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영 - 토이바(Toiba)」
토이바(Toiba)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아침 햇살입니다.
더운 여름이지만, 그래도 이른 아침은 상쾌했습니다.
토이바는 넌(화덕에서 굽는 빵) 없이 미지근한 초이(주식으로 마시는 차 )한 잔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두 남동생을 데리고 언제 떠날지 모를 이동급식소로 가기 위해 나섭니다.
이 마을을 떠나 본 적이 없는 토이바는 아프가니스탄이 온통 이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산이고 광야이고 할 것 없이, 물도 나무도 없는 온통 자갈과 뜨거운 태양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제보다 이른 시간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급식소 줄은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토이바는 동생들을 앞쪽에 세우고 얼른 줄에 바짝 다가섰습니다.
줄 옆으로 비켜서서 앞뒤 사람들을 보던 토이바는 덜컥 걱정이 되었습니다.
'급식을 받지 못하면 어떡하지?
우리 것만 받고 집에 있는 가족들 것을 못 받게 되면 안 되는데-----'
드디어 차래가 되어 되었지만 급식대 위에는 부스러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토이바를 보며 급식을 나눠주던 외국인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오늘은 네가 너의 가족들을 위해 가져갈 수 있을 것 같구나.
오늘부터 급식용 넌이 조금 더 많아졌거든." 하며 천막에서 넘을 두 팔로 한아름 들고 나왔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기뻐하며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토이바는 동생들과 넓직한 넘을 하나씩, 세 개나 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동네 입구에 다다랐을 때 토이바 건너편에 사시는 할아버지가 대문 앞에 앉아 뭐라 중얼거리고 계셨습니다.
라흐만 할아버지었습니다.
전쟁 통에 가족과 흩어져서 혼자 지내는, 더구나 몸이 불편해 급식소에도 가지 못하는,
이웃들이 조금씩 가져다 주는 년으로 근근이 살고 있는 할아버지입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넌 조각 중 하나, 셋 중에 중간 크기의 것을 건네주었습니다.
"할아버지 들어가셔서 차하고 드세요." 할아버지가 넌을 받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토이바. 신이 너에게 은헤를 베푸시기를 빈다." 토이바는 퍼뜩 생각이 났습니다.
"아-- 네, 맞아요. 신이 계시지요.
신이 제발 저에게도 은혜를---"
토이바는 신이 제발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언제나 자기를 외면하거나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은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어김없이 절을 하는 어른들의 생각 속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토이바 아버지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폭격으로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사람들이 주어 온 막대기를 쪼개어 왼쪽 다리에 매어 주었지만 길이가 짧아 뒤뚱거리셨습니다.
그런데 화가 나면 그 나무다리를 빼어 들고 가족들에게 소리치고 때리기도 했습니다.
토이바는
아버지도 탈레반이기 때문에 분명 꾸란의 내용처럼 선하고 인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신의 뜻도, 탈레반도, 가난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버지를 꽉 붙잡고 있는 아버지의 신이 제발 아버지를 다시 예전의 좋은 아버지로
돌려놓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는 막내를 낳다가 잘못되어 일 년 넘게 누워 계십니다.
아홉 살 토이바는 쇠똥을 얻어다가 납작하게 만들어 말리는 일,
남의 밭에 떨어진 곡물을 주워 오는 일 들을 도맡았고, 한 살 위인 언니 자이다가 엄마 대신 집안일을 했습니다.
토이바도 키가 한 뼘쯤 더 자라면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되고,
긴 부르카를 써야 하며 자신과 결혼할 남자를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토이바는 그 사실이 너무 싫었습니다.
아직 토이바는 대문 밖이 별로 무섭지 않았습니다.
남동생과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는데, 얼마 후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속상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초이와 넌이예요.
토이바가 오늘은 넌을 둘이나 받아왔어요
아직 따뜻해요. 어서 드세요."
자이다는 마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능숙하게 막내를 안고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두 동생이 아버지에게 토이바가 라흐만 할아버지에게 넘을 하나 준 사싷을 일러바쳤습니다.
아버지의 무서운 눈초리가 토이바를 향했습니다.
얼굴은 이미 일그러지고 험상굿게 변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급기야 뜨거운 초이 주전자와 넘을 뒤엎고 나무다리를 뽑아 들었습니다.
그날 밤이었습니다.
언니는 토이바의 등과 다리에 멍든 곳을 주물러 주다 잠이 들었습니다.
누가 흔들어 깨우는 인기척에 눈을 뜨니 온통 땀투성이 엄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잘 들어라." 엄마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분명했습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또 한참을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고는 말을 계속하셨습니다.
"어디까지 말했지?
그래, 그렇게 작은 개울을 건너면 무성한 나무들이 모여 있는 숲이 나온단다.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낮에 그곳에 들어가면 서늘할 정도지.
이 숲을 지나면 사람들은 마음이 많이 착해진대
토이바 어때, 그곳을 보고 싶지 않니?"
토이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습니다.
엄마는 마치 딴 세상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가고 싶어요. 다녀와도 되나요?"
"토이바, 잘 들어라.
그곳들을 지나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쓰는 공동 우물이 있는 마을이 나온단다.
그리 크진 않지.
그 마을의 맨 끝 집에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서.
할머니 이름은 '굴라 블로스'야
일어나서 지금 바로 할머니께 가거라.
그분은 너의 외할머니란다.
이제 여기서 이 집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단다.
...
...
가는 동안 무섭지 않을 거야.
하늘을 만들고, 너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너를 지켜주실 거야"
엄마의 말을 들으니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엄마는 시집 올 때 외할머니가 주셨다는 붉은 실과 바늘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할머니께 보여 드리고,
'엄마의 이름은 워디야예요. 저는 아홉 살 토이바예요.
할머니와 함께 살려고 왔어요'라고 말씀드리면 너를 받아 주실 거야."
엄마는 낮에 드시다가 숨겨 놓았던 넌 조각을 토이바의 손에 꼭 쥐어 주었다.
그리고 토이바를 꼬옥 안아 주고는 어서 가라 등을 떠밀었습니다.
"엄마, 제가 나중에 켜서
꼭 엄마를 만나러 다시 찾아올게요."
토이바는 마지막으로 집안을 한번 휘 돌아보았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발뒤꿈치를 들고 마당을 지나 살금살금 걸어 대문을 나섰습니다.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와서 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
어느 누구에게 들키지 않고 갈 수 있을까.
할머니는 나를 받아 주실까.
할머니는 ---살아 계실까---"
집을 나선 토이바는 뛰기 시작했습니다.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자갈이 쿡쿡 찌르고 발바닥에 박혀도,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이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는 멈춰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들켜서 집으로 끌려가게 된다면 분명 죽임을 당할 거란 생각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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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이었는데, 검은 돌들이 반짝이는 곳이었습니다.
윤기가 없는 돌들은 아픈 엄마의 짙고 검은 머리카락만큼이나 검었습니다.
토이바는 숲에 들어섰습니다.
멀리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면 숲으로 들어가 숨어서 자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늦은 오후가 되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숲의 끝 자락이 어럼픗하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토이바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습니다.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외할머니가 살고 있는 마을이 틀림없다고 토이바는 생각했습니다.
엄마의 말대로 큰 나무가 있고 그 옆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나이 많은 언니들이 물을 떠가고, 빨래를 하는 아주머니들도 있었습니다.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할머니들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 할머니들 중에 외할머니가 계실지도 몰라!'
토이바는 심장이 쿵쿵거리며 빨리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야만 숲을 벗어날 용기가 생길 것 같았습니다.
하늘을 보니 한참을 더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해가 저물었습니다.
토이바는 숨을 죽이며 우물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물을 한 번 들이키고 세수를 했습니다.
우물을 시작으로 마을은 산마루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집들은 비교적 작았지만 대문도 달려 있고, 계단도 있는 것이 깨끗하고 좋아 보였습니다.
이제 한 집만 지나면 마지막 집입니다.
토이바는 마지막 집 대문 앞에 섰습니다.
엄마가 주신 붉은 실과 바늘을 다시 한번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할머니가 나를 반겨 주시지 않으면 어떡하지
할머니가 정말 계시기는 한 걸까?'
갑자기 토아바보다도 더 큰 늑대만한 들개가 나타났습니다.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는 그런 들개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토이바는 너무 무서워 자기도 모르게 대문을 밀고는 얼른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마당은 작지만 깨끗했습니다.
호롱불 빚이 새어 나오는 방 안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밖에 누구시요?"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호롱불을 들고 나오셨습니다.
토이바는 무서움에 뒤를 돌아보며 몇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습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저는 토이바예요.
저의 엄마 이름은 워디아이고요.
할머니 이름은 굴라 블로스이시죠?
엄마가 알려 주셨어요.
엄마가 할머니께 이걸 보여 드리라고 했어요."
토이바는 한 번에 막힘없이 자신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꼭 쥐고 있던 붉은색 실과 바늘을 할머니께 보여 드렸습니다.
"이걸 보시면 할머니께서 절 믿으실 거라고 하셨어요.
엄마가 저에게 할머니를 도우며 살라고 하셨어요."
할머니는 너무나 놀란 눈으로 토이바를 아무 말 없이 보고만 계셨습니다.
"오--- 토이바.
네가 내 딸 워디야의 딸이로구나.
잘 왔다. 저녁은 먹었느냐?" 할머니는 토이바의 두 손을 꼭 잡아 주셨습니다.
"들어가자.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오면서 보얐던 것들을 얘기해 줄래?" 토이바는 할머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혼자 살고 있다.
넌은 매일 옆집에서 갔다 주지.
그러나 과일은 좀 있단다.
지금 먹을 것이라고는 이것뿐이란다."
할머니는 작은 연둣빛 포도 한 송이와 살구만 한 토마토 두 개를 토이바 앞에 내어 주셨다.
"할머니, 걱정 마세요.
이젠 제가 할머니를 도와 드릴께요.
할머니를 만나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며 토이바를 안아 주셨습니다.
토이바는 할머니의 웃는 얼굴에서 엄마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엄마는 할머니를 닮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할머니 품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할머니 품에서는 엄마 냄새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p85)
※ 이 글은 <토이바>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김윤영 - 토이바
빛나는새벽별 - 2010. 04.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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