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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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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나기빈-볼프강 보르헤르트/밤에는 쥐들도 잔다.

by 탄천사랑 2007. 4. 23.

(단행본) 유리 나기빈 -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

 

 

버려진 벽에 뻥 뚫린 창구멍이 이른 저녁 무렵의 햇살을 풍성하게 받으며 보라빛 하품을 하고 있었다.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라 똑바로 서 있는 굴뚝의 잔해 사이에서 감실거리고 있었다.
페허는 쓰레기더미처럼 허물어져 덮인채 졸고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는 눈을 감고 있었다.
별안간 사방이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아이는 누군가 자기 앞에 조용히 다가와 막아선 것을 느꼈다.
곧 그들이 나를 끌고 가겠구나 ! 하고 아이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순간 보인 것은 낡은 바지를 입은 두 다리뿐이다.
그 두 다리는 안쪽으로 구부정하게 휘어 있었으므로 그 사이를 멀리까지 바라볼 수가 있었다.
아이는 그 다리를 따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한 나이 든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그 사내는 칼과 바구니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 손가락 끝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너 이곳에서 잠을 자는 모양이구나 ?  내 말 맞지 ?"


그러면서 사내는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사내의 다리 사이로 눈부신 해를 바라보며 위르겐은( 그것이 아이의 이름이었다) 대꾸했다.


"아니,  난 잠을 자는 게 아니에요.  이곳을 지켜야 하거든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넌 그 길다란 막대기를 들고 있구나 ?"
"예, 그래요."   큰 소리로 대답하고 위르겐은 막대기를 힘주어 잡았다.
"넌 뭘 지키는 거지 ?"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아이는 양손으로 막대기를 끌어잡았다.
"돈을 지키는 거냐?  그래 ?"   사내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려놓고 바짓가랑이에 칼을 문질렸다.
"아뇨. 돈 같은 걸 지키는 게 아니예요."   위르겐은 돈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제가 지키는 건 전혀 다른 거예요."
"그래,  그게 뭐냐니까 ?"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아무튼 다른 거예요."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해도 괜찮아.  그러면 나도 이 바구니 속에 뭐가 들었는지 절대로 안 가르쳐줄 테니까."


사내는 바구니를 발로 툭툭 걷어차며 칼을 접었다.
"흥,  그런 것쯤 얼마든지 알아맞힐 수 있어요."  위르겐은 시덥잖은 걸 가지고 잰다는듯이 말했다.
"토끼풀이잖아요."
"빌어먹을,  단번에 알아맞히는군 !"   사내는 놀란 것처럼 말했다.
"아주 똑똑한 녀석이군,  너 도대체 몇 살이냐 ?"
"아홉 살이예요."
"그래,  아홉 살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너  셋에 아홉을 곱하면 얼마인지도 알겠구나?"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위르겐은 시간을 벌기 위해 다시 덧붙였다.
"그런 것쯤 누워서 떡 먹기예요."   그런 다음 그는 사내의 다리 사이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셋에 아홉을 곱한다고 했죠?"   다시 한번 물은 다음 대답했다.
"27이지 뭐예요. 그 정도는 대번에 알 수 있어요."
"그래, 맞았다."   사내가 말했다.
"내게는 꼭 그 수만큼의 토끼가 있다."   위르겐은 입을 딱 벌렸다.
"스물일곱 마리씩이나요?"
"믿어지지 않으면 가서 보면 되잖아.  거의가 아직 아주 작은 새끼들이지만,  가서 보겠니?"
"나는 그럴 수가 없어요.  망을 봐야 하거든요."   위르겐은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계속 안 돼?"   사내가 물었다.
"밤에도 지켜야 하니?"
"그래요,  밤에도 마찬가지예요.  언제나 망을 봐야죠."


그러면서 위르겐은 다리가 굽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토요일부터 줄곧 그래왔어요."   아이가 증얼거렸다.
"그럼 넌 집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냐?  아무튼 먹기는 해야할 것 아냐."


위르겐은 돌덩이를 들추었다.
그 밑에 빵 반쪽과 양철 담배통 하나가 있었다.


"너 담배를 피우는구나?"   사내가 물었다.
"파이프도 있니?"   위르겐은 막대기를 더욱 힘주어 잡으며 우물쭈물 대답했다.
"담배는 종이로 마는 개 좋지,  파이프는 번거로워요."
"아무튼 안됐다."   바구니에 몸을 기울이며 사내가 말했다.


"토끼를 얼마든지 싫증날 때까지 볼 수 있을 텐데.
  무엇보다도 새끼들이 귀엽지.
  어쩌면 한 마리 정도는 네가 골라 가질 수도 있을거야.  그런데 너는 여기서 떠날 수가 없다니...,"
"안돼요."   위르겐은 슬프게 소리쳤다.
"안돼요.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사내는 바구니를 집어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여길 떠나지 않고 지켜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  정말 안됐다."   그리고 사내는 발길을 돌렸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가르쳐드릴게요."   위르겐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쥐들 때문이에요."   다리가 굽은 사내는 몸을 되돌렸다.
"쥐들 때문이라구?"
"네. 쥐들은 시체를 먹는데요.  사람의 시체 말이예요.  시체를 먹고 산대요."
"누가 그런 소리를 했지?"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그래서 넌 쥐들을 지키고 있는 거냐?"   사내가 물었다.


"쥐들을 지키는 게 아니예요!"   그리고 위르겐은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내 동생을 지키는 거예요.  내 동생은 바로 저 밑에 깔려 있어요.  저기 말예요."


위르겐은 막대기로 무너져 쌓인 담벼락 무더기를 가리켰다.


"우리 집에 폭탄이 떨어졌어요.
  별안간 지하실의 전기가 나갔어요
  그리고 그애도 없어졌어요.
  우리는 서로서로 불렀어요.
  그애는 나보다 훨씬 작았어요.
  겨우 네 살밖에 안 됐거든요.
  그애는 틀림없이 여기 어디 있을 거예요.
  그애는 나보다 훨씬 작았거든요."


사내는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불쑥 말했다.


"너희 선생님은 쥐들도 밤에는 잔다고 하시지 않았니?"
"아뇨."   위르겐은 속삭이듯 말했다.   별안간 몹시 지친 것 같았다.
"선생님은 그런 말 안하셨어요."
"아니,  그런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선생이 되었지?  엉터리네.
  얘야,  밤에는 쥐들도 잔단다.
  그러니까 밤에는 걱정 말고 집에 가도 돼.
  밤에는 쥐들도 반드시 자니까,  어둑어둑해지면 벌써 잔단말이다."


위르겐은 폐허더미에다 막대기로 작은 구명들을 팠다.


- 여기서 자라고 해야지.
  쥐새끼들 잠자리는 이 정도면 될 거야.
  그것들은 그렇게 작으니까 -  그는 생각했다.


그때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순간, 그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얘야, 난 그만 돌아가서 토끼들에게 먹이를 줘야겠다.
  날이 저물면 널 데려다 주러 오마.
  까짓,  네게 토끼 한 마리 갖다 줄까?
  제일 작은 놈으로 .  어때?"


위르겐은 폐허더미에 다시 작은 구멍 하나를 팠다.
작은 토끼를 위해서.
하얀 놈일지,
잿빛 나는 놈일지,
아니면 두 가지 색이 섞인 놈일지 모르는 작은 토끼를 위해서.


"난 알 수가 없어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위르겐은 다리 굽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밤에는 쥐들도 잠을 자는 건지 말예요."


사내는 무너지다 남은 담을 넘어 길로 걸어갔다.
거기서 그는 말했다.


"물론이지.
  그것도 모르면 너희 선생님은 그만두는 게 좋겠다."   그러자 위르겐은 일어서면서 말했다.
"한 마리 주시겠어요?  하얀 놈으로."
"그래, 알았다."   사내는 걸음을 옮기면서 소리쳤다.
"그런데 너 꼭 거기서 기디려야 한다.
  내가 너를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말이야. 알았지?
  나는 너희 아버지한테 토끼장 만드는 법을 그르쳐드려야겠다.
  너희도 알아야 할 테니까."


"네, 기다릴게요."   위르겐이 소리쳤다.
"밤이 되기까진 지켜야 하니까요. 꼭 기다릴게요."   그리고 아이는 다시 소리쳤다.
"우리 집에는 판자도 있어요. 궤짝 망가진 판자예요."


하지만 사내의 귀에는 이미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굽은 다리로 휘청휘청 걷고 있었다.
해는 벌써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위르겐은 사내의 다리 사이로 붉은 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사내의 다리는 그 정도로 휘어 있었다.
사내가 걸음을 빨리하는 데 따라 바구니가 앞뒤로 흔들렸다.
그 안에는 토끼풀이 들어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써서 잿빛이 도는 파란 토끼풀이. (p73)

 

※ 이 글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유리 나기빈 -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짧고 쉽게 읽히는 세계 명단편 콩트 모음)
역자 - 이인환
성심도서 - 1991.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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