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 「유럽도시기행 1」
세 번째 날 낮 시간을 온전히 피레우스에서 보냈다.
피레우스에는 두번 가보았다.
처음에는 전철을 타고 가서 도보여행을 했고, 두 번째 갔을 때는 렌터카를 썼다.
피레우스에도 역사 공간이 없지는 않지만 무엇을 보러 간 건 아니었다,
아테네에는 딱히 더 보고 싶은 데가 없어서 바닷가로 소풍을 갔을 뿐이다.
아테네 시내 여행은 대중교통으로 충분하지만 피레우스는 운전하며 다니는 게 훨씬 나았다.
아테네 도심을 벗어나면 길이 좋아 운전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무덤, 무너진 성벽과 돈대, 박물관 같은 곳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으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카페리에 차를 싣고 살라미스섬을 방문하는 것도 권장할 만하다.
살라미스섬에는 산모퉁이 아래에 조용히 숨어 있는 작은 백사장이 여럿 있었다.
하얀 선배드 몇 개, 바람에 흔들리는 차양 아래 나무 탁자 두어 개를 두고 흰색 앞치마를 두른 털북숭이 남자가
소박한 음식과 음료를 내오는 카페에서 바닷바람을 마시며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스마트폰을 동영상 모드로 놓고 먼 곳을 바라보고 앉아 있자니
'그리스인 조르바'를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 되는 것,
무얼 위해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근심하며 종종걸음을 친단 말인가.'
피레우스에서는 그저 바다를 끼고 차를 몰기만 하면 되었다.
부산 수영만 요트 계류장 비슷한 곳이 숱하게 많았는데, 소형 요트가 빼곡히 정박한 곳일수록 분위기가 정겨웠다.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오래된 타베르나(taverna, 그리스 전통 음식을 파는 일반 음식점)들이 있었고,
음식 맛은 어디나 비슷했다.
바닷가 식당이라고 해서 해산물 요리만 하는 건 아니었다.
뒷골목에는 주로 주민들이 밥을 먹는 동네 식당이 있고, 젊은이 취향의 카페와 비스트로는 큰길가에 있었다.
피레우스에 가면 항구에서 동쪽으로 해변을 따라 드라이브를 즐겨야 한다.
지중해를 끼고 고급 호텔과 멋진 빌라, 대형 요트,
전망 좋은 카페를 구경하면서 달릴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가 아무 데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그런 기회를 놓친다면 두고두고 아까울 것이다.
피레우스 바닷가를 달리는 동안 아테네에서 느꼈던 애잔한 감정을 다 잊고 나도 몰래 탄성을 질렀다.
'와아, 그리스에 부자 많네!'
피레우스의 모습은 고대와 달라졌지만 아테네와의 관계는 여전한 것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이 들어오고 나가는 아테네 관문이라는 말이다.
고대에는 원정에 나서는 아테네 시민군이 그 항구에서 떠났고 포로와 전리품,
전사자의 시신과 부상자들도 같은 항구로 들어왔다.
난민 소녀 아스파시아도,
펠로폰네소스전쟁 때 아테네 상주인구의 1/3을 죽였던 전염병도 모두 피레우스를 거쳐 아테네에 숨어들었다.
오늘날 피레우스는 연안 여객의 중심 역할을 한다.
에게해의 섬을 오가는 관광객과 상품이 대부분 이곳을 거쳐 나고 든다.
내전을 피해 목슴을 걸고 지중해를 건넌 난민들도 피레우스에 들어오고 싶어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다니기만 해도
낯선 외국에 온 기분을 한껏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피레우스 소풍의 매력이었다. (p81)
※ 이 글은 <유럽도시기행 1>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유시민 - 유럽 도시 기행 1
생각의길 - 2019.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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