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문화 정보/보고(영화.미술.사진

· 레오 카락스-퐁네프의 연인들1 /퐁네프의 부랑자들

by 탄천사랑 2007. 4. 20.

레오 카락스 - 「퐁네프의 연인들」

 

 

퐁네프의 부랑자들.
알렉스는 또 술에 취했다. 
벌면 버는 대로 술을 퍼마시는 게 그의 일과였다.
달리 돈을 더 쓸 데도 없었다. 모을 필요는 더더구나 없었다.
널려진 곳이 모두 그의 잠자리였고, 먹을 것은 시장바닥에서 주워 먹거나 훔쳐 먹으면 그만이었다.
옷도 신발도 면도기도 이부자리도 다 그렇게 해결되게 마련이었다.
특별히 쓸 곳도 없겠지만, 혹 돈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불춤을 한 번 추어주면 그만이었다.

---알랙스는 흐느적거리며 한밤중의 레알 가街을 걷고 있었다.
잠자리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걷다가 아무 곳에서나 쓰러지면 그곳이 잠자리었지만, 
그래도 걸을 수만 있다면 통네프 다리까지 가고 싶었다.
2년 동안 살아왔던 훌륭한 그의 안식처였던 그 다리에는 아무도 그를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아스팔트 한복판으로 걸었다.
한밤중이어서 행인이 있을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폭이 좁은 인도는 왠지 걸리적거리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만히 서 있는 길가의 건물들까지도 흔들거리며 자기에게 덤벼드는 것 같았다.
알렉스는 그것이 제일 싫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 있가를 좋아했다.
사람들과도 별로 사귀지 않았다.
딱히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기억하는 한, 그는 처음부터 혼자 자라왔고,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가족이라는 것이 있고 친구들이라는 것이 있어서 함께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하지만,
알렉스에게는 처음부터 가족이라거나 친구라는 것이 없었다.
따라서 모든 것이 그에게는 당연한 것일 뿐이었다.
--

그때 멀리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였다.
그 차는 텅 빈 밤거리를 과속으로 질주해서 비틀거리는 알렉스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대로 머리를 감싸 쥔 채 엎드려 있었다.
차가 고속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위험을 알아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동차 운전자 역시 한밤중의 도로 한복판에 사람이 누워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자동차는 알렉스의 몸뚱이 위를 밟고 지나갔다.
알렉스는 그대로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으며,
자동차는 잠시 덜컹 했을 뿐, 그대로 속력을 내며 사라지고 말았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여자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차도로 내려와 
머뭇거리며 쓰러진 남자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한쪽 팔에 가방을 둘러멘 채 화판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새끼 고양이가 든 큼지막한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자동차가 한 대 다가왔다.
경찰 호송버스였다.
말이 호송버스지 범죄자를 싣고 다니는 호송차가 아니라 
밤늦게까지 거리를 배회하거나 쓰러져 있는 부랑자들을 실어 나르는 일반버스였다.
버스에서 두 명의 경찰이 내렸다.

"이런, 또 알렉스야?"
"자, 부축하자구."  그들은 쓰러져 있는 알렉스를 일으켜 세웠다.
"이봐, 알렉스.
 그만 정신차리지 못해?"

그들은 알렉스의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질질 끌어다 버스에 실었다.
알렉스는 다행히 한쪽 발목만을 자동차에 깔렸던 것이다.
경찰은 알렉스를 버스 맨 앞자락에 앉혀놓고는 곧바로 차를 몰았다.
그때까지 화판을 든 여자는 멀거니 지켜보기만 하다가, 버스가 사라지고 나서 발길을 돌렸다.

버스는 낭테르 병원에서 멈췄다.
부랑자들의 치료소 겸 단기 수용소였다.
제프가 알렉스를 일으켰다.

"우릴 좀 도와 줘."

그는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지 도움을 요청했다.
알렉스의 다른 한쪽 팔을 부축해 준 사람은 러닝셔츠 차림의 여자였다.
제프는 여자와 함께 겨우 알렉스를 버스에서 끌어내리며 투덜거렸다.

"제기랄,
 너란 놈은 이제 진절머리가 나."

접수가 끝난 사람은 모두 목욕탕으로 보내졌다.
직원 한 명이 알렉스의 어깨를 잡고 목욕탕까지 질질 끌고 갔다.
목욕탕 앞도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알렉스도 옷이 벗겨졌다.
쓰러져 있는 그의 몸뚱이 위로 샤워물이 쏟아져내렸다.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발목에서 피가 나지 않았으므로 누구나 술 취한 사람쯤으로 보아 넘긴 것이다.
일단 목욕을 해야 치료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알렉스는 목발을 사용해서 걸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는 겨드랑이에 끼우는 긴 목발 대신 지팡이식의 짧은 목발을 지급받았다.

가을이라 햇살이 화사했다.
그는 좁고 침침한 병실에 누워있기보다는 정원에 나와서 걷는 것을 좋아했다.
말이 병실이지 한 방에 이십 명씩 일, 이층 침대에 나뉘어 자는 부랑아 합숙소였다.
소독약을 너무 많이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눈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소독약 냄새보다는 차라리 쓰레기 냄새가 알렉스에겐 더 편안하고 친근한 터였다.

정원을 저닐 때면 늘 당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알렉스보다 며칠 앞서 이곳에 수용되었다.
둘은 청명한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분수대를 돌아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나뭇잎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나랑 말 좀 하자. 
 알렉스"

알렉스는 대답 없이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비들기 몇 마리가 바쁘게 움직이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당은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좋은 곳이 있어. 
 그곳에 가서 함께 일하자구."

당은 인자한 사람이었다.
얼굴을 온통 뒤덮은 수염을 조용히 움직이며 알렉스에게 새 삶을 찾을 것을 권유해 왔다.

"난 마누라와 딸도 두 명 있지. 
 도라와 뮤리엘, 
 저기 파리를 봐. 
 행복하게 살 수 있다구."

당은 알렉스 어깨 위에 얹었던 손을 토닥거렸다.
중년이 지난 그는 알렉스 같은 젊은이가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랬다.

"알렉스, 
 내 말 들었어? 
 잘 살 수 있단 말이야."
"난 다리로 돌아갈 거야."
"너도 사람이야.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사는 거야.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자기의 몫을 찾아야 해.
 각자가 해야 할 일이 있다구. 알아?
 누구나 자기가 가야 할 삶이 있고, 또 그렇게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해.
 이젠 선택해야 된다구, 일아? 알렉스.
 너무 늦기 전에 잠깐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봐."

알렉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퐁네프 다리면 족했다.

모든 것이 풍족했고 넉넉했고 자유스러웠다.
아무런 방해와 간섭 없이 평화롭게 살 수가 있었다.
그 보금자리는 어려서부터 겪어온 떠돌이 생활 끝에 얻은 안식처였다.
떠돌이로 살아온 그 혼잡한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자기만의 세상이었다.
혼자만의 쉼터었다.
그곳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인가.
무엇하려 그 번잡스런 세상으로 가야 하는지, 그런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리로 돌아가야 해."

알렉스는 내일쯤은 이곳을 떠나 다리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방인 미셸
세느 강.
파리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세느 강의 거대한 몸뚱이에 어둠이 찾아들었다.
푸른 물결은 검게 채색되어 흐르지 않는 듯 조용하게 멈추어 있었다.

알렉스는 목발에 의지한 채 레알 가를 지나 퐁네프 다리로 향했다.
길은 거기에서 끝났다.
퐁네프 다리의 입구는 거대한 철망으로 막혀져 있었다.
철망 앞에는 '위험'이라는 표지판이 험악하게 달라붙어 행인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공사 중이었다.
이미 5백 년이나 지난 이 아름다운 다리는 
낡을 대로 낡아 보수 공사가 필요했으므로 시 당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다리를 폐쇄한 뒤, 
건축 자재를 다리 위에 쌓아두고 있었다.

하지만 왠일인지 공사는 중단되고,
다리 위에는 어수선한 골재와 장비만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나는 떠나지 않아." 

알렉스는 목발을 들어 힘껏 철조망 안쪽으로 던졌다.
'철커덩' 알루미늄 목발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나 그 정도 소리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질 사람이 없었다.
길이 막히게 되자 이 근방에는 이미 사람의 인적이 닿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다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요즘처럼 콘크리트로 후다닥 만든 다리가 아니라 하나하나 돌을 깎아서 쌓아 세운 석교였다.
지금은 버팀목과 지주로 교각마다 부축을 받고 있지만,
알랙스는 누구보다 이 다리를 사랑했다.
돌 하나하나의 깨어진 모양을 다 기억할 정도였다.

모든 게 며칠 전과 변함이 없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알렉스만의 안식처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한스였다.
알렉스보다 두 배는 나이를 더 먹었음직한 한스는 왼쪽 두 번째 베란다를 거처로 쓰고 있었다.
베란다라는 것은 일종의 전망대였다.
다리 곳곳에 두 평 남짓한 공간을 마치 아파트의 베란다 모양으로 쉴 곳을 마련해 놓고 
거기에 빙 둘러 벤치가 만들어져 있었다.
알렉스는 오른쪽 네번째 베란다를 쓰고 있었다.
한스는 담요를 덮어쓴 채 잠들어 있었다.

"한스!
 나야, 알렉스"

알렉스는 한스를 불렀다.
한스가 비실비실 일어난 자리에는 돌덩이의 냉기를 막기 위해 두터운 담요가 깔려 있었다.
한스는 아직도 잠이 덜 가신 듯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한스가 그의 발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
"다리가 부러졌어. 깁스했어"
"왜?"
"쓰러졌어."  알렉스는 엉거주춤 서서 말했다.
"수면제 좀 줘."

한스는 말없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약이 나오지 않자 벤치 밑에 있는 공구 상자를 끄집어냈다.
뚜껑을 열자 반짝거리는 유리 앰풀이 가득 들어 차 있었다.

"경찰이 널 데려갔니?"
"응."
"낭테르 병원에 갔었니?"
"응"  한스는 앰풀을 건네주고 약 상자를 닫았다.
"바보 같은 놈. 가서 자라."

알렉스는 앰풀을 받아들고 돌아섰다.
한스가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참, 
 어떤 놈이 저쪽에서 자고 있는데 어떤 놈인지 꼴도 보기 싫어. 
 내일 아침에 일어나 쫓아버려아겠어."

한스는 다시 드러누워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의 베렌다에는 수없이 많은 것이 널려 있었다.
필요한 것은 거의 다 있었고, 또 그는 아는 것도 많았다.
그러나 알렉스가 얻고 싶은 것은 잠자는 약 외에는 없었다.

알렉스는 앰플의 끝을 톡 부러뜨린 뒤 액체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과연 맞은편 세번째 베란다에 웬 녀석이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눈에 잘 띄는 햐안색 타월이었다.  
알렉스는 그의 곁으로 가 보았다.

그런데 모포 한가운데가 꿈틀거렸다.
알렉스가 다가가서 모포를 젖혀보았다.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알렉스를 마주 보았다.
고양이 아래에는 두 개의 가느다란 종아리가 햐얗게 드러났다.
여자용 샌들이 발 옆에 벗겨져 있었다. 

알렉스는 모포를 다시 덮고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옷가지로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틀림없는 여자였다.
벤치 옆에는 큰 화판이 놓여 있었다.
알렉스는 화판을 펼쳐보았다. 
모두가 사람 얼굴이었다.

그림을 넘겨보던 알렉스는 깜짝 놀랐다. 
그중 한 장이 바로 자기었던 것이다.
빡빡머리의 남자, 
그림 속의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모습이었다.
땅바닥에 드러누운 자세였다. 
흡사 총을 맞아 죽은 모습 같았다.
이마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알렉스는 자기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굵은 붓으로 간단하게 그린 그림이었지만, 
그 그림 속의 인물이 자기와 닮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가 있었다.
알렉스는 후다닥 화판을 덮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알렉스는 비틀거리며 바로 옆 베란다, 자기 자리로 향했다.
빨리 걸으면서도 고개는 연신 그녀 쪽을 향했다.

벤치에는 코트가 그대로 놓여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입었다.
그림과 그 그림을 그린 여자가 궁금했지만 이미 약기운이 몸에 퍼져 있었다.
그는 앉은 채 잠이 들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해지고 자동차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아침이 되자 알렉스는 먼저 여자부터 확인했다.
여자는 아직도 깊이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알렉스는 서둘러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다리 아래 첫번째 교각 밑에는 수도꼭지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알렉스는 철문을 열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문은 공사가 시작되면서 인부들이 열어 두었다.

알렉스는 옷을 벗어 문에 걸쳐두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평소에는 잘 안하던 세수였지만 오늘은 목까지 꼼꼼하게 씻었다.
가슴팍까지 물을 적셔 닦아냈다.

다리 위로 올라오니 벌써 햇빛이 들기 시작했다.
멀리 몽마르트르 언덕과 노트르담 성당이 거무스름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곳에선 언제나 파리 시내가 잘 보였다.

철망문을 넘어 나서지 않는 한 세상은 언제나 철망문 저쪽에 있는 다른 세계였다.
알렉스는 그런 여유를 즐기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발아래 펼쳐져 있는 세느 강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알렉스가 다리 난간에 걸터앉아 발을 흔들거리며 강물을 바라보는 모습은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는 흔한 광경이었다. 

며칠 만에 찾아온 이 눈에 익은 풍경을 다시 눈에 담고 있는 동안,
가까운 거리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한스가 일어났던 것이다.

한스는 꼳바로 맞은편 여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혼지 말을 중얼거리며 빠르게 걸었다.
그가 화났을 떄의 모습이었다.
그의 발에 깡통이 차였다.
그는 여자에게 다가가면서 곧장 소리를 질렀다.

"야, 일어나."

한스는 다짜고짜 여자의 이불을 걷어들었다.

"일어나란 말야. 어서!"

한스는 잠시 멈칫했다.
여자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스는 들고 있던 이불을 냅다 그녀의 얼굴로 던지며 더 크게 소리쳤다.

"보따리 들고 꺼져, 어서!"

여자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눈으로 한스를 쳐다보다가,
그의 험악한 인상에 놀랐는지 조용히 짐을 쌌다.
짐이라야 이불과 고양이를 보따리에 담는 것이 전부였다.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마, 절대로."

한스는 계속 재촉했다.
짐을 들고 나가는 여자의 등을 떼밀었다.

"알았어?
 다신 오지 마."

여자는 묵묵히 한스의 다짐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바로 곁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는 한스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그가 자리로 돌아가자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봐, 저....,"

알렉스는 여자를 불렀다.
그러나 여자는 못 들었는지, 못 들은 체하는 건지 말없이 걷기만 했다.

"미스...., "

마땅히 부를 말이 없자 알렉스는 절뚝거리며 그녀의 뒤로 바짝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잽싸게 그녀의 화판 끈을 살짝 풀어버렸다.
화판이 벌어지면서 그림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황급히 그림을 주워모았다.
그녀가 자기 얼굴 그림을 막 집어들었을 때, 알렉스는 그 그림을 지팡이로 가리켰다.

"이건 나야."
"그래"  그녀는 화판을 수습해서 일어났다.
"널 기억해."

여자는 알렉스보다 키가 조금컸다.
여자가 큰 것이 아니라 알렉스가 워낙 작았다.
작지만 다부진 알렉스와 크지만 허약해 보이는 여자와는 여러 모로 대조적이었다.
알렉스가 물었다.

"어디서 날 보았지?"
"난 네가 차에 치었을 때 죽은 줄 알았어."
"그 그림, 내게 줘."  여자는 잠시 알렉스를 바라보다가 이내 돌아섰다.
"안 돼."

알렉스는 멀거니 서서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녀는 터덜터덜 다리 끝으로 걷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돌아서서 물었다.

"정말 갖고 싶어?"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엉뚱한 조건을 제시했다.

"그럼 내 모델이 되어 줘.
 대신 네게 그림을 주겠어."  여자는 손가락으로 반대편 다리 밑을 가리켰다.

"지금 당장 저기서."

알렉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모델이 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었다.
세느 강 주변에는 언제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생클루 공원에는 더 많았다.
그들은 돈을 받고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돈을 주면서 그림을 주기도 했다.
돈을 받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그림을 모델에게 주었으며, 
그림 그리고 나서 모델에게 돈을 주는 사람들은 그림을 자기가 가져갔다.

여자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잠자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왼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다.
끈으로 매다는 임시용 안대가 아니었다.
애꾸들이 자주 쓰는 반창고 같은 것이었다.
안구가 아예 없거나 심한 흉터가 있을 때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여자는 그림을 굉장히 빨리 그렸다.
마치 굉장히 바쁜 사람처럼 손놀림을 빨리 했다.

여자는 약간 비스듬히 앉아 있었으므로 알렉스는 여자의 얼굴을 십 분의 일쯤은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아주 엄숙했으며 또 조용했다.
화가 나서 마구 낙서하는 사람 같았다.
때떄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알렉스를 잠깐씩 쳐다보았다.

"나를 보지 마." 여자는 고개를 왼쪽으로 꺾으면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을 보고 있으라구."

갑자기 사각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그녀는 눈을 자꾸 위로 치뜨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고통을 털어내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앞으로 기우는 듯하면서 강물 쪽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화판 위에 얹혀 있던 켄트지가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강물 위로 날아갔다.

알렉스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여자는 강물 바로 앞에 머리를 늘어뜨리고 누워 있었다.
그는 여자의 얼굴 옆에 무릎을 끓고 앉아 여자를 살펴보았다.
여자는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알렉스를 보더니 머리를 약간 들어 올리면서 손을 뻗으려 했다.

"줄리앙.....,"
"난 줄리앙이 아냐."
"줄리앙, 줄리앙......,"

그녀는 다시 고개를 늘어뜨리고 말았다.
알렉스는 그녀가 죽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잠자고 있는 것처럼 평온하게 누워 있었다.

알렉스는 여자의 얼굴 위로 자기의 고개를 바짝 수그려보았다.
그리고는 자기도 이렇게 고통스럽게 정신을 잃은 적이 많다는 것을 생각했다.
알렉스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으로 가져갔다.
안대에 가려진 그녀의 눈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알렉스는 천천히 그녀의 왼쪽 눈에 붙어 있는 안대를 떼어냈다.
안대가 붙어 있던 자리에 안대의 모양대로 하얀 살이 드러났다.
햇빛을 못 받아 그렇게 되었을 터였다.

알렉스는 엄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 올려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생각과 달리 멀쩡했다.
눈꺼풀 속에 감춰져 있던 그녀의 왼쪽 눈은 오른쪽 눈과 마찬가지로 까만색의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다시 안대를 전처럼 붙여 놓았다.

알렉스의 눈에 이번에는 여자의 화구 상자가 보였다.
뚜껑을 열자 맨 위에 권총이 한 자루 놓여 있었다.
권총 밑에는 자질구레한 물감과 콘테, 연필, 붓 따위가 있었고,
반으로 접혀진 편지가 놓여 있었다.

나의 미셸
어떻게 사는지 어디에 있는지 걱정된다.
네가 그린 줄리앙의 초상화는 여기에 있어
매일 저녁 그 그림을 보면서 널 생각해
연락 좀 줘.
너를 사랑하는 마리옹으로부터.

겉봉에는 '파리 75001 루른느 우체국 내內 미셸 스탈렌' 이라고 수신자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뒷면의 발신자는 '생클로드 92210 채즈 가 8번지 마리옹 발레'라고 써 있었다.

알렉스는 여자를 흔들어 보았다.
여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자의 얼굴은 평온했다.
알렉스는 여자를 들어 미루나무 밑 그늘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여자의 짐을 챙겨서 그녀의 옆에 갖다두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알랙스도 꼼짝하지 않고 나무등걸에 기대어 앉아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따금 그녀의 얼굴 위에 고개를 수그리고 그녀의 숨소리를 들었다.

오후가 되자 몇몇 사람들이 고수부지로 내려왔다.
그들은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음식 바구니에서 음식을 꺼냈다.
그들과 함께 온 강아지 한 마리가 여자의 보따리 가까이 걸어왔다.
강아지가 보따리에다 대고 으르렁거리자 보따리 속의 고양이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음식을 먹던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알렉스와 여자의 지저분한 옷차림을 흩어보더니 서둘러 돗자리를 거두었다.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서 알렉스는 여자를 들쳐업었다.
목에는 여자의 보따리를 걸고 한손에 화판과 화구통을 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손으로 목발을 짚고 겨우겨우 다리 위로 올라왔다.

벌써 해가 기울고 있었다. 
청명하던 파리의 하늘에 조금씩 색깔이 물들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여자를 자기의 자리에 뉘어 놓고 모포를 꺼내 덮어주었다.
고양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보따리 입구를 묶어두었다.  (p064)
※ 이 글은 <퐁네프의 연인들>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레오 카락스  - 퐁네프의 연인들
역자 - 정덕성
대흥 - 1992. 03. 0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