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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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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 카락스-퐁네프의 연인들5/불면의 밤

by 탄천사랑 2007. 4. 30.

「레오 카락스-퐁네프의 연인들」

 


불면의 밤
미셸과 알렉스는 강변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바람이 싸늘했다.
옷이 흠뻑 젖어 있었으므로 한기가 느껴졌다.

미셸은 말이 없었다.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지만, 할 얘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자기 때문에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화를 풀어주는 방법도 그는 알지 못했다.

알렉스는 잠자코 미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따끔씩 자동차가 지나다녔다.
시간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 강변도로는 비교적 한적했다.

조그만 강변 공원이 나타났다.  
미셸은 나무 벤치에 가 앉았다.
그녀는 추워서 오돌오돌 떨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그녀에게 벗어 줄 만한 아무 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는 짙은 색의 런닝서츠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고, 그나마 역시 흠뻑 젖어 있었다.

맞은편 벤치에는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 하나가 비스듬히 등을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는 고급 술병을 들고 있었는데, 아마도 오늘은 많이 얻어 마셨던 모양이었다.
술이 목까지 차올랐는지 고개를 아래로 꺾고 입을 비죽이 내밀어 잔뜩 불만인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알렉스는 깁스한 발을 탁탁 굴렀다.
바닥에 부딪칠 때마다 석고 조각이 부수어져 떨어졌다.
특히 발바닥 부근이 너덜거려서 발을 디딜 때면 석고 조각이 몹시 거슬렸다. 
알렉스는 몇 번 더 내리친 뒤, 주머니칼을 꺼내 석고 속에 감겨 있던 롤러 붕대를 잘라냈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것을 마치 죽은 사람의 발처럼 창백해 보였다.

미셸은 그의 바로 곁에 앉아 있었지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다만 어둠 속의 한 곳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아니."
"조금만 가면 돼?"
"응"

미셸이 먼저 일어섰다.
그리고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양손으로 자기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강바람이 불어왔으나 걸을 때는 그다지 춥지 않았다.
그러나 미셸은 왠지 더욱 추워 보였다.
알렉스는 재빨리 노인의 구두를 한 짝 벗겨 신고 미셸의 뒤를 따라갔다.


한스는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었다.
퐁네프 다리는 언제 그런 소란이 있었냐는 듯, 여전히 두려울 정도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세느 강에 걸쳐진 나머지 아홉개의 다리가 모두 아름다운 불빛으로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장식하고 있었다.

미셸은 아까 술 마시던 자리로 가서 나뒹굴고 있던 가방을 찾아들었다.
알렉스는 재빨리 자기의 벤치에서 오버코트를 가져다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미셸이 말없이 코트 깃을 여몄다.

미셸의 벤치에는 고양이가 몸을 조그맣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괜찮니? 루이지안느."

미셸이 가볍게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셸은 털썩 고양이 옆에 앉아 큰 타월로 머리를 비볐다.
그녀가 담요로 쓰는 하얀 타올이었다.
그녀는 몇 번 머릿결을 비벼보다가 이내 손을 떨어뜨렸다.
머리를 말릴 만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손을 들어올리기 싫었다.

"머리 좀 말려 줘."

그녀는 피곤한 눈으로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옆에 서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알렉스는 성큼 타월을 받아들었다.
사실 미셸은 그냥 그만큼 피곤하다는 말을 대신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수건을 든 알렉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머리를 말려 주었다.
그의 손길에는 모든 정성이 들어 있었다.

"네가 여기 있어서 좋아."

알렉스는 처음으로 자기 기분을 말했다.
그리고 지금의 기분 같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젖은 몸에서 옅게 풍겨 나오는 살 냄새가 좋았다.
그러나 미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만 자야겠어."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밴치에 드러누워 버렸다.
알렉스는 그녀가 자기의 얘기를 들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관없었다.

"젖은 머리로 잠자지 마."

그는 타월을 들고 다시 미셸의 머리맡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곤 그녀의 휴식에 방해되지 않도록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감싸서 손바닥으로 누르며 물기를 닦아냈다.
그의 손길은 너무나 부드러웠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여기....,"

그녀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밴치 밑을 더듬더니 가방 속에서 권총을 집어들었다.

"이걸 치워버려."

그녀는 별안간 총을 알렉스에게 넘겨준 뒤 다시 밴치에 드러누웠다.

"이 악몽을 네가 가져."

그녀는 보기도 싫다는 듯 팔등으로 눈을 가리고 잠자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알렉스는 권총을 받아 허리춤에 쑤셔넣었다.

"던져 버려. 강물에."

꿈결처럼 미셸이 다시 말했다.
알렉스는 노인의 구두를 벗어서 강물 속에 던져넣었다.
잠시 후 '풍덩...., 하고 구두가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됐어."

미셸은 크게 한번 숨을 몰아쉬었다.
갑자기 알랙스가 손을 멈추고 일어섰다.

"기다려, 다시 돌아오겠어."

알렉스는 곧장 한스에게로 걸어갔다.
그는 얼굴에 얇은 수건을 덮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 역시 오늘 활동량이 많았을 것이다.

"한스"  알렉스는 한스를 깨웠다.
"일어나 한스. 
 나, 자야겠어."

알렉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다친 발에 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불에 그을렸던 얼굴과 가슴이 심하게 근질거리고 화끈거렸다.
차가운 강물에 젖어서 오한도 들었고, 술을 마구 퍼마셔서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귀에서는 '찌잉....,'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미셸 앞에서는 참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거친 숨을 쉬었다.

"빨리 일어나, 한스.
 약을 줘, 빨리."

한스는 모로 누운 자세로 얼굴의 수건을 끄집어내렸다.
온통 수염으로 덮인 그의 얼굴에서 움푹 타인 눈만 떠졌다.
그의 눈에 알렉스의 발이 보였다.
알렉스는 한쪽 발에만 구두를 신고 있었다.

"네 신발 한 짝을 볼 수가 없군.
 어디로 갔지?"
"빨리 약을 줘, 약이 필요해."
"안 돼 너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둘 다 같이 먹으면 안 돼."
"줘, 잠을 자야 된단 말이야!"
 한스는 수건을 덮어버렸다.
알렉스는 그의 수건에다 대고 더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한스, 일어나. 약을 줘."

그러나 한스의 얼굴에 덮였던 수건은 다시 움직일 줄 몰랐다.
그 수건은 잠깐 동안 가볍게 꿈툴거렸을 뿐이었다.

"안 돼."
"한스, 한스. 일어나 제발 약을 줘!"

그러나 한스는 더 이상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화가 나서 돌아섰다.
그리고 절뚝거리면서 미셸에게 달려갔다.
그녀에게도 약을 가져가지 못했다.
알렉스는 그녀에게도 약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셸은 잠들어 있었다.
알렉스는 잠시 동안 그대로 서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이따금씩 '끄응.....'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으나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알렉스는 미셸의 흰 타월을 몸에 두르고 벤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는 몸이 떨리는 것보다,
가슴팍이 화끈거리는 것보다,
그녀가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가 줄리앙만을 생각하듯이 그도 그녀만을 생각하고 싶었다.
그녀만 따라다니고 싶었고, 그녀가 있는 곳에만 같이 있고 싶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줄리앙만을 찾아나섰듯이 ,
그리고 마리옹의 노트에 씌어 있던, 그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처럼.....,

알렉스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미셸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고, 자기의 옷을 걸쳐 덮고 자고 있었다.
알렉스는 미셸의 화구통을 열렸다.
연필을 찿아냈다.
그러나 그것은 손바닥에 써 보니 잘 쓰여지지가 않았다.
검정색 막대을 집어들었다.
콘테였다.
그는 지금의 마음처럼 굵고 뚜렷하게 써졌다.

알렉스는 미셸의 가방에서 조그만 스케치북을 찾아내어 무릎 위에 펼쳤다.
그리고 크고 뚜럿한 글씨를 힘을 주어 써나갔다.

   내일 아침,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늘이 하얗다'라고 말하면
   '구름은 검다'라고 말해 줘.
   그러면 둘은 사랑하는 거야.

알렉스는 조심스럽게 스키치북을 미셸의 옆에 세워놓앗다.
그녀는 한층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알렉스의 손이 잠시 그녀의 얼굴 위에서 멈칫거렸다.

알렉스는 미셸의 벤치에서 일어나 자기 벤치로 갔다.
그러나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나머지 구두 한 짝을 찾아 허연 발목에 끼우고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미셸이 목욕할 때 쓰는 플라스틱 음료수병이 보였다.
물이 반쯤 들어 있던 그 병은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알렉스는 타월과 런닝셔츠를 벗어 자갈더미 위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자갈 하나를 집어 멀리 내던졌다.

알렉스는 다시 몇 개의 자갈을 더 던졌다.
있는 힘을 다해 멀리로 던져보고, 손목으로 '툭'가까이 떨어뜨리기도 하였다.
알렉스는 미셸이 있는 세번째 배란다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불을 꺼놓았으므로 다른 베란다와 달리 유독 컴컴했다.
알렉스는 혹시 미셸이 저기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스래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그럴 리는 없는 일이었다.

알렉스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은 텅 비어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고,
또 무엇인가가 꽉 들어 차 있는 것 같았다.

알렉스는 돌 하나를 다시 강물에 집어넣었다.
그때 한스가 뒤로 다가왔다.  
그는 수면제 앰플을 하나 들고 있었다.

"올라가, 
 잠을 청해 봐." 

알렉스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가슴 속이 무언가에 짓눌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잠이 안 와"
"수면제 줄까? 가져 왔어."
"너무 늦었어."  

알렉스는 다시 하나 돌맹이를 던졌다.
한스는 말없이 돌아섰다.
그는 알렉스가 무언가에 지독한 열병을 앓고 있다고 느꼈지만 모른 체하기로 했다.
어차피 저절로 사라질 것이었다.

알렉스는 갑자기 그에게 무엇인가 말하고 싶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자기가 걱정되어 잠자지 않고 내려와 주었던 것이다.
알렉스의 입에서 참고 있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그녀는 날 사랑하지 않아."

한스는 멈칫했다.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생각보다 심각해 보였다.

"뭐라구? 
 그녀가 널 어쩐다구?"  한스는 뒤돌아서서 그에게 되물었다.
"그녀는, 그녀는---, "

알렉스는 그 말을 다시 반복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말은 그렇게 쉽게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너, 지금 사랑이라고 했니? 사랑을 원해?" 

한스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어이가 없어했다.

"네 주제에? 
 다른 사람들처럼? 그 부드럽고 달콤한?"

한스는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위를 둘러봐.
 이 다 부숴진 퐁네프 다리를 돌아보란 말이야.
 여긴, 어디에도, 사랑이란 건 없어.
 너에겐 그런 게 없어. 
 사랑이란 바람 부는 다리가 아니라 침실과 침대가 필요한 거야.
 네겐 그런 인생은 없어."

알렉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스의 말은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사랑이 없다는 한스의 말은 듣고 싶지가 않았다.
미셸은 자기를 떠난 남자 줄리앙만을 찾아다녔다.
나 역시 언제까지나 그녀가 있는 곳에 함께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잊어, 
 잊어버려."  한스가 말했다.

그러나 알렉스의 귀에는 더 이상 그의 소리가, 
등 뒤에서 말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알렉스는 오직 그의 앞에서 환하게 불을 켜고 있는 클럽하우스의 아름다운 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잔 여기 더 이상 있어선 안 돼."

한스는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불이 꺼지고 난간이 부수어진 베란다였다.
그곳엔 틀림없이 미셸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여잘 가게 만들겠어."

한스는 중얼거리며 다리 위로 올라갔다.
알렉스는 멍청히 다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다리 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알렉스는 계속 주저앉아 있었다.
흡사 퐁네프 다리의 오래된 돌덩이 중 하나인 것처럼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이따금씩 강물 속에 돌을 던져넣었다.
돌이 물 속에 빠지면서 나는 소리가 알렉스에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여자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도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마리옹의 노트 중 한 구절을 밤새도록 중얼거리고 있었다.  (p126)
※ 이 글은 <퐁네프의 연인들>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레오 카락스  - 퐁네프의 연인들
역자 - 정덕성
대흥 - 1992. 03.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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