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카락스-퐁네프의 연인들」
한스의 비밀
푸른 물안개가 차올랐다.
침묵으로 흐르던 수만 년 세느 강의 흐름이 조용히 물안개를 피어올리며 몸을 숨겼다.
강기슭을 찰싹이는 조용한 물결 소리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느 사이엔가 다리 앞 클럽하우스의 불빛이 꺼졌다.
강가에 연이어 주황색의 불을 밝히고 있던 가로등도 그 빛이 점점 엷어져 갔다.
새벽이 가까이 다가와서 파리의 하늘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퐁네프의 교각 밑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의 그 자리, 맨 끝 교각이었다.
그는 밤새도록 거기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알렉스의 건강한 왼쪽 팔은 이따그씩 왼편의 자갈을 집어들었고,
오른쪽 팔은 그것을 받아 강물로 던졌다.
어디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을 맞이하는 세소리도 들려왔고,
변함없이 자동차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파리의 아침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벌떡 일어나서 타월을 집어들었다.
그는 한걸음에 다리 위로 뛰어올랐다.
지팡이가 없었으므로 그의 다리가 심하게 절뚝거렸다.
미셸은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난간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자고 있었다.
알렉스의 눈에 그녀의 스케치북이 들어왔다.
그녀의 벌어진 가방 속에서 비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의 기척에 미셸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무척 피곤한 기색을 하고 있었다.
"날 내버려 둬. 힘이 없어."
아침 햇살이 다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안개가 피어 오르는 날은 늘 햇살이 유난했다.
그녀는 얼굴에 비쳐드는 햇빛을 피해 다시 고개를 난간 쪽으로 돌렸다.
"목이 타."
그녀는 코트 깃으로 얼굴을 가렸다.
햇살을 받은 다리 위 가로등이 한꺼번에 켜졌다.
알렉스는 다리 위를 절뚝거리며 다녔다.
루이지안느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시멘트더미의 속을 해집어 보기도 했고, 무너진 난간 돌더미 뒤로 돌아가 보기도 했다.
그는 또 파이프로 엮어 놓은 작업대 위에도 올라가 보았다.
고양이는 거기에도 없었다.
작업대 위에서는 다리가 한눈에 보였다.
미셸은 여전히 벤치에서 자고 있었고, 한스는 벌써 나갔는지 그의 벤치는 비어있었다.
알렉스는 철망 밖에 있는 쓰레기통에서 루이지안느를 발견하고 작업대를 내려갔다.
그는 철망을 넘어 고양이를 안쪽으로 몰아넣었다.
고양이는 건포 조각을 물고 쏜살같이 주인에게로 내달렸다.
알렉스는 철망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시내로 나왔다.
알렉스는 무턱대고 거리를 쏘다녔다.
인파를 따라다니기도 했고, 그들을 거슬러 걷기도 했다.
알렉스는 일회용 면도기를 하나 주웠다.
그는 그것을 들고 공원으로 갔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벤치 한쪽 귀퉁이에 앉아 마른 면도를 했다.
면도가 끝나자 알렉스는 다시 무료해졌다.
그는 면도기를 던지고 멍청히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평상시보다 사람의 수는 많았지만 거리는 전과 다름없었다.
알렉스는 조바심이 났다.
왠지 모르게 퐁네프 다리가 걱정이 되였다.
미셸도 걱정이 되었으며, 그녀의 고양이 루이지안느도, 한스도 걱정이 되었다.
괜히 그들이 눈 앞에 어른거려 왔고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알렉스는 다리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서 해야 할 일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불춤 공연을 위해서 불방망이를 만들어야 했다.
알렉스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미셸은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붓을 떨어뜨린 채 눈을 감았다.
눈앞에는 스멀거리는 벌레떼가 가득한 것 같았다.
그것들은 눈꺼플 속으로 뚫고 들어온 햇빛을 받아 주황색으로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참으려 했었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앞에 세워줘 있던 이젤을 발로 걷어찼다.
세워든 이잴이 넘어지면서 이젤 위에 걸쳐 있던 화판이 나뒹굴어졌다.
그녀가 그리고 있던 그림은 넘어진 화판 위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누워버렸다.
그녀는 눈을 떠 보았다.
켄트지 위에서 알렉스가 불을 뿜고 있었다.
알렉스는 화신火神처럼 강인해 보였으며 그의 눈은 이글이글 어둠을 뚫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은,
용광로처럼 뜨거워야 할 그 불길은,
차마 불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온도가 전혀 없어 보였다.
"이게 아니야. 이런 게 아니야."
그녀는 물감을 풀어놓은 팔레트를 발로 차버렸다.
화구통도 들어서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통 속에 들어 있던 붓과 나니프와 기름병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어졌다.
팔레트에 풀려 있던 물감들은 긴 점선을 이으며 돌바닥 위에 뿌려졌다.
그녀는 화판으로 다가가 무릎을 끓었다.
빈약한 불을 품고 있는 알렉스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가 불쌍해 보였다.
그의 박박머리는 화력을 잃은 늙은 용의 머리처럼 보였다.
미셸은 그런 그가 불쌍했다.
그리고 자기의 눈이 혐오스러워졌다.
그녀는 눈이 멀기 전에 자기가 본 모든 것을 그려두고 싶었다.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과,
아름다운 경치와 즐거웠던 추억을 기억해서 그림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림이야 어차피 다신 볼 수 없겠지만,
그림으로 그리면서 붓자국 하나하나와 색깔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욕심을 최대한 자제했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자기의 삻에 중요했거나 의미 있는 기억만을 선택하려 했다.
마지막으로 줄리앙을 한번 더 보고 싶었으며,
아마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될 알렉스를 기억해 새겨두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선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곧 통증이 왔고, 그것은 벌레처럼 그녀의 시신경을 갉아먹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밝은 태양 아래에서조차 너무 강한 햇빛에 그녀는 고통을 받아야 했다.
미셸은 모든 것에 더 이상의 희망을 찾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참고 있던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그녀는 지금 자기가 있는 이 낡은 다리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지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자기는 지금 그 종착지에서 울고 있다고 믿었다.
한스가 다가왔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며 빠른 걸음걸이로 똑바로 미셸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은 굳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는 울고 있는 여자의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한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스의 얼굴 뒤에는 태양이 있었고,
또 그녀의 한쪽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으므로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이제 그만 가."
한스가 말했다.
미셸은 목덜미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눌러 삼켰다.
"당신이 아는 말이라곤 가란 말밖에 없어요?"
미셸은 짜증이 났다.
그 완고한 털북숭이 노인에게는 대꾸조차 하기 싫었다.
미셸은 손등으로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한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난, 내가 여기 있고 싶으면 여기 있을 권리가 있어요.
내가 왜 가야 해요?
어디로.....,"
그녀는 갑자기 왈칵 눈물이 치솟았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자신의 처지가 생각나자 슬픔이 복받쳐 올랐기 때문이었다.
한스는 어쩌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내 눈은 이제 더 이상...., 나는, 이제 눈이 멀어요."
한스는 여자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했다.
그는 좋은 말로 그녀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스스로의 슬픔에 휩싸여 진정되지를 않았다.
그녀는 울먹거렸다.
"그림을 그리려 하면... 내 눈은 마치 달팽이처럼 내 머리에서 기어나가려 해요.
나는 이제 곧 눈이..... 이제 나는 아무 박물관에도 갈 수가 없겠죠.
루브르 박물관에서 램브란트 그림을 보고 싶어요.
내 눈이 멀기 전에, 다시 한 번....,"
미셸은 흐느꼈다.
잠시 감은 그녀의 눈에 알렉스가 불춤을 추는 모습이 떠올랐다.
"알겠어요?
조금만 무리해도 내 눈두덩은 알렉스의 불처럼 뜨거워요.
지옥처럼.
난 형광등 아래에서는 아예 눈이 아파 그림도 못 봐요.
이제, 난 박물관에도 갈 수가 없단 말예요."
그녀는 물감 든 손으로 자기의 남은 한쪽 눈을 가리켰다.
"들어 봐, 만약 네가 원한다면......,"
한스는 미셸의 기분을 맞추어 주려고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녀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한스를 밀었다.
"제발 좀 저리 가.
내버려 두란 말예요."
"들어 봐."
한스도 맞받아 소릴 질렸다.
그는 그러나 숨을 가다듬고 그녀 옆에 앉았다.
"자, 이걸 봐."
한스는 오버코트 주머니에서 쇠조각을 한 뭉치 꺼냈다.
그것은 서로 고리에 엮여 있는 열쇠꾸러미였다.
그리고 다른 주머니에서 또 그만한 꾸러미가 하나 더 나왔다.
한스는 그 두개의 열쇠뭉치를 양 손에 들고 그녀의 눈 앞에 디밀었다.
"자, 이걸 보라구."
미셸이 고개를 돌렸다.
열쇠들은 거의가 거무튀튀한 색이어서 매우 낡아 보였다.
하지만 그가 늘 오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만지락거렸는지 반짝반짝 윤이 났다.
그는 여름에도 늘 이불 같은 오버코트를 걸치고 다녔다.
"난, 30년 동안 문지기를 했어.
공장, 빌딩, 묘지.... 그 모든 곳의 열쇠야.
들어 봐.
언젠가 너는 나와 함께 박물관에 갈 수가 있어.
나는 전에 그곳 경비도 했었어.
이 중 하나가 그 열쇠야."
미셸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왠일인지 그는 자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겠지?
너는 언제든 그 그림을 볼 수가 있어.
촛불을 켜고 말야."
한스는 열쇠꾸러미에서 몇 개를 골라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미셸은 눈가에 묻어 있던 물기를 닦았다.
"당신은 언제나 혼자였나요?"
"아니, 아내와 딸이 있었지."
한스는 열쇠다발을 도로 양 주머니에 나누어 넣었다.
"이렇게 추하진 않았다구.
그들은 날 치즈라고 불렀지."
"냄새 때문에?"
"아니. 난 능숙했고 노련했거든."
한스는 미셸을 보며 웃었다.
그의 웃는 모습은 무척 다정해 보였다.
미셸도 그를 보며 웃었다.
"그녀의 이름은요?"
"프로랑스. 젊고 예뻤어."
한스는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는 기꺼이 가족의 예기를 꺼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몇 마리의 갈매기가 기웃거리고 있었다.
알렉스는 철망을 넘어오다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여자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한스가 미셸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멀리서도 무척 다정해 보였다.
알렉스는 그들에게로 다가가다가 멈칫했다.
한스의 손이 손가락을 편 채 그녀의 이마에서부터 머릿카락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 해서 여자의 헝클어진 앞머리칼을 빗겨 올려 주었다.
알렉스는 다리의 난간을 넘었다.
퐁네프 다리는 난간 바깥에도 사람이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알렉스는 허리를 숙이고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그들의 바로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로 등을 진 모양이었다.
한스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쓸었던 손을 펴 보였다.
가운데 손가락에 끼여 있는 그의 반지에 미셸의 머리카락이 몇 올 엉켜 있었다.
미셸이 그것을 집어 뽑아 주었다.
"행복했나요?"
"그녀는 내 인생을 아름답게 해 주었어.
우리는 술을 좋아했고 대화를 좋아했지.
그러나.... 어느 날 딸이 죽었어
아내는 그날부터 점점 이상해지더군.
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구.
물론 그녀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어.
하지만 딸의 죽음과 그 상처는 우리들 사이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었고,
그녀는 매일 눈물만 흘리곤 했어.
어느 날 그녀는 홀연히 집을 나갔어.
나는 오랫동안 그녀를 찾아 해맸지.
어느 날 그녀를 발견했어.
참, 그때의 모습이란....,"
한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마치 남의 얘기를 하는 것인 양 차분했고 침착했다.
"낮에는 길거리를 해맸고, 밤이면 기차역 같은 데서 머물렀어.
난 그녀와 함께 부딪치기도 하고 때론 그녀의 뒤를 쫓기도 했어.
그리고 그녀도 죽였어.
서른 세 살에,
하지만 얼굴은 오십쯤 돼 보였지.
난 그녀를 강물에 띄워 보냈어.
그녀가 좋아하던 큰 배에 실어서 말야."
한스는 갑자기 미셸을 돌아다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혼자서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었다.
"넌 그녀와 닮았어. 코만 빼놓고는."
"그 때문에 날 멀리하는 건가요?"
"내 얘길 들어
길거리의 여자들 생활이란 뻔해.
두들겨 맞고, 강간당하고, 결국은 폐인이 돼.
걸레처럼 말야.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그게 거리의 생활이야."
한스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는 미셸에게 나무라는 듯이 말을 했다.
"알렉스나 나의 생활이야.
너는 아니야.
넌 떠나야 해.
넌 네 생활을 찾아가."
알렉스도 한스의 커진 목소리에 뒤를 돌아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난간에 등을 붙인 채 위험스럽게 앉아, 발가락 사이로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너의 삶을....,"
한스의 마지막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의 귓속에 갇혀 떠나지 않았다.
'알렉스나 나의 생활이야. 넌 네 생활을 찾아가'
알렉스는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다리 밑으로 내려가 수도물을 마셨다.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자 쓰리던 속이 좀 나아졌다.
그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주머니를 만져 보았다.
아직 동전이 묵직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알렉스는 다리를 나와 술과 건포도가 박힌 빵도 하나 사 들었다.
한스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좀처럼 없던 일이었다.
그 역시 혼자의 가슴속에서 앓고 있었던 고통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나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벼워진 모양이었다.
그는 다리 난간에 양 어깨를 걸쳐 기대고 제법 또렷한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그의 눈은 맞바람을 받아 반쯤 감겨 있었다.
다리 위에서는 언제나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었다.
한스는 바람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의 헝크러진 머리카락과 무성한 수염이 늘 바람에 나부끼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다.
미셸은 한스와 얼마쯤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난간에 엉덩이를 걸치고 다리는 벤치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그녀의 발은 한스의 노랫가락에 맞추어 가볍게 흔들거렸다.
그녀는 한쪽 눈으로 한스와 반대쪽의 강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마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배가 다리 밑을 지나 떠내려갔으므로 이제 미셸의 시야에서도 그 배는 계속 떠내려갔다.
엔진을 켜지 않은 것처럼 그배는 천천히 강물의 흐름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다.
알렉스가 다가와 그녀의 발 밑에 빵과 술을 놓았다.
그리곤 한스처럼 난간 위에 팔짱을 얹고 시선을 멀리 강 상류 쪽으로 두었다.
푸른 하늘 사이사이에 붉은 노을이 들기 시작했다.
알렉스의 귀에는 다시 한번 그의 말소리가 웅얼거렸다.
'알렉스나 나의 생활이야. 넌 네 생활을 찾아가'
미셸이 바라보고 있는 쪽에서도 노을은 물들었다.
해는 구름 속에 숨어 있었으나 미셸이 있는 하늘 쪽으로 점점 기울어져 갔다.
노을이 들지 않은 곳은 다리 바로 위, 제일 높은 하늘이었다.
그곳은 여전히 푸른 빛깔이었으며, 아까보다는 그 색이 점차 짙어지고 있다.
조금만 더 짙어지면 이제 별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배가 맞으편 다리 뒤로 숨어 보이지 않자 미셸은 빵을 먹기 시작했다.
빵을 싸 왔던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려 그녀의 그림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림 위에 뿌려진 물감 덩어리에 붙어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멀건지 그것을 보고 있었으나 그녀의 입은 여전히 빵을 씹었다.
물감이 묻은 봉지가 다시 날아갔다.
그래도 그녀는 빵을 씹었다.
가끔씩 술병을 집어들고 목을 적시기도 했다.
마지막 남은 노을빛이 천천히 스러지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노을을 이제 다시는 똑바로 보지 못할지 모른다.
"하늘이 하얗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뭐라구?"
한스가 노래를 멈추고 물었다.
그는 자기에게 뭐라고 말한줄 알았다.
"하늘이 하얗다구요."
미셸은 숨을 깊이 내쉬며 또렸하게 말했다.
한스는 힐끗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노래를 계속 이었다.
어디까지 불렸는지 잊어버려 처음부터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뚫어지게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셸은 여전히 꺼져가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스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너무 뜻밖이었다.
'미셸이 나를 사랑하다니.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니.'
알렉스는 믿어지지 않았다.
"구름은 까맣다."
그는 대답을 했다.
원래 자기가 먼저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녀가 '나두.'라고 대답하기로 했던 것이다.
"뭐라구?" 한스가 다시 끼여들었다.
"구름이 까맣다구."
한스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곤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자기의 상념 속으로 재차 빠져들어 노래를 계속 즐겼다.
미셸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얼굴을 전혀 다듬지 않아 엉망이었으나 노을을 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젠 그녀에게 다가가도 될 것 같았다.
그녀가 허락했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그는 미셸이 자기를 사랑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건 환상인 줄 알았다.
그녀는 자기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스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이 하얗다'는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말을 꺼내기라도 할 만큼의 용기도 없었다.
알렉스는 여지껏 하늘이 하얗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하늘은 의외로 강물과 같이 파란색이었다.
강물보다는 하얗지만, 어찌됐건 파란색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그녀가 먼저 하얗다고 얘기해 주다니....,
알렉스는 너무 기쁜 나머지 여자를 만져보고 싶었다.
얼굴에 손을 대어 보고 싶었고, 예쁜 가슴과 하얀 다리도 만져보고 싶었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스의 노랫소리가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퍼져 갔다.
주저주저하고 있는 그를 미셸이 쳐다보았다.
그녀는 일어서서 다리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철망 반대쪽 고수부지에는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그곳은 약간 경사져 있었으며, 위쪽은 강변도로, 아래쪽은 곧바로 강물이었다.
미셸은 잔디밭 한복판에 앉았다.
알렉스가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날은 곧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리가 폐쇄되기 전까지만 해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놀다 가곤 했는데,
공사가 시작되면서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것도 낮뿐이지 폐쇄된 다리 밑을 한밤중에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등뒤로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다리 위에 서 있는 한스의 모습이 보였다.
알렉스는 남은 담배갑을 들고 왔다.
"왠 거야?"
"교각 돌 틈에 넣어두었어."
그녀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어둠 속에서 담배 연기는 거무스름하게 피어올랐다.
그러나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불빛을 비출 때는 하얗게 흩날렸다.
어둠이 깊어가면서 자동차 불빛도 그만큼 강해지자 미셸은 무척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헤드라이트가 지나갈 때마다 둘의 모습은 환하게 드러났으며,
또 눈이 부셔 고개를 돌려야 했던 것이다.
미셸은 불빛을 피해 드러누웠다.
알렉스도 드러누웠다.
그러나 그는 여자 쪽으로 몸을 돌려 세웠다.
자동차는 여전히 지나다녔지만 아까만큼은 불편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꼼짝하지 않고 자기의 여자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밤하늘을 향해 드러누운 채 담배 연기를 뿜고 있었다.
강바람이 좀 거새졌는지 누워 있었는데도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알렉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담배와 생각을 즐기고 있는 그녀를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 대신 잔디를 한 움큰 쥐었다.
그녀의 손이 알렉스의 손쪽으로 다가왔다.
잔디를 쥐고 있는 그의 손바닥 안으로 천천히 미끌어져 들어왔다.
알렉스는 손의 힘을 뺴서 그녀의 손이 잘 들어오도록 해 주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그녀의 체온이 자기의 손바닥에 전해졌다.
그는 자기의 손 안에 들어온 그녀를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에서도 힘이 느껴졌다.
알렉스는 용기를 내어 자기의 여자를 안았다.
그녀도 거부하지 않고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널어 여자의 몸을 쓸었다.
참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자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듯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아품이 자기 것처럼 전달되었다.
그녀가 아파하던 모습이 떠올라, 그는 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제 자기가 여자의 아품을 걷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므로 이제 자기는 언제까지나 여자와 함께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여자의 젓무덤이 그의 가슴에 뭉클하게 와 닿았다.
그는 등을 쓸던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만져보았다.
이제까지 느꼈던 어느 감촉보다도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알렉스는 미셸을 자기로부터 떼어내 똑바로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셔츠를 걷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하얀 젖가슴이 보였다.
아름다웠으며, 탐스럽게 느껴졌다.
알렉스는 두 손을 덮어 그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나를 미셸이라고 불러줘."
미셸은 처음으로 그에게 자기의 이름을 말했다.
물론 알렉스는 벌써부터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내 이름은 미셸이야."
그녀는 알렉스에게 몸을 맡겼다.
알렉스는 그녀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다.
이제 가져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졌다.
봉긋한 젖무덤과 털이 난 겨드랑이, 뼈가 만져지는 옆구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내 곁에 있어 줘. 알렉스. 그래 줘."
미셸은 눈을 감고 알렉스의 따스한 손을 느끼며 그에게 부탁했다.
이제 그녀에게 알렉스 외에 어떤 것도 없었다.
사랑하는 얘인과 친구와 부모와 집을 그는 잃었으며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마침내 그림까지 잃고 말았으며, 머지않아 아름다운 세상도 볼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남아 있는 것은 알렉스와 그의 보금자리, 퐁네프 다리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이렇게 비참한 모습의 자기를 반겨주는 유일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자기 인생의 종착지는 이곳일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눈이 멀고 난 뒤,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은 알렉스의 불춤과 그의 바람 부는 퐁네프 다리일 것이었다.
그리고 장님이 되어서도 그녀가 살 수 있는 곳은 역시 여기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그녀가 살던 곳과는 달리 그녀가 장님이라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여기는 알렉스나 한스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버려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니까.
자동차 불빛이 자주 지나다녔다.
그것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미셸과 알렉스의 상체를 하얗게 비추었다가
갑자기 사라져서 어둠과 적막을 남겨놓곤 했다.
미셸은 눈을 감고 있었다.
알렉스의 손길이 그녀의 생각을 어지럽혔다.
"알렉스."
그녀는 알렉스를 내려다보았다.
알렉스는 그녀의 바지를 벗겨내고 있었다.
그는 여자의 바지가 엉덩이 밑에서 끌어내려지지 않자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미셸의 젖무덤이 출렁거렸다.
"알렉스, 잠깐만.....,"
그녀는 손을 뻗어 알렉스의 팔을 잡았다.
낡은 팬티가 바지와 함께 내려가면서 그녀의 부끄러운 곳이 드러나 있었다.
알렉스는 털이 곱슬곱슬한 그녀의 사타구니를 코를 박고 들여다보다가 거기에 얼굴을 비볐다.
"오늘은 참아야 돼. 알렉스."
알렉스는 그녀의 말을 듣고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미셸은 자기의 가랑이 위에 엎드러 있는 남자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언젠가 말해줄께.
나에 대해서, 우리가 진정 사랑한다면 함께 잘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완 돼."
미셸은 살며시 그의 머리를 들었다.
그는 선선히 일어나 앉았다.
미셸은 그가 고마웠다.
"나중에."
"나중에."
알렉스는 그녀의 바지를 올려주고 셔츠를 내려주었다.
미셸은 오른손으로 눈을 가렸다.
자동차 불빛이 다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제 강한 빛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바람이 제법 심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우리 시내로 걸어갈까?"
알렉스는 주머니 속에 남아 있을 돈을 생각했다.
그녀는 자동차 불빛이 많은 이곳이 불편할 것이다.
불빛과 함꼐 자동차 소리가 지나자마자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스산했다.
미셸은 몸을 움츠렸다.
"모두 잠들었을 텐데."
그녀는 쉬고 싶었지만, 알렉스의 첫 제의를 승낙했다.
더욱이 오늘은 어쨌건 그에게 사랑을 확인한 날이었다.
"좋아, 가 보자."
시내는 잠들어 있었다.
가게의 불은 거의 꺼져 있었고, 거리엔 오가는 사람이 없어 한적한 밤기운이 내려앉아 있었다.
둘은 나란히 서서 빈 밤거리를 걸였다.
미셸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걸었고 알렉스는 땅을 쳐다보며 걸었다.
알렉스는 늘 사람 없는 곳을 선택했다.
미셸은 사람이 북적거리고 열기가 있을 때를 원했으나 알렉스는 반대였다.
축제의 밤에도 알렉스는 사람이 분주한 거리에 나서길 꺼려했다.
그래서 둘은, 둘만의 알렉스 식의 축제를 즐겼던 것이다.
오늘도 알렉스는 사람이 없는 밤중에 거리로 나오자고 했다.
알렉스는 사람이 없는 밤에서조차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기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다른 세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미셸은 고개 속이고 있는 알렉스의 어깨 위에 한쪽 팔을 얹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그의 한손을 잡았다.
그는 자기에게 준 미셸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는 그것을 쳐다보며 걸었다.
강을 벗어난 바람이 쓰레기 조각을 뒹글며 지나갔다.
미셸은 알렉스의 어깨를 꼬옥 감쌌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볼 게 없었으므로 무료해졌다.
그러나 알렉스는 이것이 좋았다.
레알가의 끄트머리쯤에 이르자 길은 더욱 어두워졌다.
건물이 없었으므로 가로등 불빛만이 그들을 밝혀주었다.
"저길 봐, 유원지야."
미셸이 갈림길 한쪽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환한 불빛이 허공을 밝히고 있었다.
"우리, 저기로 가 보자."
미셸이 알렉스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녀는 마구 달렸다.
알렉스도 그녀의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따라 달렸다.
유원지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 커다랗고 화려한 놀이 기구는 손님들도 별로 없이 저히들끼리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셸은 그 번쩍번쩍 빛을 내며 돌아가는 기구들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시력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알렉스가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들을 끄집어냈다.
동전 소리에 돌아다본 그녀는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두말할 것 없이 그를 잡아끌고 매표소로 달려갔다.
알렉스는 무척 망설였다.
그녀가 표를 두 장 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없었다.
커다란 원을 그리며 하늘 꼭대기로 올랐갔다가 내려오는 그 조그만 의자에 앉아 있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벌써 그녀는 알렉스를 자기의 옆에 앉혀 놓았고, 그의 벨트를 매어 주었다.
의자가 움직였다.
알렉스는 눈을 감았다.
미셸의 환호성을 질렀다.
점점 높이 올라갈수록 그녀의 환호성은 커지더니,
마침내 꼭대기까지 이르렀다가 내려오는 순간에는 비명소리로 바뀌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알렉스는 어지러워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미셸은 자꾸 그의 손을 떼어냈다.
수많은 불빛들이 뒤죽박죽 뒤섞여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미셸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미셸의 흥분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그녀는 유원지를 뒤흔드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발을 맞춰 경쾌하게 걸었다.
알렉스는 다리가 후들거려 더 심하게 절뚝이면서 그녀를 따라다녀야만 했다.
그녀는 남은 돈을 털어 담배 두 갑과 팝콘 한 봉지를 샀다.
"괜찮지?"
그녀는 알렉스의 손바닥 위에 하나 가득 팝콘을 쏟아부었다.
알렉스는 손바닥 위의 팝콘을 한 입 가득 물었다.
둘은 벤치에 앉아 팝콘을 나눠 먹었다.
"아, 참."
그녀가 생각난 듯 주머니를 뒤졌다.
그녀가 꺼낸 것은 알렉스의 유리 앰플이었다.
그녀에게 동전을 꺼내줄 떄 함께 휩쓸려 간 모양이었다.
"이게 뭐야?"
그녀는 그 조그많고 투명한 앰플을 불빛에 비춰 보았다.
"수면제."
"어디서 났어."
"한스. 그는 아주 많아."
"그래?"
"응, 그의 벤치 밑 박스 속에 가득 들어 있어.
그는 그 약외에도 많은 다른 것들을 갖고 있어."
그녀는 무언가 곰곰 생각했다.
그리곤 입 안의 팝콘을 꿀떡 삼켰다.
"이 약 먹으면 잠이 와?"
"응, 아주 빨리."
"자주 먹니?"
"그거 없인 잠을 잘 수가 없어."
"왜?"
"그냥."
미셸은 다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밝고 진지한 표정은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알렉스는 그녀가 늘 그렇게 밝은 얼굴로 자기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맛이 어떄? 무슨 맛이니?"
"특별한 맛은 없어. 냄새도 없구."
"그래?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우리 돈을 벌자."
알렉스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스의 약을 내다 팔자는 소리인가?
"너 돈이 없지?"
"응."
"이걸루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무엇이 즐거운지 다시 까르르 웃었다.
아무도 없는 한밤중의 유원지 공원에서 그녀의 웃음은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알렉스의 어깨 위에 또 팔을 얹었다.
알렉스는 이번에는 그녀의 손을 잡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옷이 필요해. 어떻게 옷을 구하지?"
그녀가 물었다.
알렉스는 갑자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청히 걷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묻자 똑바로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모든 생각과 사고가 안개처럼 스르르 머릿속을 빠져나갔다.
그것들이 제자리를 잡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구할 수 있을 거야."
"좋은 걸루 말이야. 기왕이면 선글라스두."
"그건 내일 오후에 구할 수 있어"
"어디서?"
"강변공원에서."
멀리 퐁네프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다리가 무너질 리도 없고 도망갈 리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래 떠나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불안했다.
그가 사랑하는 미셸도 다리에 있을 떄만 안심이 되었다.
밖에 나가 세상으로 들어가면 언제 그녀가 세상 속의 사람들 틈으로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온 사람이었다.
미셸은 다리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녀는 퐁네프 다리가 잘 보이는 강둑에 앉아 알렉스에게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알렉스가 그녀의 곁에 쭈그리고 앉자 그녀는 무릎을 세워 끌어안은 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알렉스는 연기를 피해 그녀의 무릎께로 머리를 수그렸다.
그녀는 알렉스의 굵은 목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녀는 혼자서 일어나 다리 위로 걸어갔다.
알렉스는 가만히 앉아 미셸이 하던 대로 무릎을 세우고 양팔로 끌어안은 뒤 턱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바쁘게 걸어가는 소리가 토닥토닥 들려왔다.
미셸은 철조망을 넘어 한스의 벤치로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일찍 돌아와 담요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었다.
"한스."
미셸은 나즈막이 한스를 불렀다.
그러나 수건을 덮어쓴 그의 털복숭이 얼굴은 움직일 줄 몰랐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한스의 벤치 밑을 살펴보았다.
크고 작은 상자 몇 개와 자질구래한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용케 알렉스가 말한 약상자를 찾아내었다.
반짝거리는 유리 앰플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녀는 한스를 한번 더 쳐다본 뒤 한줌 가득 앰플을 집어냈다.
셔츠주머니에 밀어넣고 남은 것은 바지주머니에 쑤써넣었다.
그리고 상자는 원래대로 벤치 밑 어둠 속에 가만히 밀어넣었다.
미셸은 앰플을 달그락 거리며 뛰어왔다.
"이걸 봐."
그녀는 자기가 가져온 앰플을 자랑스럽게 꺼내어 손바닥에 펴 보았다.
그것들은 강물에 비치는 불빛처럼 손바닥 위에서 반짝거렸다.
"이게 맞지? 그리고 이걸 봐. 여기에 담으면 돼."
그녀는 바지주머니에서 또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휴대용 플라스틱 담배케이스였다.
그녀가 케이스를 한 손에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뚜껑을 밀자 '탁...'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그녀는 앰플을 알렉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뒤 하나씩 차곡차곡 케이스 속에 집어넣었다.
마지막 남은 한 개를 들고 그녀는 잠시 불빛에 비춰보았다.
"앞으론 이걸 먹지 마."
그녀는 마지막 것을 케이스에 넣은 뒤 알렉스의 귓가에 대고 잘그락 흔들어 보였다.
"잠 자는 방법을 가르쳐 줄게."
미셸은 약상자를 조심스럽게 옆에 놓고 알렉스의 어께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를 뒤로 눕혔다.
그녀도 함께 누웠으므로 알렉스는 그녀의 부드러운 팔을 베게 되었다.
그녀는 알렉스의 손을 자기 가슴 속에 집어넣고 그를 끌어안았다.
알렉스의 코에 여자의 몸냄새가 풍겨왔다.
"이게 나와 함께 잠자는 방법이야."
그녀는 알렉스의 어께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웠다.
알렉스는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으나 그녀가 깰까 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버렸다.
알렉스는 거의 새벽이 다 되어 부드럽게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한스가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그들이 누워있는 강둑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이불처럼 포근하게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난간 위에 걸려 있는 한스의 머리도,
세느 강 강변에 누워 있는 두 명의 남녀도 동이 틀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p159)
※ 이 글은 <퐁네프의 연인들>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레오 카락스 - 퐁네프의 연인들
역자 - 정덕성
대흥 - 1992. 03.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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