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문화 정보/보고(영화.미술.사진

· 레오 카락스-퐁네프의 연인들3/사랑의 불춤

by 탄천사랑 2007. 4. 24.

레오 카락스 - 「퐁네프의 연인들」

 

 

 

사랑의 불춤
알렉스는 솜방망이를 살펴보았다.
한 개가 불에 타서 헝겊이 벌어져 있었다.
50센티미터쯤 되는 굵은 철사 한쪽 끝에 야구공만한 솜덩어리를 헝겊으로 싸 맨 뒤 가는 철사로 동여 맨 것이었다.
몇 번 사용하고 나면 헝겊이 그을려 솜이 터져 나오게 마련이었다.

알렉스는 낡아빠진 타월을 찢어 다시 뒤집어 씌운 다음 가는 철사로 꼼꼼하게 묶었다.
오랜 경험 때문인지 그의 솜씨는 빈틈없이 빠르고 정확했다.

"나도 가도 돼."

미셸이 옆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갈 거야?"
"공원."

알렉스는 삐죽 튀어나온 헝겊을 주머니칼로 잘라냈다.
그의 칼은 두툼한 나무에 짤막한 쇠붙이를 붙여서 철사줄로 여러번 감아 만든 것이었다.
쇠붙이는 자동차 겹판 스프링을 잘라내어 오랫동안 갈아서 만든 것인데, 아주 날카로워 보였다.
칼날이 움직일 때마다 가로등 불빛이 예리하게 번득였다.
그는 늘 주머니칼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알렉스는 칼을 주머니 속에 넣고 일어섰다.
미셸은 솜방망이를 들고 알렉스를 따라갔다.
알렉스는 공원으로 가는 길에 주유소에 들려 점원에게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점원이 플라스틱 용기 몇 개를 건물 뒤 어둠 속에서 들고나왔다.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평상시에도 이 시간에는 사람이 많은 시간이었지만,
내일이 프랑스 혁명 2백 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공원은 휴일의 오후처럼 북적거렸다.

알렉스는 연못 옆 광장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시멘트 바닥이었다.
몇 사람이 다가와서 알렉스와 아는 체를 했다.
알렉스는 깡통에 석유를 붓고 솜방망이를 담그었다.
그리고 휴발유통을 열어 거기에 석유를 조금 섞고는 플라스틱 용기 여러개에 가득가득 부었다.

"알렉스다!"
"그는 불춤을 출 거야."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원 관리인이 다가 오더니 사람들을 멀찌감치 떨어지게 했다.
구경꾼들은 그의 지시대로 물러나 앉았다.

"알렉스, 준미됐어?"
"응."

알렉스는 웃통을 벗어제끼고, 연못가에 엎드려 얼굴과 어깨, 가슴팍에 물을 적셨다.
관리인이 스위치 박스로 가더니 스위치를 내려 주변의 등을 모두 꺼버렸다.
갑자기 호수 주변이 어두워지자, 그때까지 재잘거리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누군가의 카세트 음악 소리도 황망스럽게 꺼졌다.

알렉스는 석유가 적셔진 기름방망이를 하나 집어들고 불을 붙였다.
불꽃이 춤을 추면서 박박머리의 그의 얼굴이 그로테스크하게 드러났다.

알렉스는 석유가 섞인 휘발유병을 나머지 손으로 집어들고 사람들 앞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그는 계속 원을 그리며 휘발유를 한 모금 입에 넣었다가 갑자기 '푸----'하며 불방망이에 뿜어버렸다.
시뻘건 불꽃이 공중에서 소리를 내며 퍼져올랐다.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올렸다.

알렉스는 계속해서 사람들 앞으로 걸어다녔다.
그리고 이따금씩 휘발유를 머금었다가 불을 뿜어냈다.
불이 뿜어질 때마다 구경꾼들이 점점 더 모여들었다.
알렉스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불을 뿜어대는 횟수도 점점 빨라졌다.
시뻘건 불덩이가 공중에 퍼질 때마다 구경꾼들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졌다.

미셸은 구경꾼의 맨 앞줄에 앉아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불꽃이 한번씩 허공에 터지면서 그의 번들거리는 육체가 도깨비처럼 나타났다가 불꽃처럼 꺼졌다.
알렉스는 다시 휘발유을 바꾸더니 다시 돌기 시작했다.
미셸과 구경꾼들은 숨을 죽인 채 오로지 그의 불방망이를 따라다녔다.

갑자기 알렉스가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는가 싶더니, 그의 몸이 허공에 높이 뛰어오르면서 커다란 불꽃을 뿜어냈다.
호수 주변의 허공에 깔려 있던 어둠이 더 시커멓게 그을렸다.

그는 마구 뛰기 시작했다.
뛰면서 그의 시커면 입은 쉴새없이 불덩이를 뿜어냈고, 검붉은 연기와 함께 어둠은 더욱더 짙게 그을렸다.
구경꾼들의 휘둥그래 뜬 눈은 그가 불을 뿜을 때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알렉스는 금방 땀범벅이 되었다.
번들거리는 그의 육체는 간단하게 허공으로 치솟았고, 바닥으로 굴렀으며, 갑자기 구경꾼 앞으로 돌진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커다란 불덩이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정적을 찢어버렸다.
알렉스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자 잠시 후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그것과 동시에 한복판의 그의 발 밑에는 수많은 동전이 떨어져 굴렸다.

그는 불의 신神 같았다.
땀과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육체는 양팔을 크게 벌리고 끊임없이 불을 뿜었다.
그가 불을 뿜을 때마다 어둠은 더 짙게 변했고,
어둠이 있는 한 어둠을 그을리며 살아가는 화신火神의 생명도 영원할 것 같았다.
그의 육체는 그처럼 강인하고 생명력 있게 보였다.

그는 미셸의 앞으로 와서 그의 가슴 속에 일렁이는 불꽃을 미셸에게 뿜었다.
미셸은 깜짝 놀랐다가 곧 웃음 띤 얼굴로 박수를 보냈다.
주위 사람들이 미셸에게 박수를 보냈다.

알렉스의 불춤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미셸은 점점 고통스러웠다.
어둠과 불꽃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그녀의 약한 시력을 심하게 자극했던 것이었다.

미셸의 시아는 점점 흐릿해졌다.
알렉스의 모습도 불꽃의 아름다움도 점점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감싸쥐고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고통을 발견하고 불춤을 멈추었다.
모였던 사람들은 그에게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 뒤 동전을 던져주며 일어섰다.
미셸은 고통을 이겨내며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고개를 파묻은 채 앉아 있었다.
일부 관광객들은 지폐를 접어 알렉스의 바지춤에 쑤셔넣어 주기도 했다.

"괜찮아?"
"돌아가고 싶어."

알렉스는 미셸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친구들이 바닥에 떨어진 동전들을 챙겨주었다.
다리로 돌아가자마자 미셸은 벤치에 드러누웠다.
그는 고통으로 얼굴이 이그러져 있었다.

알렉스는 술을 마시고 싶었다.
미셸이 있었으므로 그는 더 신명이 나서 춤을 추었지만,
그만큼 가슴팍과 얼굴이 더 화끈거렸으며 입에선 기름 냄새가 지독하게 풍겨나왔다.

그러나 술을 사기 위해 미셸의 곁을 멀리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철망 앞에 있는 클럽으로 갔다.
거기에선 싸구려 술은 팔지 않았다.
더구나 수위에게 심부름을 시켜야 했으므로 그는 술병을 가지고 나오는 수위에게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술은 금방 바닥이 났다.
알렉스는 가지고 있던 앰플 하나를 깨어 마시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알렉스는 비행기 소리에 잠을 깼다.
일어나 하늘을 보니 미라쥬 전투기가 기러기처럼 바짝 붙어서 편대 비행을 하고 있었다.
비행기의 꼬리에서는 저마다 색깔이 다른 연기가 길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미셸은 벌써 일어나 다리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 역시 몽마르트 언덕 쪽으로 사라지는 비행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감았는지 촉촉한 윤기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아침 햇살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거리가 한층 소란했다.
오늘은 혁명 기념일이었다.
알렉스는 서둘러 다리 밑으로 내려가서 세수를 했다.
미셸이 쓰던 플라스틱 음료수병이 보였다.
그도 그것을 집어 수도물을 담았다.
미셸처럼 허리를 수그리고 등허리에 물을 부어 가슴팍을 닦았다.
기름기가 묻어나왔다.

알렉스는 교각 돌 틈에 끼여 있던 비누를 집으려다 그만두었다.
미셸이 철망을 넘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둘러 런닝셔츠를 목에 반쯤 걸치고 미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미셸은 지하도로 내려갔다.
거리가 수많은 인파로 붐비기 떄문에 거리의 악사들이 지하도가 아니면 연주를 못한다는 걸 알렉스도 알고 있었다.
미셸은 오늘도 거리의 악사 줄리앙을 찾아나선 것이다.

지하도는 한적한 편이었다.
미셸은 가방 하나만 한쪽 어께에 끼고 있었다.
오늘은 그림을 그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녀를 뒤따랐다.
어젯밤 무리를 해서인지 깁스한 발목에 심한 통증이 왔다.

평평한 에스컬레이터에 이르자 그녀는 안쪽 것을 탔다.
경사가 조금 전 곳에는 계단식 대신 평평한 에스컬레이트가 왕복 각각 2개씩 설치되어 있었다.
알렉스는 바깥 쪽의 것을 약간 떨어져서 탔다.
미셸은 아무 표정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미셸은 어디선가 첼로를 튜닝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였다.
드디어 그 첼로는 낯익은 음색을 내면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미셸은 뒤로 돌아섰다.
알렉스는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그가 허리를 펴 보니 그녀는 벌써 반대쪽 에스컬레이터로 뛰어넘고 있었다.
그녀는 움직이고 있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사람들을 밀어제치며 치달았다.
알렉스는 미쳐 반대쪽 에스컬레이터로 건너뛸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는 에스컬레이터를 거슬러서 사람들을 밀치며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다리가 심한 통증으로 후들거렸다.

에스컬레이터를 빠져나온 미셸은 갈림길 앞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첼로의 연주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는 나란히 입을 벌리고 있는 4개의 통로 중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몰라 멈칫거렸다.
그녀는 통로 하나하나에 다가가서 귀를 기울렸다.

그리고는 그 중 한 개의 통로 속으로 후다닥 뛰어들었다.
알렉스도 지팡이를 휘저으며 허겁지겁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얼굴은 땀으로 축축했다.
한쪽 어깨에 맨 가방끈을 꼭 쥐고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는 채 첼로 소리를 향해 뛰었다.
첼로의 소리는 구슬픈 가락을 따라 지하도의 벽과 천장을 타고 쉬임없이 울려퍼졌다.

​다시 갈림길이 나왔다.
그녀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멈추어 섰다.
음악 소리가 끊겼던 것이다.
그녀는 통로마다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고,
마치 음악 소리가 벽에 묻어 있기라도 하는 듯 벽에 손바닥을 대보기도 하였다.
알렉스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한쪽 벽에 붙어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음악 소리가 홀 안 가득히 퍼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더 빠른 곡조였다.

미셸은 이제는 뛰지 않았다.
엄청난 일을 향해 가는 것처럼 그녀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그러나 초점 없이 다만 첼로 소리를 향해 잰 거름을 놀렸다.
알렉스는 목발 소리가 울릴까봐 뛰어가지도 못하고 발걸음을 크게 했다.
뛰는 것보다 더욱 힘들었다.

​다시 소리가 멈췄다.
미셸도 알렉스도 따라 멈췄다.
그러나 이번에는 쉬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날카롭게 급박한 현의 울림이 통로 한쪽에서 크고 분명하게 지하도에 퍼지기 시작했다.

​미셸은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더니 옆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리나는 쪽은 지하철 정류장이었고, 그곳엔 첼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첼로는 철로의 건너편에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뒤를 따르려다 멈칫했다.
그는 곧바로 소리나는 쪽으로 내달렸다.
철로가 막아섰다.
그는 철로로 뛰어내려 맞은편으로 건너갔다.
전철 한 대가 기적을 울리면서 다가왔다.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알렉스는 잽싼 몸놀림으로 기차를 피해 플렛폼으로 올라갔다.

​통로 저쪽에 첼로가 보였다.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첼로를 끌어안은 듯한 자세로 열심히 활을 움직이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에게 다가가면서 주머니칼을 빼어들었다.
남자는 긴 머리를 늘어뜨려 첼로를 감싸듯이 하고 있었다.
곡은 점점 빨라졌으며, 악기의 줄 위에서 활이 춤추고 있었다.
그의 수그린 머리에서 흘려내린 머리카락과 첼로의 줄이 모두 부르르 떨고 있었다.

​알렉스는 다짜고짜 남자에게 다가가서 활을 나꿔채고는 칼을 들이댔다.

​"내 구역이야.
다시 나타나면 죽여버리겠어. 꺼져!"

알렉스는 목에 힘주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무척 나지막했으나, 남자에게는 그의 험상궂은 얼굴과 투박한 칼만큼이나 위험적이었다.
남자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일어섰다.
그는 고개를 숙인채 알렉스의 손가락이 가리킨 쪽으로 걸어갔다.
미셸이 마주오는 알렉스를 발견하고 그에게 물었다.

​"안녕,
혹시 첼로 연주하는 남자 못 봤니?"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어."

​알렉스는 그녀를 지나치면서 관심 없다는 듯 대꾸했다.
미셸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철 타고 가더군."
"그럴 리가......,"
"아주 뚱뚱한 여자였어."
"그럴 리가 없어."

​미셸은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그녀는 힘이 모두 빠진 걸음으로 터덜터덜 소리의 진원지로 걸어갔다.
미셸은 그곳에서 한 무더기의 담배꽁초를 발견했다.
그 꽁초들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는데, 모두 끝이 꺾어져 있었다.

​미셸의 눈동자가 별안간 커졌다.
그녀는 벼락같이 남자가 간 쪽으로 치달았다.
알렉스도 다시 쫓아갔다.

​또다른 플렛폼이 나타났고 전철이 오고 있었다.
첼로를 든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전철의 문이 열리자 구두 뒷굽으로 담배를 눌려 끄고 전철에 올랐다.

"안 돼!"

​미셸은 소리를 지르며 전철을 향해 달렸다.
그녀는 가까스로 남자의 뒷칸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제기랄."

​알렉스는 지팡이 목발을 내던졌다.
목발은 미끄러지면서 움직이는 전철에 부딪쳐 튕겨나왔다.
미셸은 줄리앙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는 조금 뒤에 서 있다가 자리가 나자 거기에 앉았다.
줄리앙은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미셸은 가방을 내려 화구통을 꺼냈다.
뚜껑을 조금 열고 손을 넣어 보았다.
권총이 차갑게 만져졌다.


​맑은 날씨였다.
청명한 가을 하늘 위에서 수도 없이 비행기가 지나갔다.
대여섯 대씩 일정한 모양을 유지한 비행기 편대가 한번씩 지나가면 하늘엔 그들이 뿜어놓은 긴 줄이 생겼다.
거리는 무척 소란했다.
비행기 소음과 자동차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아우성이 거리마다 넘실거렸다.

미셸은 줄리앙의 아파트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시내와 동떨어진 곳의 이 낡은 독신자 아파트는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쥐죽은듯 조용했다.
미셸은 방 번호를 확인했다.
그녀는 손에 들려 있는 권총을 한번 쳐다보고는 총구 끝으로 도어 스코프를 막았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홉을 하고 부저를 눌렸다.
잠시 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미셸."

​미셸은 낮게 대답했다.
남자는 무척 놀라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날 찾았지?"
"문 열어요. 줄리앙!"

남자는 도어 스코프에 눈을 대고 있었으나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권총의 총구 속은 캄캄할 뿐이었다.

"널 볼 수가 없어."
"문 열어요."
"안 돼, 미셸.
우리는 이제 서로 잊어야 해."
"사랑을 구걸하려는 게 아냐.
문 열어."
"안 돼!"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귀찮게 하지 않을게."

​미셸은 간청했다.
정말이지 최대한 심각하게 말했다.
꼭 할 이야기가 있었다.
이제 머지않아 그를 못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안 돼, 손이나 치워."

​미셸은 애원하듯 간청했다.
남자는 현관 앞의 불을 껐다.
아파트 계단은 대낮이었지만 곧 어두워졌다.

​"너의 얼굴을 그려야 한단 말야."
"안 돼."
"사랑해."
"....,"
"제발, 줄리앙."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외눈에서는 주르룩 눈물이 흘렸다.

"제발, 줄리앙!"
"....,"
"그렇게 날 피하면....,"
"....,"


그녀의 어깨가 크게 움직였다.
숨이 거칠어졌다.

"얼마나 목말랐는데....,"

미셸의 어깨가 더 크게 움직였다.
날카로운 총소리가 계단위로 울려퍼졌다.
외마디 비명 소리가 그치자 미셸은 문에 난 총구멍을 들어다보았다.
사랑하는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p97)
※ 이 글은 <퐁네프의 연인들>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레오 카락스  - 퐁네프의 연인들
역자 - 정덕성
대흥 - 1992. 03. 0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