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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 카락스-퐁네프의 연인들2/미셸의 첫사랑

by 탄천사랑 2007. 4. 23.

레오 카락스 - 「퐁네프의 연인들」

 


미셸의 첫사랑
알렉스는 철망을 넘어 알 시장으로 나왔다.
시장은 이 시간이 제일 붐볐다.
사람들은 저녁 식단을 마련하기 위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모두가 굉장히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아마 싱싱한 야채와 생선, 빵을 사서 집에 있는 누군가와 함께 먹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스는 달랐다.
같이 먹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늘 혼자 먹어야 했다.
한스가 있기는 했으나 그는 또 그대로 혼자 먹었다.

알렉스는 싱싱한 생선을 좋아했다.
날것으로 그대로 먹었다.
마땅한 불도 없거니와, 있다고 하더라도 날것의 맛이 훨씬 고소하고 담백했다.

그러나 한스는 달랐다.
알렉스가 생선을 나누어 주면 그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과일을 더욱 좋아했다.
때문에 알렉스는 거의 혼자서 식사를 해야만 했다.

알렉스는 오늘 돈이 없었다.
여자에게 싱싱한 생선을 먹여주고 싶은데 주머니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벌써 며칠째 일을 못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그렇다고 쓰레기통을 뒤져 상한 것을 갖다 줄 수도 없었다.
비교적 깨끗한 것을 골랐다고 해도 여자는 자기와는 달리 틀림없이 배탈을 일으킬 것이었다.

알렉스는 생선가게 앞에서 멈추어 섰다.
손님이 한 명 생선을 주문했다.
주인이 생선을 봉투에 담기 위해 뒤돌아섰다.
그 틈을 타서 재빨리 제일 크고 싱싱한 도미 한 마리를 집어 러닝셔츠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후다닥 가게를 빠져나왔다.
런닝 밖으로 생선 꼬리가 삐죽거렸다.
행인 몇 사람이 그의 행동을 보고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셸은 아직 자고 있었다.
알렉스는 접시를 준비해 놓고, 도미를 그릇에 올려놓았다.
바지 주머니에서 손칼을 꺼내 생선 그릇 앞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그는 먼저 생선의 머리 부분을 잘라내었다.
냄새를 맡은 고양이가 야옹거렸다.
고양이를 풀어서 생선 대가리를 던져주었다.
고양이는 앞발로 먹이를 감싸 쥐고 자리를 잡았다.

알렉스는 등지느러미를 따라 칼집을 넣은 뒤 껍질을 벗겨냈다.
그리곤 가시를 발라낸 뒤 조금 얇은 듯하게 토막을 내어 접시에 담았다.
미셸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벌써 밤이잖아."
"그래"

그녀는 아직도 머리가 덜 깨었는지 고개를 몇 번 흔들거렸다.
그러고 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파리는 이미 붉은 노을이 사라지고 건물과 자동차,
그리고 가로등이 내뿜는 수많은 불빛들에 의해 장식되어 있었다.
멀리 노트르담 성당의 종소리가 자동차 소음을 뚫고 퍼져 왔다.
미셸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나 봐."

미셸은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가랑이 사이에 생선 접시를 올려놓고 묵묵히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나?"
"응"
"그런데....,"

미셸은 자신의 짐을 찾았다.
화구와 보따리, 모두 벤치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생각난 듯 크게 소리를 쳤다.

"루이지안느."

미셸의 고양이는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힐끗 주인을 쳐다보았을 뿐,
그대로 먹이에 열중했다.
미셸은 모포 위에 털썩 손을 내려놓았다.

"네가 여기로 날 데려다 놓았니?"
"응."
"그 늙은 영감은 내가 여기 있는 걸 싫어하잖아."
"괜찮아."

미셸은 셔츠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빼어 물고 크게 숨을 쉬었다.
알렉스는 그녀와 비껴 앉은 채 생선 접시를 내밀었다.

"먹어."
"이게 뭐야? 날 생선이군."

그녀는 접시를 받아 담배 든 손에 옮겨 잡았다.
손가락으로 한번 건드려 보고는 하나를 집어 입속에 넣어보았다.

"일본 사람들이 이렇게 먹지,
그들은 '사시미'라고 불러."   미셸은 먹을 만한지 몇 개를 더 집어먹었다.
"신선해?"
"응."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면서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서는 먹기 힘든 음식이지...."

알렉스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생선 그릇의 부스러기들을 집어먹고 있었다.
좋은 것은 미셸의 접시에 담아주었고 한스몫도 조금 떼어놓았다.

"너, 이름이 있니?" 미셸은 알렉스의 목덜미를 향해 물었다.
"알렉스."
"다음엔 그림을 완성시켜 줄게."

알렉스는 입안에 손을 넣어 가시를 뽑아내고 있었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물 소리가 크게 들렀다.
미셸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좀 더 자야겠어. 여기서 자도 되지?"
"응."

미셸은 알렉스의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쓰면서 벤치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난간 쪽으로 돌아누우며 얼굴을 잠시 드러내면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알렉스는 미셸의 접시에 한스 몫을 담아들고 그릇을 치우며 일어섰다.
알렉스는 접시를 들고 한스에게로 걸어갔다.
한스는 벌써 돌아와서 앉아 있었다.
그는 여자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렉스가 다가가자 그는 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일 쫓아버려."

알렉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스는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얇고 가느다란 쇠조각을 들고 있었는데 끝이 울퉁불퉁한 것이 열쇠처럼 보였다.
그는 조그마한 줄칼로 그 쇠붙이의 끝을 신중히 갈고 있었다.
알렉스가 생선 접시를 내밀었다.

"이것 좀 먹어둬."
"또 생선이야?"

한스는 접시를 받아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하던 일에 열중이었다.
그가 줄칼을 한번 움직일 때마다 얼굴 근육을 덮고 있는 수염이 꿈틀거렸다.
알렉스는 한스의 작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 생 클로드가 어디야?"
"생 클로드?" 한스가 고개를 돌렸다.
"서쪽 길이지. 블로뉴 숲 근처의 부자 동네야. 그건 왜 물어?"
"그냥."

한스는 힐끗 알렉스를 쳐다보고는 다시 손을 놓았다.
알렉스는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저 여자, 여기서 며칠 있어도 돼?"
"안 돼."

한스는 알렉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 된다고 말했다.
마치 알렉스가 그 말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며칠 있어야겠어. 그 여자 많이 아프거든."

한스는 손을 멈추고 고개를 쳐들었다.
알렉스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되었다.
그는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꼴도 보기 싫어."
"왜?"
"왜냐구?" 한스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여잘 보기 싫단 말이야. 알아들었어?"

알렉스는 멍청하게 서 있었다.
한스는 이따끔씩 알렉스가 술을 많이 먹거나 밖에서 쓰러지면 화를 냈지만,
이렇게까지 큰 소리를 치지는 않았다.
알랙스는 왜 한스가 그 여잘 싫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는 예뻤고, 귀여운 고양이를 데리고 있었고, 또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다.
고양이를 데리고 있으면 아무래도 다리에서 사는 쥐들이 줄어들 것이었다.
그리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대개 순박해서 자기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다.
그래서 한스도 공원의 화가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는 터였다.

한스는 어느새 수면제 앰풀을 하나 꺼내들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알렉스에게 내밀었다.

"가서 자."
"싫어."

알렉스는 앰풀을 받지 않고 돌아섰다.
여자를 쫓아내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한스는 쫓아내라고 하고, 자기는 쫓아내기 싫고,

알렉스는 대게 한스의 말을 따랐다.
한스는 그에게 잘해 주었으며,
지나치게 간섭을 하지도 않았고, 그러면서도 늘 걱정해 주었다.
친절하고 따스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몸까지 아픈 여자를 쫓아내라고 하는 것일까.
알렉스는 화가 났다.

"알렉스!" 뒤에서 한스가 불렀다.
"알렉스, 이리 와 봐." 알렉스가 다시 그에게로 걸어갔다.
"손을 내밀어 봐."

알렉스는 손을 내밀었다.
한스는 앰풀을 주었다.
알렉스가 받아 가려 하자 한스가 갑자기 그 손을 움켜쥐었다.

"좋아, 며칠간만이야." 한스는 천천히 또박또박 다짐했다.
"술 마시지 마. 알겠어? 그리고 여자는 내 눈앞에 얼씬거리지 않게 해. 절대로 말야."

한스는 그의 손을 좋아주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그의 뒤에 대고 혼자 말하듯이 다시 중얼거렸다.
'단 며칠만이야. 내 눈앞엔 절대로, 절대로 보이지 않게 해.'
알렉스는 수면제를 먹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는 다리를 빠져나와 서쪽으로 향했다.

알렉스는 걸어서 생 클로드로 갈 생각이었다.
알렉스는 미셸에게 편지를 보냈던 마리옹의 집을 찾아냈다.
그녀의 집 바깥에는 오래 묵은 은사시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그 나무와 2층의 작은 창문 사이에 폭이 좁은 널빤지가 다리처럼 걸쳐져 있었다.
아마 그 방의 주인이 나무까지 건너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것 같았다.
방주인은 틀림없이 어린아이일 것이다.

알렉스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정교하게 짜여진 나무 사다리가 놓여 있어 올라가기는 쉬웠다.
발만 다치지 않았으면 식은 죽 먹이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한참을 소비한 뒤에야 겨우 창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알렉스는 플래시를 켰다.
방 안은 온통 그림이었다.
거의 모두가 첼로를 연주하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줄리앙....,' 갑자기 며칠 전 미셸이 그림 그리다 쓰러질 때가 뇌리를 스쳤다.
알렉스는 그림 속의 남자를 자세히 보았다.

그러나 그림 속의 남자는 알렉스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예쁜 미셸이 기절했을 때 헛소리까지 할 정도로 잘생긴 남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림은 매우 괴상하게 그려져 있었다.
모두 얼굴은 찌그러지고 눈은 휘었으며 입 모양도 비틀려 있었다.
첼로를 내리누르듯 거세게 연주하는 남자는 굉장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고,
첼로를 빨래 짜듯 쥐어짜는 것처럼 연주하는 남자는 얼굴이 뒤틀려 있었다.

방 한켠에는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틈에서 노트 한 권을 찾아냈다.
겉장에 큰 글씨가 쓰여 있었다.
'미셸과 줄리앙.' 알렉스는 겉장을 넘겨보았다.
정성을 들이지 않고 갈겨쓴 글씨가 편지 속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것은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글씨도 모두 같았다.
옆방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미셸이니?"

알렉스는 재빨리 플래시를 끄고 뒷걸음을 쳤다.
창문에 닿자 몸을 날려 널빤지에 매달린 뒤, 바깥으로 내리뛰었다.
나오기 전에 노트를 러닝셔츠 속에 집어넣었음은 물론이었다.

내용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러나 글씨가 무척 알아보기 힘들었고, 또 낯선 단어가 많아 드문드문 넘어가야 했다.
그래서 다 읽었을 무렵에는
이미 새벽 별빛을 반사하고 있는 세느 강의 강변길을 거의 다 지났을 무렵이었다.

알렉스는 그날 밤을 뜬눈으로 새워야 했다.
피곤했지만 왠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앰풀을 꺼내 먹고 싶지는 않았다.

알렉스는 일어나서 난간에 걸터앉았다.
노트에 써 있던 내용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뜻일까, 첫사랑... 그녀는 줄리앙을 사랑했다... 그리고 영원히....'
그녀의 친구 마리옹도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첫사랑...., 첫사랑을....,'

몽마르트 언덕에서 새벽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루나무에서 깃을 들었던 새들이 잠을 깨기 시작했는지 날개 터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다시 노트를 펼쳤다.
노트 맨 뒤에 짤막하게 정리된 글을 다시 읽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렸었다.
오직 그를 위해
줄리앙도 첼로를 연주했다.
오직 그녀만을 위해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돌이킬 수 없는
그 싸움이 있고 난 후
슬픈 일이 벌어졌다.
그는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
그녀는 오랫동안 그를 기다렸고
그녀의 눈은 점점 병들기 시작했다.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아직 그를 사랑하기 때문일까
그녀가 길거리를 방황하는 이유도....,


알렉스는 노트를 덮고 강물 위에 던졌다.
노트는 강물 위에 잠시 흰 파문을 일으켰을 뿐, 뒤이은 물결에 휩쓸려버렸다.
알렉스는 난간 위에 드러누워 사라져가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셸에 관한 온갖 상념들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정말 오래간만에 느끼는 감정들이다.
알렉스는 사라져가는 별을 쫓아 자기 자신도 깊은 어둠으로 밀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미셸은 일찍 일어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다리 밑으로 곧장 내려가 수도꼭지를 틀었다.
아마 이런 생활을 한 지 꽤 오래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푸득 거리며 세수를 하다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몰래 뒤쫓이와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각 밑 층이 진 돌단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으므로 그녀에게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미셸은 옷을 벗고 나서 몸을 씻기 시작했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부근을 한참 닦고 나머지 부분도 닦아냈다.
수도꼭지가 허리 높이에 달려 있었으므로 그녀는 플라스틱 음료수 병으로 물을 받아 몸에 부었다.
물기 묻은 그녀의 몸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윤기를 냈다.

그녀는 화판과 화구 상자를 들고 시내로 나갔다.
알렉스도 몰래 뒤따라 나갔다.
미셸은 공원 분수대 옆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녀가 모델을 부탁한 사람은 알렉스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림을 다 그린 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때 알렉스는 그 모델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여기저기 마구 쏘다니면서 틈만 나면 풍경과 사람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

알렉스는 미셸이 이렇게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는 며칠 동안 미셸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그녀가 신문을 자주 훔친다는 것과
과일 가게 앞에서 오래 서 있는다는 것도 알아냈다.

다음날, 알렉스는 미셸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시장으로 들어가서 하루 종일 시장통을 헤매고 다녔다.
마침내 몇 개의 오렌지와 사과 한 개,
그리고 아직 들을 수 있는 라디오 하나를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냈다.
알렉스는 미셸이 있는 공원으로 갔다.

그녀는 잔디밭으로 모여든 수많은 인파 속에 섞여 있었으나
항상 가던 그 자리에 있어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배를 잔디밭에 깔고 엎드려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서 라디오를 주고 싶었으나 곧 돌아서서 다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오늘 그녀는 깨끗했으며, 공원에 놀려 온 사람들과 어울려도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알렉스는 달랐다.
시장통을 헤매고 난 뒤라 더욱 지저분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옆에 있는 남자에게 담배까지 부탁해서 얻어 피우고 있었으므로
알렉스는 자기가 나서면 그녀가 싫어할 것 같았다.


한스가 일찍 돌아왔다.
알렉스는 한스에게 오렌지를 내밀었고, 한스도 가져온 빵과 포도주를 꺼내놓았다.

"좋은 것을 가져왔군."

한스는 오랜만에 보는 과일이라 그런지 오렌지를 들어 어린애처럼 빙글빙글 돌려보면서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알렉스도 잠자코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빵과 포도주를 그와 번갈아가면서 뜯어 먹고 마셨다.

가로등이 하나둘씩 들어오더니 클럽 하우스의 전등이 일제히 켜졌다.
어스름이 내린 다리 위가 한결 밝아졌다.

한스는 철망 쪽을 흘깃 보더니 모르는 척 포도주 병을 입에 물고 거꾸로 세웠다.
미셸이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알렉스는 포도주 병을 받아 한 모금 마신 뒤 오렌지 껍질을 놓고 일어섰다.

"일하려 가야 해."

한스는 여전히 모르는 척 포도주 병을 받았다.
그는 여자가 아직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알렉스는 일어나서 곧바로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한스는 그의 뒷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벤치에 앉아 있던 미셸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라디오부터 내밀었다.

"널 위해 샀어."
"뭐라고?"​

미셸은 뜬금없는 라디오를 받고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고마워."
"이제 신문 사러 멀리 가지 않아도 돼"

미셸은 무슨 소린지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나 알렉스는 과일을 놓고 곧바로 자기 자리로 가 드러누워 버렸다.

"일하려 가야 돼."

미셸은 라디오를 틀어보았다.
아나운서의 흥분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 파리 시에서는 내일 있을 혁명 2백 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합니다.
먼저 육, 해, 공군의 의장 행렬이......


미셸은 자기가 줄리앙을 찾아다닌다는 사실을 알렉스가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럴 리는 없는 일이었다.
'내일은 거리가 북적 해질 테니 지하도로 가봐야겠어'

줄리앙에 대한 그리움으로 미셸은 좀처럼 잠을 이루질 못했다.
기억 속에서 멀어저가는 그의 얼굴 때문에 미셸은 몇 번이고 고개를 휘저었다. (p081)
※ 이 글은 <퐁네프의 연인들>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레오 카락스 - 퐁네프의 연인들
역자 - 정덕성
대흥 - 1992. 03.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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