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池河蓮) - 결별」
결별
지하련(池河蓮)
결혼한지 얼마 안되는
새색시 형예(亨禮)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제 밤에 남편과 다툰 일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남의 일에 분주헌 건 모욕이래요.”
“남의 일이라니 웨 결국 내 일이지.”
“여자가 아무리 영니해도 밖앝 일을 이해 못험 그건 좀 골난해.”
“관둡시다 관둬요.”
사실 별것도 아닌 말을 주고받은 것으로
남편이 가끔 거드름을 부리는 것에 형예가 자주 화를 내는 것이 병이라면 병이었습니다.
일찍 일어나야 별로 할 일도 없고 일어나기도 싫어 누워있는데
남편의 ‘그깟 일’이라는 소리에 다시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웬일일가? 내가 이렇게 비위를 잘 상우게 되는 것은 그를 대수롭게 녁이지 않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 때 심부름하는 아이가 윗마을 댁에서 놀러오라는 전갈이 왔다고 전하는데
윗마을 댁은 정희(貞熙)네 집으로 정희는 그저께 혼인을 한 먼 친척이었지만 여학교 때부터 절친이었습니다.
형예는 겉모습이 훌륭하다는 ‘서울 신랑’의 모습을 머리속으로 그려보면서 정성껏 화장을 했습니다.
형예가 좁은 길을 지나 삼거리에 이르렀을 때 명순(明順)이를 만나 인사를 하고 헤어집니다.
온천에 간다는 명순이는 좋은 옷을 차려입었고 옆에 있는 아이도 값비싼 옷으로 치장을 하였습니다.
‘저런 게 행복이라는 걸가 -’
형예는 예전부터 명순이 같은 애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시집가기 싫어 죽네사네 하던 명순이가 살림을 너무 잘한다는 소문이 요란한 것도 싫었습니다.
게다가 학교다닐 때는 공부도 잘 못했던 것이
시집을 가서는 잘 사는 것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멸시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입니다.
걷다보니 훨씬 자신을 비롯해 고운 품성을 가졌던 숙희나
남편과 이혼하고 뭘하는지도 모르는 지순이가 명순이 같은 애들보다는 훨씬 훌륭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정희네 집에 도착해 옆문으로 정희 방에 조심스럽게 가는데 정희가 뛰어나왔고
새색시 같지 않은 정희의 태도에 형예가 당황할 때 해맑게 생긴 사나이가 밖으로 나옵니다.
‘저게 뭐니 뭐니 하는 이 집 사위로구나 -’
형예와 정희는 남편을 처음 알게된 이야기부터 연애시절의 이야기,
결혼하기까지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형예는 정희가 은연중에 자기 남편을 자랑하는 것 같아서 불쾌해지려는 감정이 생기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 때 갑자기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나는데 정희 막내 당숙이 술기운에 익살을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정희는 막내 당숙이 혹시 자기 신랑이 노여워할 말을 하지나 않을지 걱정이 태산인 얼굴입니다.
"정히는 반했나보지,
제 말맛다가 사랑하면 반하게 되나 보지.
제가 반하는 것은 남이 저헌데 반하는 것 보담 어떨가?"
둘이 이런 저런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을 때
정희의 큰 오라범댁이 들어와 젊은 댁들이 신랑신부를 데려오라고 야단이라고 전합니다.
형예는 그 자리에 가는 것이 못마땅해서 정희만 가라고 하지만
정희의 아우성에 어쩔 수 없이 같이 방으로 가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귀염을 받을 수 있는 사람,
되따에 갔다 놔도 사귀고 살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맘이 착한 사람이 아닐가 -’
방안에서는 화투를 하자는 사람,
윳을 하자는 사람들의 공론이 분분한데 결국 신랑편과 신부편으로 나눠서 윳놀이를 하게 됩니다.
윳놀이는 공교롭게도 형예의 활약으로 신부편이 이기게 되고 방안은 손벽을 치랴,
신랑을 놀리랴 아우성이었습니다.
정희 숙모의 만류로 간신히 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따라서 형예도 가려고 하지만 정희가 기어이 잡습니다.
정희 어머니까지 먼저 시집을 갔으니 정희 선생 노릇을 좀 해달라는 바람에 형예는 주저않게 됩니다.
자정이 훨신 넘어서야 형예는 정희 집을 나섰는데 혼자 가도 괜찮다고 했지만,
결국 세 사람은 가까운 길을 버리고 해안통을 나란이 걷게 됩니다.
뽀얀 안개가 산과 바다에 김처럼 서려 있었는데
정희는 비가 오기 전날 밤과 비가 개인날 밤이 여름밤치고도 제일 곱다고 합니다.
“바닷가 색시들은 사나울 게라”
“웨 바다가 얼마나 좋은데 그래,
우린 되우 슬푸거나 외롤 땐 갑재기 바다가 그리워지고, 풍낭이 몹시이는 바다에 가서 죽고싶대요 -”
“건 또 웬일일가,
물귀신의 넋일가 - 이러다간 내일 도망하게 되리다”
정희 신랑의 말에 형예와 정희는 자지러지게 웃는데
정희 신랑이 큰 소리로 웃지좀 말라는 것이 더 우수웠습니다.
배를 타고 여수로 가면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원귀가 있는 섬이 있는데
비가 오려는 날 그곳을 지나면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달밤에 처녀가 홀연이 나타나서 놀다가는
새벽이면 눈물을 흘리고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그것이 인어였다고 정희는 말합니다.
“정말 인어라는 게 있을가?”
“그럼 있지 않구요.
내 보기엔 당신네들로부터 수상한 것 같수다.”
세 사람이 새로된 매축지를 거의 다 돌아나올 때 길다란 기적 소리가 어슴프레 들려왔습니다.
왜 자꾸 비가 온다고 하냐는 신랑의 말에
정희는 좀 전의 기적소리가 날이 굳을 때만 들리는 낙동강을 지나는 열차의 신호라고 설명을 합니다.
형예는 야심하면 흔히 들을 수 있는 기적소리가
웬일로 칼날보다도 더 날카롭게 별똥보다도 더 빠르게 가슴에 왔습니다.
별 까닭도 없고 어디 말할 곳도 없는 크고 깊은 억울함에
그냥 목놓아 통곡하고 싶은 감정을 참으며 머리를 숙인 채 잠잖고 걸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형예가 방에 들어서자
남편은 벌써 돌아와서 잠이 들었든 모양으로
날이 새도록 무슨 마실이냐며 제법 농을 섞은 꾸지람을 했습니다.
“뭘 하는 사람이래?”
“그냥 공부하는 사람이래요.”
“아 여태 학굘 대녀?”
“꼭 학굘 단녀야만 공불허나?”
“공불 허는 사람이다? 좋은 팔자로군.”
형예는 남편의 자기 나이 또래인데
훨씬 어린 사람 이야기를 하는듯한 오만한 표정이 왠지 비위에 거슬립니다.
“건데 여간 침착한 사람이 아니야요.”
“응 - 얼굴도 잘나구.”
형예는 남편의 말 속에서
자신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를 나름대로 짐작한 노여움의 표정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럴 때 남편의 표정이 이래야만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알 수없이 분했습니다.
“웨 동무 남편임 좋건 좋다고 허는 게, 뭐가 어떻고, 웨 나뿌담.
말해봐요. 난 당신처름 거짓말은 헐 줄 몰라요.”
형예는 한번 불이 번쩍하도록 부딪치고 싶어 자신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맙니다.
그러나 남편은 형예가 하는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당황해서 일어나 앉습니다.
“당신은 번뜻하면 날 잡구 힐난하려 들지만, 온 허 그 참, 그래 내가 어쨋단 말이요.
그저 당신은 아무 것두 아닌 것 가지고 이러지 말우에, 내 암말두 않으리다.”
형예는 자리에 누워서도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내 암말도 않으리다’라는 남편의 말을 되새겨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이 아주 이상한 짓을 할 때도 암말두 않겠다고 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순간 인망이 높고 심지가 깊은 「훌륭한 남편」이 더할 수 없이 비굴한 정신과
그 방법을 가진 무서운 사람으로 형예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가 반다시 나를 햇치리라!”
형예는 오랫동안 노여웠는데 밤이 깊을수록 벌레들이 죽게 울어대고 있었습니다.
“저 길다랗게 끼록끼록 하는 것은 지렝일테고,
낏득 낏득 하는 것은 귓두램일 테지만,
저 솨르르 솨르르 하고 쪽쪽쪽 하는 벌레는 대체 어떤 형상을 한 무슨 벌레일가?
웨 저렇게 몹시 울가?”
갑작이 밀물처럼 고독이 다가 오면서 형예는 완전히 혼자인 것을 깨닫습니다.
- 끝.
지하련(池河蓮)은 경상남도 거창에서 출생했고 마산에서 성장했는데
부유한 집안 환경 속에서 여성으로는 드물게 일본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1936년 카프 출신 문학이론가 임화와 결혼했으며
1940년 문학평론가 백철의 추천으로 『결별』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결별』을 비롯해 『체향초(滯鄕抄)』
『가을』 『산길』 『도정(道程)』『광나루』『종매』,『양』 등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남겼습니다.
광복 후 임화와 함께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했으며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인 『문학』의 제1회 조선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1947년에 임화가 먼저 월북을 했고 그녀는 남은 가족을 지키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 월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1953년에 박헌영 계열이 몰락하면서 남편 임화가 간첩 혐의로 처형을 당하게 되고
그녀도 1960년경에 사망을 했습니다.
[t-07.04.19. 220401-06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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