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일보 2022.10.31 - 시가있는 아침」
림삼의 초대시
나의 그 밤
휘영청 달빛 밝더니만
선연한 별빛 쏟아지고
아득히 오래 전부터 나 보아왔던
달,
별,
언제까지라도 나 보고있을
달,
별,
잘게 부서지는 달빛, 잘게
쉬 내리꽂히는 별빛, 쉬
고스란히 몸 위 내려앉아서
잠시 잠깐
자연의 일부 되어가다
나는 예 앉아있더니만
나는 저기 밤하늘 높이
솟아 오르고 있네
솟아 오르고 있네, 훨 훨
손 뻗어
달을 만지고
별을 보듬고
무수한 뇌리 속의 하많은 영상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달려나온
그 밤, 나의
시작노트
어영부영 하는 사이에 벌써 두 장만 달랑 남겨졌다. 하마 11월이라는 말인가? 새 해 들어서 다짐하던 것들이 하 많아서 차례로 하나씩 이루리라고 작심했었는데, 돌아본즉 제대로 갈무리한 건 단 한 자락도 없이 세월만 잡아먹었다. 후회와 미련의 날들만 채곡이 쌓여 한숨으로 내닫고 있는 한 해 끝자락이다. 이제 어쩌란 말인가? 반성한다고 되돌릴 수 없음이며, 회한으로 붙잡는다고 남아나지 않을 가버린 날들이, 늘어난 주름살 깊이 박혀들고 있는 아침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냥 철푸덕 주저앉아 엉절거릴 수만은 없고, 비록 제대로 알차게 메꾸지 못한 이제까지의 살이였지만 삶의 날들이 아예 끝나는 건 아니니, 일단은 남은 날들에는 조금이라도 실팍한 제목을 만들어 살아보고, 목하 다시 밝아올 날들을 대비해서 단단한 각오와 다짐의 채비를 갖추어야 할 때다. 어언 황혼이 멀지 않은 삶의 단계, 앞으로 밝은 날이라고 하는 상큼한 맛의 햇살을 얼마나 더 반겨맞을 수 있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노릇이니, 하루 하루를 마지막이라고 여기며 최선을 다해 알차게 메꾸어 나가야겠다.
살아온 숱한 날들과 그 만큼의 밤들, 무수한 사연들과 줄거리들을 품고 있는 삶의 일기장에 써놓은 긴 넋두리가 결코 헛되게 사그러들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조바심이, 혼미해져가던 정신줄에 긴장을 심어준다. 자! 어차피 오늘은 내게 열리는 내 삶의 첫날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연륜은 아무 필요가 없다. 새로 시작하는 새 길을 걷는 거니까 말이다. 정신 차리고 생소한 삶의 새 날을 열어제끼자. 도전과 창조의 기운으로 힘차게, 힘을 내서 활짝 열어보자.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듯이 내 마음도 날마다 깨끗하게 씻어 진실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면 좋겠다. 집을 나설 때 머리를 빗고 옷매무새를 살피듯이 사람 앞에 설 때마다 생각을 다듬고 마음을 추스려 단정한 마음가짐이 되면 좋겠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치료를 하듯이 내 마음도 아프면 누군가에게 그대로 내 보이고 빨리 나아지면 좋겠다. 책을 읽으면 그 내용을 이해하고 마음에 새기듯이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그의 삶을 이해하고 마음에 깊이 간직하는 내가 되면 좋겠다.
위험한 곳에 가면 몸을 낮추고 더욱 조심하듯이 어려움이 닥치면 더욱 겸손해지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내가 되면 좋겠다. 어린 아이의 순진한 모습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듯이 내 마음도 순결과 순수를 만나면 절로 기쁨이 솟아나 행복해지면 좋겠다. 날이 어두워지면 불을 켜듯이 마음의 방에 어둠이 찾아 들면 얼른 불을 밝히고 가까운 곳의 희망부터 하나하나 찾아내면 좋겠다. 한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11월의 단상을 조용히 진솔하게 묵상하며 이를 계기로 하여 더욱 새롭게 거듭나는 내 인격이 되면 참 좋겠다.
눈이 색깔을 좋아하고, 귀가 소리를 좋아하고, 입이 맛을 좋아하고, 마음이 이익을 좋아하고, 신체, 피부, 근육은 상쾌함을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기능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먼저 취하는 특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내 생각은 과연 어떤 것을 좋아할까? 사람은 오래오래 생각한 것을 닮아간다고 한다. 오랫동안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침내 그 모습을 닮아가고, 오랫동안 공부를 한 사람은 학자의 모습을 닮아가고, 둔한 생각만 한 사람은 수전노의 생각을 닮아가고, 오랫동안 꿈을 꾸는 사람은 어린 왕자 같은 모습이 되고, 그렇게 마음에 오래오래 담아두고 있으면 마침내 그걸 닮아간다는 사실, 참 신기하다.
자! 이제 오늘부터의 삶은 어차피 새로 시작하는 삶이니, 다시 살아내는 삶의 이야기에서는 될 수 있으면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긴장을 풀고 몸을 부드럽게 하리라. 지금까지보다는 좀더 우둔해지리라. 가능한 한 매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보다 많은 기회를 붙잡으리라. 여행을 더 많이 다니고 석양을 더 자주 구경하리라. 산에도 더욱 자주 가고 강물에서 수영도 많이 하리라. 아이스크림은 많이 먹되 콩요리는 덜 먹으리라.
실제적인 고통은 많이 겪을 것이나 상상 속의 고통은 가능한 한 피하리라. 보라, 나는 시간시간을, 하루하루를 의미 있고 분별 있게 살아가는 사람의 일원이 되리라. 나는 많은 순간들을 맞았으나 삶을 다시 시작한다면 그러한 순간들을 더 많이 가지리라. 사실은 그러한 순간들 외에는 다른 의미 없는 시간들을 갖지 않도록 애쓰리라. 오랜 세월을 앞에 두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대신 이 순간만을 맞으면서 살아가리라.
그러고보니 나는 지금까지 체온계와 보온 물병, 레인코트, 우산이 없이는 어느 곳에도 갈 수 없는 그런 무리 중의 하나였다. 이제는 인생을 다시 살게 될 터이니, 이보다 장비를 간편하게 갖추고 여행길에 나서리라. 초봄부터는 신발을 벗어던지고 늦가을까지 맨발로 지내리라. 춤추는 장소에도 자주 나가리라. 회전목마도 자주 타리라. 데이지 꽃도 많이 꺾으리라. 그렇게 올 한 해의 끝무렵에 다시 이어지는 하루의 삶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로 살아가리라. 누구에게도 낯설지 않은 보통 사람이 되어 그들과 함께 호흡하리라.
아무리 부자라도 미소가 필요 없는 사람은 없고, 아무리 가난해도 미소조차 짓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 미소는 집안에 행복을 남게 하고, 일 가운데 지탱이 되어주고, 모든 고통의 치료제가 된다. 미소는 피로를 풀어주고, 실망한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며, 슬퍼하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어준다. 미소는 사거나 빌리거나 훔칠 수 없다. 미소 짓는 그 순간에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더 많이 활짝 미소 짓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내의 마음 속에 담아둔 것, 그걸 한 번 꺼내본다면 그건 뭘까? 문득 생각해보게 된다. 돈일까? 사랑일까? 명예일까? 성공일까? 뭔가를 오래오래 생각하면 그 모습이 된다는 사실, 어쩌면 참 두려운 사실인지도 모른다. 마음 속에 담아두는 것도 일종의 선택일텐데, 나는 어떤 것을 시선에 담는 중인가? 어떤 것을 귀에 담고 어떤 것을 마음에 담는 중인가? 생각한대로 닮는다는데, 그렇다면 나는 지금 알게 모르게 나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중이다.
며칠 전부터 컨디션이 약간 좋지 못했는데 몸살기운이 오더니, 주말이 되면서 몸과 맘이 덜컥 고장이 났다. 무조건 푸욱 쉬어야겠다. 마음 먹은대로 될 지는 모르겠지만. 환절기만 되면 어김 없이 찾아오는 감기, 이 부실한 몸뚱아리는 용케도 계절을 알아 버릇처럼 통과의례를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이젠 가을을 아주 보내야 하는 마지막 가을비로 마음의 아침을 열게 되는 것 같다. 움추릴 시간들의 뒤로 언젠가는 다시 찾아올 새 봄을 기약하는 작은 나무들처럼, 비록 쌀쌀한 삭풍의 기운이 누리를 덮어도 우리의 어깨 활짝 펴고 상쾌한 아침의 기상을 머금어야 할 것이다.
창가에 드리워지는 겨울 기운과 싸아한 겨울 내음, 이제 그조차도 하나 둘 반기며 맞이해야겠다. 겨울로 넘어가는 일들이 모두 작게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작은 일들이 쌓여서 종내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이렇게 계절이 돌고 도는 사이로,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사이로, 우리네 삶의 이야기들이 순서대로 탑쌓아가는 진리를 조용히 음미한다. 숱한 그 밤들이 무르익어 계절의 한 켠에서 켜켜이 나이 먹어가고 있다. 바야흐로 11월이다. 그리고 시방은 분명 겨울의 초입이다.
출처 : 서울일보 http://www.seoulilbo.com
[t-22.11.01. 211103-15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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