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덕 - 「지금 잠이옵니까?」
66년 여름의 일이다.
나는 고 이병철회장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실인즉 지금 삼성그룹 회장인 이건희군이 서울사대부고 동기인데
외국유학 중이던 이군이 잠시 귀국했을 때 장충동 자택에서 우연히 그런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회장은 아들과 아들의 친구에게 이런저런 말씀을 물었다.
그냥 그렇게 묻는 말씀에 대답이나 하고 끝냈으면 좋았을 걸
내가 공연히 주제넘는 얘기를 한 게 일생 두고두고 잊지 못할 교훈의 말씀을 듣게 된 계기였다.
"정부가 한일협력자금을 어떻게 분배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경제계 모습이 훨씬 달라지겠지요?"
내깐에는 신문줄이나 읽고 얻은 지식을 근거로 해서 드린 말씀이었다.
당시 우리 정부는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확보한 약 6억달러의 자금을 가지고
기간산업의 우선순위에 따라 민간기업들에게 그 돈을 배분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의 말은 그 자금을 누가 얼마만큼 얻어 걸리느냐에 따라 판도가 바뀌지 않겠느냐는 얘기였고
그게 또 당시의 상식이었다.
그때는 양산(햇빛을 가리는 우산)공장 하나만 제대로 운영해도 재계 랭킹 3. 4위에 오르는 세상이였으니까
몇 백만불 또는 몇 천만불의 자금을 빌려 공장을 짓고 나면 그 즉시 랭킹이 변할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
그런데 뜻밖의 말씀이 되돌아왔다.
'홍군! 들어봐라.
그 돈을 다 써서 공장을 짓는다 캐도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의 2%도 못된다.
그 돈으로 공장을 지어본들 몇개나 짓겠노.
사업거리는 무진장으로 널려 있다."
이회장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얼떨떨했다.
아니 그 엄청난 자금으로 공장들을 다 짓는다 해도 당신 머릿속에 있는 규모에 비하면 2%도 안된다니
도대체 무슨 사업거리가 얼마나 더 많이 있길래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
그 어마어마한 배포에 기가 질리다못해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곰곰 생각하면서
나는 이회장이 나한테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진짜 교훈을 차츰 이해할 수 있었다.
인구 2천9백만(당시)의 나라가 제대로 역량을 발휘한다면
그까짓 몇 억달러의 자금으로 지어진 공장 따위는 2% 규모도 채 되지 않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한국 제일의 기업군을 거느리는 사람이라면 마음속에 그만한 배짱과 궁량을 가져야만 한다는 게
그날 이회장이 들려주고자 했던 말씀이었음을 차츰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이병철회장의 탁월한 안목과 뱃심은 새삼 경탄스럽다.
내 눈으로 지켜봤던 이 나라의 기업발달사가 이를 입중한다.
예컨대 내가 대학을 졸업했을 무렵 우리경제를 이끌던 기관차이자 산업의 총아는 합판과 가발이었다.
동명목재, 천우사 등 지금의 젊은 세대는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회사들이
합판수출로 재계 톱랭킹에 들어있었고 다나, YH 등은 가발 수출로 중견그룹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와같은 산업이나 업종은 인구 4천만의 국가에게 발전과정의 한 징검다리 였을 뿐이었다.
이를 간과한 채 업종전환을 서두르지 않았던 기업들은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져 갔던 것이다.
나는 지금의 우리 경제규모를 놓고
'이것은 내 머릿속에 있는 산업의 2%도 채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기업가나 젊은이들을 만나고 싶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결코 허풍이 아니다.
가령 지금 국내에서 가장 신화적인 돈벌이를 하는 게 삼성반도체인데
일본의 경우 컴퓨터 게임기로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닌텐도 하나가 연간 20억달러의 순익을 올리고 있는 판이다.
그것이 안경이건, 시계이건, 카메라이건, 또는 컴퓨터그래픽이나 정보화와 관련된 소프트웨어이건,
눈을 들어 세계시장을 살핀 후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를 제대로 잡기만 한다면
지금의 우리경제 규모를 목표치의 2%로 상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2천3백만의 인구를 더 보태게 된다.
그들이 사회주의사회 특유의 무기력과 나태를 안고 있다 하더라도 치밀하게 준비된
재교육 프로그램만 준비해두면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수준의 최고 양질의 노동력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일을 염두에 두고 21세기를 설계해야 한다.
이 나라의 지도층이,
만약 지도층이 그것을 거부하면 이 나라의 젊은 세대들이 2020년의 우리 한반도 경제규모를
지금의 50배쯤으로 상정해 놓고 앞날을 설계하자는 얘기다.
영화산업 하나만으로 40억달러를 벌어들이는 미국,
국내에서만 1천2백만 내지 1천4백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일본,
기계류 하나만으로 2백억달러의 수출을 달성한 독일을 보라.
지금의 50배 경제규모를 상상하는 게 왜 불가능하단 말인가.
더구나 우리는 머지않아 세계제일의 경제대국으로 일어설 12억 중국시장을 바로 옆에 두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요즘들어 부쩍 이병철회장의 2% 배짱을 자주 되새기곤 한다. (p152)
※ 이 글은 <지금 잠이옵니까?>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홍사덕 - 지금 잠이 옵니까?
베스트셀러 - 1996. 07. 12.
'내가만난글 > 비문학(역사.사회.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레고리 E. 랭-아들에게 엄마가 필요한 100가지 이유 (0) | 2022.07.23 |
---|---|
아주 사적인 긴 만남 - 3/1별과 디펜스 (로잔에서 조윤석 올림) (0) | 2022.06.30 |
이동진 외-퇴사준비생의 도쿄/2. (요리사가 없어도 요식업을 할 수 있을까?) (0) | 2022.06.20 |
토이바(Toiba) (0) | 2022.06.14 |
이동진 외-퇴사준비생의 도쿄/프롤로그. (0) | 2022.05.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