를 무섭게 만들더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고뇌는 인간에게 자신의 고독을 일깨워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까지도 일깨워 준다.
그것은 사색과 문화의 열매이다.
피에르 로티는 빈정대며 이렇게 말한다.
"초등학교 선생들, 관념적인 교수들, 인간 고뇌의영역을 확장시키는 이 모든 책들과 전쟁을 벌이자.
조상들의 행복한 세계로 돌아가자."
문명이 인간을 안심시켜 주는 누에고치 역할을 하는데 반해서, 문화는 무한을 향해 열린, 고뇌하게 하는 창문이다.
마틴 하이데거와 장-폴 사르트르에게 고뇌는 무(無)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구토가 존재의 출현을 나타내는것이었듯이)
신비주의자들은 고뇌가 신의 광대무변 함에 이르기 위해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좁은 문이라고 생각했다.
야곱 뵘은
"고뇌에 의하여,
그리고 고뇌를 극복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이 무로부터 출현한다"라고 썼다.
그리고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이렇게 말했다.
"신의 의지 안으로 맹렬히 뛰어드는 것만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이 글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의 일부를 필사한 것임.
미셸 투르니에 -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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