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문화 정보/보고(영화.미술.사진

· 레오 카락스-퐁네프의 연인들 8 / 퐁네프 다리 위의 가을

by 탄천사랑 2007. 5. 6.

「레오 카락스 - 퐁네프의 연인들」

 


퐁네프 다리 위의 가을
미셸은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바다를 다녀온 뒤,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드러누워 버렸다.
이마에 열이 대단했다.
한스가 어디선가에서 약을 구해다 먹였다.
알렉스는 봉투에 들어 있는 인스턴트 수프를 사다가 모닥불을 피워 끓였다.
하지만 그녀는 몇 숟가락 먹지도 않고 금방 누워 버렸다.
한스는 그녀가 비를 맞아서 그럴 거라고 얘기했다.

사흘 밤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자기가 누워 있던 자리를 살펴보았다.
두꺼운 스티로폼이 깔려 있었다.

"네가 깔아주었지?"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이었다.
밝은 햇살에 드러난 그녀의 몰골이 더욱 핼쑥하고 초라해 보였다.
그녀는 알렉스가 내민 수프를 조금씩 떠먹었다.

"수프가 따뜻해.
 이 자리 위도 그렇고, 곧 추워질 거야."

미셸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수선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언제 아팠냐는 듯이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었다.
알렉스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이 없을 거야."

미셸은 담배 케이스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알렉스는 그것을 들고 한스의 자리로 갔다.
어찌 된 일인지 한스의 앰풀 박스는 가득 차 있었다.
알렉스는 한스의 벤치를 잠깐 쳐다보고는 케이스에 가득 앰풀을 담았다.

"자, 
 새로 시작하는 거야. 어디부터 갈까?"  

미셸은 쾌활한 목소리로 앞장섰다.
그녀는 열심히 일했다.
하루 종일 노상 카페를 찾아 걸었다.
부지런히 작전을 짜서 알렉스에게 지시했고, 열심히 앙드레를 찾아 수면제를 먹였다.
그녀가 지갑을 가방에 넣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면 손엔 틀림없이 지폐가 들려 있었다.

알렉스도 착실히 일을 했다.
불춤도 잊어버리고 성심껏 사업에 충실했다.
노력한 만큼 미셸의 화구 상자에는 착실하게 돈이 불어났다.

미셸은 전처럼 돈을 쓰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쓰지도 않을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녔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다리에 돌아오면 몸이 축 늘어졌다.
미셸은 때때로 알렉스의 다친 발을 주물러 주었다.

알렉스는 그때가 제일 좋았다. 
저녁에 돌아오면 둘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벤치 밑에 스티로폼을 깔아둔 따뜻한 자리였다.
스티로폼 위에서는 돌바닥의 냉기를 전혀 느낄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따뜻한 열까지 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담요 위에는 커다란 비닐을 덮었다.
그것은 이슬도 막아주고 바람도 막아주었다.
알렉스는 그 따뜻한 잠자리 안에서 미셸을 끌어안고 잘 수 있었다.

한 달이 그렇게 지났다.
한 달 전보다 하늘은 훨씬 파랗게 높이 보였고, 대기는 훨씬 시원해졌다.
밤에는 그만큼 춥기도 했다.

알렉스는 그 동안 딱 한 번의 불춤을 추웠었다.
어느 날, 그런 알렉스를 보면서 한스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일도 안 하고 빵과 술을 사러 다니면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알렉스는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주말 저녁을 택해 불춤을 추었다.
알렉스는 온몸이 불에 그을려 화끈거렸지만, 그리고 입에서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기름 냄새가 났지만,
그는 모처럼 정열을 다해 불춤을 추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그날 밤, 미셸은 공원에 같이 왔으나 눈이 아파 일찍 들어갔다.
알렉스는 그녀와 한스를 위해 오렌지 여섯 개를 사고 자기 몫의 술병을 사서 다리로 가져갔다.
불춤을 춰서 생긴 돈으로 먹을 것을 사 간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밤 가운은 갈수록 차가웠다.

"눈이 더 안 보여."  

그녀는 모포를 들추고 상체를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아침마다 늘 듣는 소리였다.
그로선 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그녀가 지금 여기까지 와 있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미셸은 알렉스 볼에 키스를 하고 일어나 않았다.
그리곤 껴안고 자던 화구 상자를 꺼내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어 보았다.
지패가 가득 들어 있었다.

"세어볼래?"
"싫어."

알렉스는 그녀의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셸은 잠시 돈 상자를 쳐다보더니 그것을 들고 일어섰다.

"몸이 꼭 굳은 빵 같아. 부스러지는 것 같아."  

그녀는 난간 위에 돈 상자를 올려놓고 돈을 모두 꺼냈다.

"거의 2천 달러야."
"이걸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봐.  퐁네프 다리는 ....,"
"다리 위는 ------  여름엔 좋지만, 겨울엔 추워서 안 돼."
"밑으로 내려가면 돼."  

알렉스는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미셸은 돌아서서 자신의 다리를 난간 위에 걸쳐놓고 허리를 수그리며 알렉스의 말을 잘랐다.

​"추워서 안 돼. 여길 떠나야 돼."   ​그녀는 굳어진 몸을 푸느라 허리를 한껏 수그리고 몇 번이고 했다.
​"여길 떠나야 돼."  

​허리를 수그리면서 뱉어낸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단호했다.
알렉스는 걱정이 되었다.
다리를 떠나서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 틈에 끼여 살 자신이 없었고, 
그녀가 도망가지 않으리란 자신도 없었으며, 그들의 사는 법을 그대로 배워낼 자신도 없었다.


​알렉스는 다리가 좋았다.
그는 여기서 아무 어려움 없이 살았으며, 아무 방해도 없이 자유로웠다.
그러나 미셸은 이미 확고한 마음을 정해 놓은 것 같았다.
하기야 벌써 이렇게 아침마다 체조한답시고 법석을 떨 정도라면, 
앞으로 그녀로서는 도저히 배겨낼 수 없을 것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벌써부터 그것을 염두에 두고 돈을 착실히 모으지 않았던가.

알렉스는 그녀가 양팔을 벌리며 체조에 빠져 있을 때, 난간을 넘어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고 난간 위에 있던 그녀의 돈 상자를 살그머니 밀어서 그녀의 뒤에 가져다 놓았다.

​처음엔 높이 쳐들었던 그녀의 팔이 점점 아래로 처졌다.
알렉스는 모르는 체 벤치 위에 무릎을 끓고 세느 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곧이어 예상했던 그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팔이 돈 상자를 밀어 강물에 떨어뜨린 것이다.
그녀는 뛰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난간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내 돈, 내 돈"   미셸의 화구 상자가 강물 위로 천천히 떠내려갔다.
"안 돼, 안 돼!"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반대쪽 난간으로 소리치며 뛰어갔다.
그렇지만 그녀는 떠내려가고 있는 상자를 좀 더 오래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미셸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런, 멍청한 짓을....,"

그녀는 허공을 휘저으며 비틀비틀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보기 민망할 정도로 스스로 자학했다.

"이 머저리 같은 맹인, 
 쓸데없는 봉사 같은 년, 이걸 어째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젠 끝장이야. 이런 쓸모없는 년 같으니라고."

알렉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미안했지만, 그 수밖에 없었다.
퐁네프 다리에서 그녀와 함께 살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안해, 알렉스."  미셸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한참만에 그렇게 말했다.
"이젠, 사업을 하지 말자."
"안 돼. 돈을 벌어야 해. 우린 아마 다리 위에서 얼어 죽을 거야."

그러나 미셸은 전처럼 열심이진 않았다.
그녀는 사업을 하는 시간보다 알렉스와 함께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미셸은 돈 상자를 빠뜨리고 나서 알렉스와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미셸이 지갑에서 돈을 빼러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는 외에는 둘은 늘 함께 붙어 다녔다.
그렇게 미셸은 점점 사업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나중에는 꼭 돈이 필요할 때만 사업을 했다.

그녀가 화구 상자를 잃어버리고 나서 그녀는 돈을 모으지 않았다.
필요한 돈은 이따금씩 불춤을 추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다리 위의 생활은 편했다.
알렉스 말대로 눈이 올 때까지는 그런대로 생활할 만했다.
생각보다 스티로폼 담요가 따뜻했고, 비닐 덮개도 찬 이슬을 잘 막아 주었다.

또 돈이 없어도 그다지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알렉스는 언제 어디에 가면 어떤 것을 구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며 구한 것들로도 둘의 먹을거리는 충분했다.
미셸과 알렉스는 더 이상 사업을 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또 불춤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둘의 하루는 대부분의 시간을 다리에서 보내거나 거리를 쏘다녔다. 

​미셀의 눈은 점점 더 나빠져갔다.
그리고 눈이 나빠지는 만큼 말수도 적어졌다. 
그녀에게선 이제 웃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업을 할 때처럼 명랑한 표정도 없어졌고, 모든 의욕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미셸에게 해 줄 어떤 말도 찾지 못했다.
그는 그저 미셸의 곁을 지켜줄 뿐이었다.
미셸은 혼자 앉자 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녀는 멍청히 난간 위에 걸터얹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꼬박 하루를 그렇게 앉아 있은 적도 있었다.

​일찍 돌아온 한스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옆에서 오랫동안 무엇인가 얘기했다.
알렉스와는 달리 한스는 여자를 위로해 줄 말과, 함께 대화를 나눌 만한 애기를 많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인생, 혹은 삶과 죽음에 관한 애기를 나눌 때면, 알렉스는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들의 그 지루하고 차분하며 억양이 없는 애기들은 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길어지기 때문이었다.
알렉스는 때로 그들의 애기를 잘 들어보고자 했으나, 그들은 답답하리만큼 나지막한 소리로 애기했다.

​다리 난간에 턱을 괴고 허공을 바라보며 간간이 들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알렉스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 있는 생명처럼 보이기도 하고,
문득 자신의 존재가 아주 작아진 느낌도 들었으며, 
자기와 미셀, 한스가 퐁네프 다리와 함께 허공 속에 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에 빠질 때도 있었다.

​분수대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 알렉스에게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은 주로 인근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대개 하루 종일 나와 있었고, 언제나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다.
관광 온 사람들과는 옷차림이나 모든 것이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요즘 세상살이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마주 보며 근심을 했다.

​알렉스는 분수대를 찾을 땐 언제나 그들이 모여앉은 벤치에  끼여 앉았다.
다른 사람과 달리 그 노인들은 알렉스가 곁에 앉아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알렉스는 그들로부터 언제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알렉스에겐 그들의 얘기가 매우 흥미로웠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넓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시시콜콜한 얘기들이 그에겐 언제나 신기하고 신비롭게 들렸다.
자기의 삶은 언제나 그들과는 상관 없는 퐁네프 다리 위에서만 꾸러지고 있었다.
거기엔 자기와 한스밖에 없었고, 미셸이 새로 있었다.

알렉스는 서로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함께 얽혀 살아간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는 낮 동안 세상에 나가 어슬렁거리다가도 결국은 혼자가 되어 퐁네프 다리 위로 돌아와야 했다.
한스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그리고 설혹 미셸이 거기에 없더라도.



알렉스가 아침부터 철망을 넘어 나가버리자 미셸은 무료해졌다.
그녀는 요즘 대개 혼자서 다리 난간 위에 걸터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알렉스가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막상 알렉스가 없자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무척 힘들어졌다.
그녀는 외로움을 느꼈다.
다리 난간 위에 어느 날처럼 걸터앉아 하루를 보냈으나 시간이 무척 더디게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서 알렉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알렉스보다 먼저 한스가 돌아왔다.
그는 늘 해지기 전에 돌아와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의 자리는 여전히 차가운 돌 벤치 위였다.
낡은 담요가 한 장 깔렸을 뿐이었다.

한스는 잠자리를 정돈하다가 문득 미셸을 발견했다.
그녀는 난간 위에 걸터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돌아왔군요.
 난 여기서 거기에 있는 당신이 잘 안 보였어요.
 당신인 줄은 알았지만."

한스는 말없이 주머니 속을 뒤져 쿠키 두 개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미셸은 쥐고 있던 사과를 그에게 주고 쿠키를 받았다.
한스는 사과를 반으로 쪼갠 뒤 덥석 베어 물었다. 
한스가 쳐다보자 미셸도 쿠키를 입에 물으며 말했다.

"이제, 곧 장님이 될 거예요."

미셸은 서글퍼졌다.
어차피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막상 하루가 다르게 눈 앞이 흐려지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왈칵 슬픔이 복받쳤다.
그 동안 알렉스와 함께 많은 것을 보러 다녔고 잘 기억해두기 위해 만져보고 냄새까지 맡았다.
하지만 장님이 된다는 사실은 그 어떤 준비를 했더라도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다.

한스는 그녀를 다독거렸다.

"들어봐, 미셸.
 나는 사랑하는 딸과 사랑하는 아내를 모두 잃었어.
 나의 행복한 가정과 아름다운 미래까지 모두 사라졌지.
 하지만 내 가슴속에는 늘 행복했던 나의 집과 아름다운 아내가 남아 있어.
 비록 그녀가 죽었지만 말이야.
 더구나 나는 아내를 많이 닮은 너까지 만나게 되었어.
 나는 네가 와서 무척 기뻐.
 미셸, 이제 너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겠지만, 그것들은 모두 너의 곁에 남아 있을 거야.
 네가 만난 모든 사람과 네가 본 모든 것들이 말이야.
 너보고 집에 돌아가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
 하지만 집에 가지 않더라도 알렉스가 너를 돌봐줄 거야.
 너는 알렉스가 보이지 않겠지만 알렉스는 여전히 너를 찾을 수 있고, 또 네 곁에 있을 거야.
 아무것도 달라질 건 없어.
 이제 그만 두려운 생각을 버리는 게 좋겠어."

미셸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한스의 어깨를 덮으며 출렁거렸다.

"당신이 불쌍해요."

한스도 미셸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노을이 번지면서 해가 지자 곧 어둠이 몰려왔다.
가을 해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어두워지자 바람이 더 불었다.

​"난 보고 싶어요."   어둠 속에서 미셀이 말했다.

알렉스는 그날 늦게 돌아왔다.
그는 분수대에 갔다가 마임 하는 친구에게서 얻은 술 한 병을 다 마셨고 
수돗물이 있는 곳으로 물 마시러 갔다가 누군가 끌러놓은 손목시계를 주웠다.
그는 시계를 술로 바꾸기 위해 시장으로 갔는데, 가게 주인이 마침 외출 중이어서 늦게 돌아온 것이었다.
그래도 결국 그는 술 두 병과 굵은 햄 한 덩어리, 담배 두 갑으로 바꾸어 들고 돌아왔다.

"미셸"

어찌 예감이 이상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그녀가 없었다.
난간 위에 앉아 있지도 않았고 자리에 누워 있지도 않았다.
한스의 자리에 가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한스의 자리엔 한스도 없었다.
알렉스는 술병을 내려놓고 벤치에 가 앉았다.
별일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예감은 자꾸 불길한 쪽으로 기울었다.

알렉스는 불길한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미셸은 술 두 병이 다 빌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한스도 돌아오지 않았다.

차가운 밤 기운이 퐁네프 다리 위로 내려 앉았다.
알렉스는 냉기가 올라오는 돌바닥 위에 다리를 벌리고 주저앉아 있었다.
밤은 벌써 깊을 대로 깊어져 이따금씩 들려오던 자동차 소리까지 삼켜버리고 말았다.

​알렉스의 귓속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려왔다.
이미 그는 술이 많이 취한 상태였다.
호홉이 가파졌다.
그는 귓속을 파고드는 울림을 막기 위해 손으로 목덜미를 눌렸다.
그의 다른 한 손엔 아직까지 술병이 쥐어져 있었다.
검은 빛깔의 액체가 술병 속에서 출렁거렸다.

​취한 알렉스의 눈 앞에 미셀이 웃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곁에는 웃고 있는 자기의 모습도 보였다.
그녀는 앞에 서있는 것도 같았고, 
그의 옆에서 웃고 있는 것도 같았고, 뒤에 다가와 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알렉스는 문득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도 미셸은 와 있지 않았다.
짙은 어둠이 가로등을 삼키려고 거대한 몸을 펼치고 있을 뿐이다.

​알렉스는 두려움과 슬픔으로 몸을 떨었다.
혼자라는 외로움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그를 괴롭혔다.

​"미셀, 
 어디에 있는 거야. 미셀."

​고개를 떨구고 술병을 노려보고 있는 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미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는 다시 한번 되뇌어보았다.

"미셀. 
 미셀, 어디에 있는 거야."  그는 계속 중얼거렸다.
"어디에 있는 거야."
"어디에 있는 거야."
"어디에 있는 거야."
"어디에 있는 거야."  

​알렉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술병을 내던졌다.
술병은 벤치의 등받이, 난간에 부딪히면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그와 함께 거기에 앉아 있던 미셸의 모습도 사라져버렸다.
알렉스는 슬픔을 삭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는 비틀비틀 일어서서 허우적거리며 벤치로 걸어갔다.
깨어진 병조각을 집어 들었다.
주둥이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주둥이 끝은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그는 주둥이를 한 손에 움켜쥐었다.
다른 손으로 윗도리를 걷어올렸다.
허옇게 드러난 살에 병조각을 갖다 대었다.
가로등 불빛이 날카로운 병 끝에 부딪쳐 하얗게 튕겨져 나갔다.

'사각사각' 살이 베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끊어질 듯,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차가운 바람이 다리 위를 지나갔다.  
가을을 재촉하는 바람이었다.
알렉스는 난간에 기댄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미셸의 이름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p203)
※ 이 글은 <퐁네프의 연인들>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레오 카락스  - 퐁네프의 연인들
역자 - 정덕성
대흥 - 1992. 03. 0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