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유용주 - 「그러나 나는 살아 가리라」
많이 아팠다.
길을 더럽히는 족속들은, 길은, 한번 자나 가면 종족이 묘연하다더니, 자취가 없다느니,
흔적을 찾을 수 없다드니 하면서 길을 함부로 대한다.
그러나 길처럼 뚜렷한 흔적은 이 세상에 없다.
사진 판독기보다 더 극사실로 길은 지나간 사람들의 자취를 기억한다.
길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자국 정도는 우습다.
지나가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 들이쉬고 내뱉는 숨소리에서 몸 냄새까지 오래도록 저장하고 있다.
길을 함부로 대하면 다시는 그 길을 갈 수가 없다.
길가에는 아무렇지 않게 있다가 결정적일 때 증언하는 나무와 풀이 무수하게 살아 눈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함부로 내디뎌 신발 밑에 깔려 죽은 뭇 생명들의 원혼이 수천 년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늘 걸어도 두렵고 떨리는 삶이라는 고행 앞에 다시 추운 겨울이 서 있다.
이 정도의 아픔은 견뎌야지, 아픔이 없으면 견디는 힘도 사라진다.
순한 암소처럼 평생 엎드려 일만 하시다가 결국 일터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쉰이 훨씬 넘은 오늘날까지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누님을 대신하여 동터오는 새벽,
눈물로 씻은 쌀을 안치고 불을 지핍니다.
이 땅에 테어난 죄로 숨이 끊어질 때까지 뼈 빠지게 일하고도 늘 가난을 짊어지고 사는
어렵고 서러운 이웃들에게 (저 북녘 땅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조촐한 밥 한상 차려 올립니다.
뜨끈할 때,
천천히,
많이많이 드십시오. (p5)
- 2002년 가을 초입 서산에서
유용주.
(산문집) 유용주 -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솔 - 2000. 12. 15.
'내가만난글 > 갈피글(시.좋은글.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로야나기 테츠코-창가의 토토/리드미크 (0) | 2022.09.03 |
---|---|
유시민-유럽도시기행 1/피레우스에서는 드라이브를 (0) | 2022.08.19 |
김승현-이야기가 있는 미술관/4장 벽을 넘어, 사로잡힌 사람들 (0) | 2022.07.07 |
강원국-나는 말하듯이 쓴다 (0) | 2022.06.04 |
장 자끄 상뻬-얼굴 빨개지는 아이 (0) | 2022.05.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