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 「작은 풍요(삶의 자율성 회복을 통한 기업과 사회의 재구성)」
Ⅰ- 문제의 뿌리
1. 경제 위기는 삶의 위기!
만일 우리 인류가 끝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만일 어제의 문명이 이미 뿌리 뽑혔음을 인정하고,
대신 새롭게 승인된 문명 속에서 새롭게 재편성될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사라진 옛 세대의 표현대로 수치감 속에서 학대당하며 사는 삶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V. 포레스테(프랑스 작가)
1997년 말,
외환 위기에 직면한 한국 정부가 IMF 등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부터 한국 사회는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의 '아버지'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고 '아들과 딸', 그리고 '어머니' 모두가 고개를 숙일 판이다.
어떤 이는 1~2년만 참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고, 또다른 어떤 이는 10년은 갈 것이라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본격적인 M&A(인수및 합병) 물결이 시작되면 외국 자본이 한국 기업과 은행을 죄다 '초토화'시킬 것이라 한다.
경제 위기 - 그 내인과 외인
1997년 11월,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고 마침내 정식으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이것이 '신탁통치식'의 구조 조정으로 연결된 이 종합적 상황을
우리는 대개 'IMF 시대' 또는 '한국의 경제 위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한국의 경제 위기는 훨씬 더 심충적인 부분에 놓여 있으며
그것도 1997년 말의 IMF 구제금융 시기보다 훨씬 전부터 이미 존재해 왔다.
경제 위기의 역사적 고찰
지금까지의 한국 경제 발전 과정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본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다.
첫째. 봉건 사회 말기에 태동되던 초기 자본주의적 싹들이
제국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싹으로 '접붙이기'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봉건 사회 말기의 동학농민전쟁에서와 같이
'아래로부터' 터져 나온 민중들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요구가 지배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압살되고,
대신에 반외세를 지향하는 민족주의적 의식이 상대적으로 매우 강력하게 발전한다는 것이다.
둘째. 해방 이후의 공간에서 전평과 같은 민중 세력이 비자본주의적 독자 발전의 길을 모색하였으나
이러한 노력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등 지배 세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억압되었다는 사실이다.
셋째. 바로 그러한 기반 위에 반공이념을 바탕으로 한 교육체계가 수립되고
이것은 세계시장 지향적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한 노동력(왕성한노동 의욕과 적절한 노동능력)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값싸게 생산하는 '사회적 공장' 역활을 하게 된다.
넷째. 이 과정에서 '강력한' 국가 (막강한 관료 엘리트, 군-경, 중앙집권적 개발계획 등)는
인적 자원에 대한 교육과 훈련뿐만 아니라 금융기관을 장악하고 해외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적극 도입하여
경공업으로부터 중화확 공업, 첨단공업에 이르기까지 경제개발계획을 '신축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다섯째. 그러나 최근 들어 국가의 강력함은 상대적으로 약해졌고 따라서 간헐적으로 폭발하는
축적 위기 굳면을 신속- 유연하게 무마할 수 있는 역량
(예컨데 긴급 구제금융을 통한 대형 연쇄 부도 방지. 공권력 투입을 통한 노동운동의 사전 봉쇄 등)이
거의 무력화되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에 투자한 세계 자본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높은 이윤에 대한 기대감과 신뢰감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고,
마침내 1997년 말 '외황 위기'가 터지고 'IMF 시대'가 오게 된 것이다.
한국의 위기 - 세계 자본과의 연관성
'국가부도'니, '제2의 국치'니 하는 말들로 우리를 괴롭혔던,
그러나 이제는 정리해고나 대량실업,
가정파탄과 인간성 파괴라는 극한 상황으로 우리를 옥죄고 있는 ‘IMF 시대’를 과연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하나?
우리가 보건대,
'IMF 시대'란 축적 위기에 처한 한국 자본의 내적 필요와
세계 자본의 내적 필요가 '외환위기'를 매개로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개방화, 탈규제화, 민영화, 유연 · 합리화 등을 주요 축으로 하는
IMF식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한국 자본의 내적 필요라는 측면을 살펴보자.
앞서 살폈듯이 한국 자본은 상대적으로 유연하면서도 강력한 국가를 등에 업고
매우 효율적으로 몸을 불려왔다(재벌-국가 복합체).
그것이 관치금융이고 정경유착이며, 문어발 경영이나 재벌 공룡의 배경을 이룬다.
그러나 이 과정은 국가의 효율성이 떨어지거나
상대적으로 노동운동의 힘이 강해지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운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위기’를 통해서라도
새로운 축적의 조건들을 과감하게 정비해 나가는 ‘기회’가 필요했다.
흔히 ‘위기를 기회로’라는 구호와 함께,
고비용-저효율의 구조를 과감히 뜯어 고치자라는 주장이나,
아니면 비효율적인 기업의 M&A나 과잉 노동력에 대한 군살빼기식 정리해고가 별다른 규제도 받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이런 한국 자본의 필요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다음으로 세계 자본의 필요라는 측면을 보자.
세계 자본주의의 변동과 관련해서는
한마디로 과잉축적과 과잉생산이 현재 세계 자본의 움직임 뒤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은 한편으로는 생산적 자본의 이윤율을 경향적으로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그러기에 다른 편으로 실물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를 가속화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화란 한편으로 생산적 실물자본의 탈국경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이요,
다른 편으로는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분리된 금융자본이
천문학적 차익을 노리면서 투기자본화, 카지노자본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과 한국의 경제 위기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와 관련,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세계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미 19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적 경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여 왔다.
이들 입장에서는 한국과 같은 나라가 더이상 보호주의적 장벽의 공고화나
국가 및 노조의 자본 운동에 대한 '불필요한' 개입 같은 것을 하지 않기를 바라왔다.
게다가 공공 부문의 비효율성을 깨뜨린다는 명분 아래
공기업 등의 민영화 및 이를 통한 자유로운 투자 유치를 바랬다.
또 재벌 기업들도 정경유착이나 내부거래 등으로 밀실 경영을 하기보다는,
그리하여 세계 자본에게는 언제나 ‘블랙박스’로 남아있기 보다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경영을 하기를 바래왔다.
그래야만 세계 자본이 자유롭게 더 많은 단물을 빨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 자본의 개방화 압력과 탈규제화 압력 등이, 역설적이게도 그간 세계 자본과 권위적 국가의 힘으로
급성장한 한국 자본에게는 치명타로 작용, 마침내 경제 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둘째, 대개 초국적 기업이나 세계 금융자본으로 표현되는 세계 자본은
지구 전체를 무대로 운동하면서 자기 몸을 불려나가는데,
만일 한국에서 1997년 말 ‘지불불능(모라토리엄)’ 상태가 실제 현실이 된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멸망’한다면 세계 자본으로서는 더이상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이야말로 세계적 모델’이라면서
다른 후진국들에게 열심히 모방(벤치마킹)하라고 선전할 대의명분을 잃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더이상 한국에서 단물을 빨아먹을 수 없게 되므로 실리적으로도 엄청 손해를 입게 된다.
게다가 한국 사태의 불똥이 일본이나 미국에까지 튈 우려도 매우 컸다.
미국 재무부 장관 로버트 루빈도 98년 5월,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수출이 이미 둔화되었고 앞으로는 더욱 급격히 악화될 것'이라 고백한 바 있다.
또 당시 미국의 자본가 세계에서는 국내 금리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금리 인상이 이뤄질 경우,
아시아로부터 자본이 대거 이탈, 미국으로 쏠려 결국 아시아 위기를 더욱 부채질할 것이고,
그러면 미국(자본)뿐만 아니라 전세계 경제(자본)에도 매우 해롭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식을 하기에 이들은 보기 드문 규모로 축적 위기의 한국에 구제금융을 실시하고
바로 그 조건으로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을 ‘관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은 현재 한국 경제의 위기가 한국 자본의 축적 위기일 뿐만 아니라
‘축적 위기를 관리할 능력의 위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동시에 일러준다.
문제의 뿌리는 삶의 방식
역사적으로 되돌아보건대, 우리나라는 1945년 일본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이래
일하는 사람들에 의한 자립적이고 민주적인 경제사회 시스템을 건설하기보다는
미국 자본주의 세력과 국내 지배세력의 구상에 따른 '수출지향적 시장경제 시스템'을 발전시켜 왔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대개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국가부도 사태나 외환 바닥 사태,
또는 국가경쟁력 약화를 경제 위기의 핵심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의 핵심이,
세계의 자본이 범지구적으로 인간 공동체와
자연 생태계를 급속도로 파괴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 속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 스스로 내면적인 자율성에 기초하여
자립자족적이고 상부상조하면서 서로 즐겁게 살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의 내면 세계로부터도 분리된 채,
자본과 시장 경쟁의 논리에 종속되어 힘겹게 살고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날 위기의 또 다른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삷의 위기’,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위기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IMF 시대’의 위기란,
이미 우리가 오래 전부터 경험하고 있는 삶의 위기가 더욱 첨예하고 세계적인 형태로 느껴진 것일 뿐
새삼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p29)
※ 이 글은 <작은 풍요>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강수돌 - 작은 풍요(삶의 자율성 회복을 통한 기업과 사회의 재구성)
이후 - 1999. 04. 06.
'성장교육(인문.철학.교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리유카바 최-그림자 정부/자본주의 경제체제 (1) (0) | 2022.08.03 |
---|---|
金載龍-분노의 시대 그리고 사색/'페로'의 방울뱀 이론 (0) | 2022.07.31 |
현명한 부모는 돈보다 지혜를상속한다 - (06)저축만 가르쳐서는 안된다 (0) | 2022.06.06 |
내 인생을 변화시키는 짧은 이야기 - 또 하나의 힘 (0) | 2022.05.02 |
미셸 투르니에-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남자와 여자. (0) | 2022.04.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