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 문화 A 8면」
강수연이 비구니를 연기한 ‘아제아제바라아제’(1989). [사진 강수연 배우 장례위원회]
한국 영화의 첫 월드스타 강수연이 별세했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 자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고인은 구급대원이 출동했을 당시 심정지 상태였다. 병원으로 옮겨진 고인은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고, 7일 오후 3시쯤 숨을 거뒀다. 56세.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69년 TBC 전속 아역배우로 연기를 시작했고, 평생 배우로 살았다. 21세인 87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세계 3대 영화제인 칸·베를린·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의 첫 수상이었다. 대를 이으려는 욕망에 포박당한 산골 소녀 연기로 국제 스타가 됐다. 고인은 87년 한 해에만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연산군’ 등 6편의 영화를 선보이는 등 80년대 충무로를 석권했다. 89년 고인은 임 감독의 ‘아제아제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비구니 역을 맡아 삭발 연기를 불사했다.
1990년대 고인은 박광수·장선우·이현승 등 ‘코리안 뉴시네마’ 감독들과 전성기를 보냈다. ‘베를린 리포트’(1991), ‘경마장 가는 길’(1991) 등 사회파 영화와 ‘그 여자, 그 남자’(1993), ‘지독한 사랑’(1996) 등 로맨스·멜로까지 폭넓은 연기를 보여줬다. ‘그대안의 블루’(199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등에선 여성의 욕망에 거리낌 없는 목소리를 보탰다. 드라마로는 2001년 SBS 사극 ‘여인천하’에서 주인공 정난정 역으로 인기를 끌었다.
“춘향 아니면 월매로 … 할머니 배우가 꿈”
영화 ‘베테랑’(2015)의 명대사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체면)가 없냐”가 고인의 술자리 발언에서 비롯됐다는 일화에서 짐작되듯 고인은 주변을 잘 아우르며 호탕했다. 3세에 아역배우로 데뷔한 고인의 영화를 향한 열정과 강단은 그가 남긴 말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고인은 늘 향후 계획으로 “늙어서도 좋은 배우로 남는 것”을 꼽았다. 일찌감치 월드스타로 발돋움한 그였지만, 2007년 MBC 드라마 ‘문희’ 출연을 앞두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말 연기 잘하는 할머니 배우가 되는 게 계획”이라며 “원로배우가 주인공인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나 ‘황금연못’ 등을 보며 ‘나도 나중에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아역배우로 시작해 늙어서까지 평생을 배우로 살아간 한 사람으로 좋은 선례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2011년 한 인터뷰에서도 “60대든 70대든 연기자로 남고 싶다. 춘향이가 아니면 (춘향이 엄마인) 월매 하면 된다”고 했다.
고인은 정치적 갈등으로 좌초 위기의 처한 부산국제영화제의 ‘구원투수’로도 나섰다. 1996년 영화제 출범 초기부터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한 그는,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벨’ 사태로 2014년 영화제가 파행으로 치닫자 이듬해 이용관 집행위원장과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2016년 인터뷰에서 “평생 싫은 사람은 안 만나고 내 주관대로 행동했는데, 영화제에 들어와서 그게 다가 아니란 걸 처음으로 느꼈다”고 토로했던 고인은 2017년 사퇴했다.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는 영화계 선후배와 동료들의 추모 발길이 이어졌다. 8일 빈소를 찾은 임권택 감독은 “내가 먼저 죽어야 되는데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이 먼저 가니까”라며 낙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영화 ‘씨받이’ ‘아제아제바라아제’를 통해 고인이 월드스타가 되는 과정을 함께했던 임 감독은 “좋은 연기자를 만난 행운 덕분에 내 영화가 좀 더 빛날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황희 장관 “올가을 훈장 추서 준비 중”
전날(7일) 빈소에 들렀다가 발길을 돌린 김동호(현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은 8일 오전 다시 찾아 가장 먼저 조문했다. 이어 빈소를 찾은 봉준호 감독은 “몇달 전까지 종종 뵀고 얘기를 길게 나눴는데 실감이 안 난다”고 착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영화 ‘고래사냥 2’(1985)에서 함께한 배창호 감독은 “어려운 촬영이 많았는데 내색 없이 야무지게 잘 따라와 줬다”며 “(‘고래사냥 2’ 공동주연인) 안성기와 함께 한국영화사에 연기자로서 큰 획을 그었다”고 말했다.
고인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사퇴 후 한동안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김동호 이사장의 감독 데뷔작인 단편 ‘주리’(2013) 이후 작품 활동이 뜸했다. 빈소를 찾은 영화인들은 고인이 불과 40대에 대중으로부터 잊힌 시간을 아쉬워했다. 지난 1월 촬영을 마친 연상호 감독의 영화 ‘정이’로 복귀하기까지 연기 일선에서 물러났던 그의 마지막 장편 주연작은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 올리기’(2010)였다.
빈소를 찾은 황희 문화체육부 장관은 “(고인에 대해) 정부에서 올가을 훈장을 추서하려고 준비한다”고 말했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르며 김동호 이사장이 장례위원장을, 영화계 선후배 동료들이 고문과 장례위원 등을 맡았다. 영결식은 11일 오전 10시 빈소에서 열린다. (A 8면 나원정·남수현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나의 절친…오랜만에 주연 맡은 ‘정이’가 유작이 될 줄은
1989년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로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기념 촬영한 강수연(가운데)과 임권택 감독(오른쪽), 김동호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장. [사진 김동호]
김동호 장례위원장 추모글
‘청천벽력’이라는 말밖에 표현할 길 없네요.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우리의 곁을 떠나다니, 이럴 수도 있나요. 너무도 황망하고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자주 다녔던 압구정동 ‘옥혜경 만두집’에서 점심을 나누고 근처 카페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이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그땐 화색도 좋았고 건강해 보였는데…. 이럴 수도 있는 것인가요.
모스크바영화제에 함께 가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지도 33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때로는 ‘아버지와 딸’처럼, 때로는 ‘절친’으로 지내왔습니다. 1996년 제가 부산국제영화제를 창설하고 난 후, 수연씨는 때로는 개·폐막식 단골 사회자로, 때로는 심사위원으로 늘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해 왔습니다. 그 후에는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위원장으로, 또 단독 위원장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키우고 한국 영화를 산업화하는 데 크게 기여해 오셨습니다.
너무도 일찍이 당신은 스물한 살부터 ‘월드 스타’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힘들게 살아오셨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수연씨의 숙명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수연씨는 지병이 있는 부모님과 큰오빠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누이동생을 이끌면서, 가장으로 힘들게 그러면서도 지혜롭게 살아왔습니다. 큰오빠를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 말레이시아에 몇 달씩 머물면서 아예 정착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수연씨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정상화해 놓고 2017년 나와 함께 영화제에서 불명예스럽게 나왔습니다. 그 직후 어머님까지 타계하시면서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병원을 들락거리면서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4년 동안 외부와 접촉을 끊고 사회활동을 중단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10월 말 제가 맡고 있는 강릉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처음으로 등장했고, 직후에 연상호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 ‘정이’의 주연을 맡게 되어 너무나 기뻤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타고난 월드 스타로서 출중한 연기력을 다시 한번 입증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발판이 되기를 모두가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수연씨 유작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수연씨가 응급실에 있을 때, 그리고 마지막 임종할 때, 비록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었지만 옆에서 장시간 지켜보면서 그동안 세파에 시달렸고 어렵게 살아왔던 수연씨가 처음으로 평화로운 모습으로 누워있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이제 우리 곁을 떠나셨으니 저세상에선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평화롭게 영면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수연씨의 명복을 빕니다. (김동호 장례위원장,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중알일보 - 2022.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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