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덕 - 「지금 잠이옵니까?」
박대통령의 피살과 신군부의 등장이 TV에서 드라마화되어 경쟁적으로 방영되던 95년 말께었다.
가끔 저녁시간을 내어 좋은 말씀을 들려주시곤 하는 박봉환 장관(전 동력자원부 장관)께서
그날도 자리를 만들어 줬다..
그런데 박장관이 그날의 중심 주제였던 문제와는 전혀 다른 얘기를 꺼냈다.
"홍의원은 박대통령이 죽은 진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자본시장 개방과 관련된 문제를 한참 나누던 중에 느닷없이 꺼낸 말씀이라 다소 얼떨떨했지만
박장관이 그런 질문을 할 때는 반드시 슬기로운 얘기가 뒤따라 나오는 것을 잘 아는지라
"그게 뭘까요?
요 얼마전 TV드라마를 보니까 미CIA 서울 지부장이 김재규를 충동하는 장면이 나오던데
그런 것도 이유의 하나가 되겠습니까?" 라고 반문했다. 백장관은 피식 웃고 나서
"이건 내 얘기가 아니고 스칼라피노교수가 한 말인데
박대통령은 자신의 성공 때문에 죽은 거야."
그러고는 여러가지 계수를 가지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이 처음 집권했을 때 이 나라의 경제 사회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자세한 수치로 먼저 설명한 다음
박대통령이 죽은 해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보여 주는 지표를 대비시키는 식이었다.
예컨데 5. 16 쿠테타가 일어나던 해의 우리나라 1인당 소득은 82달러로
가나의 1백달러 보다도 오히려 뒤처졌고,
농업으로 먹고사는 농가 인구가 전체 인구의 56%나 되었다.
그러나 10.26 사건이 있었던 79년의 경우 우리의 1인당 소득은 1천 6백47불로 세계27위,
개발도상국 가운데는 단연 선두그룹이었고 농업인구는 29%로 줄어들었다.
그러한 수치를 기초로 박장관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시 박대통령이 내건 근대화란 구호는 농업국가를 공업국가로 바꾸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박대통령은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속도로 그 과업을 이륙했다.
농사로 먹고살던 사람들이 56%나 되던 나라를 29%로 줄인 것이다.
박대통령은 농촌을 떠난 그들에게 새로운 일자리 즉 공업화와 관련된 일자리를 마련해줬다."
그것은 박장관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박대통령의 근대화 드라이브는 월남전과 중동 건설붐이라는 뜻밖의 호재를 감안하더라도
세계 사상 유례가 없는 성공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과정에서 개발독재 특유의 인권탄압과 반민주적 정치행태가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업적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즘 들어 부쩍 사용하는 산업화라는 말을 놓고
학자들이 여러 가지 해석을 내리는데 실은 아주 간단한 지표가 있다.
전체 국민 가운데 월급으로 생활하는 국민의 비율이 몇퍼센트인지를 따져보면
산업화가 얼마만큼 성숙했는지도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60년대초에는 봉급 생활자 비율이 30% 님짓밖에 안되었으니
박대통령이 변을 당할 무렵에는 거의 70%에 육박했다.
그게 바로 박대통령의 개발독재 성공을 입증하는 가장 명확한 지표였다." 나는 미심쩍게 물었다.
"그러나 산업화에 성공한 것과
박대통령이 변을 당한 것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까?" 박장관의 차분한 설명이 계속되었다.
"산업화된 사회에는 두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첫째는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는 것이고
두번째는 봉급생활자들을 중심으로 한 도시주민들이 모든 종류의 속박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산업화와 중산층형성의 관계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가 소련에 항거해서 자유화운동을 일으켰던 것은
동구 위성국 가운데 그들이 가장 두터운 중산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런 중산층이 만들어진 것은 산업화 덕분이었다.
이 대목은 북한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북한은 아직까지도 전체 국민의 44%가 농업에 의존해서 먹고사는 반농업국가이고
그래서 자유화 물결이 먹혀들 소지가 그만큼 적다.
논리의 비약으로 들릴지는 몰라도 북한의 공업화를 돕는 것이
북한의 자유화 물결을 돕는 것과 깊은 함수관계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박장관의 설명은 실로 명쾌했다.
소련의 사회주의 체재가 무너진 것 역시 그동안 산업화에 성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중국의 등소평 체재가 정, 경분리를 내세워 자본주의시장 원리와 공산당 독재를 병행시킬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미흡한 산업화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바로 이와같은 배움 때문에 나는 박봉환장관과의 식사시간을 늘 반가운 마음으로 기다리곤 한다.
박장관은 그의 역저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그랬듯이 잡다한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근복적인 힘과 원리를 간명하게 추출해내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로 든 도시화와 박대통령의 피살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왜 역사책에도 나오지 않는가.
중세시대가 끝나면서 처음 근대도시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격언이 하나 생겼었지.
도시는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는 예기 말일세.
그게 참으로 중요한 포인트야.
우리나라의 관련부정선거를 놓고 봐도
농촌에서는 쉽게 먹혀들던 방식이 도시에서는 도통 통하지 않는 게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바로 도시가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 그리고 각 개인의 익명성 때문이지."
2차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독재를 경험했었다.
그것이 군부독재이건 민간지도자의 백색독재이건 간에
신생독립국치고 독재체제를 맛보지 않은 국민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박정희대통령은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만 해도 유일한 개발독재의 성공자였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칠레의 피노채트, 쿠바의 카스트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트 등
이름난 독재자들 가운데 산업화에 성공한 독재자는 없었고 따라서 그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도 외세의 개입이 있고서야 축출되었을 뿐이다.
산업화와 함께 진행된 도시화와
이들 도시에 사는 중산층의 자유화 민주화 열망이 독재자의 퇴진과 민주화의 에너지원이었던 것이다.
87년 6. 10 항쟁 직후 나온 6. 29 선언만 해도 그렇다.
흔히 사람들은 양김씨의 선도와 학생들의 궐기가 6. 29 선언을 낳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6월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명동 금융가의 넥타이 맨 샐러리맨들의 호응이야말로
전두환대통령의 기를 꺾은 결정적 계기였다고 믿는다.
당시 정권내에서 주요 결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점은 천안문 사태와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당시 북경의 젊은이들은 직선제 개헌 쟁취에 나섰던 우리나라 학생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천안문 광장을 메우고 또 궐기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갓 보급되기 시작한 팩스를 통해 외부세계에 거의 중계방송되듯 알려졌다.
하지만 거기에는 자유화 요구를 함께 외칠 두터운 중산층이 없었고 그리고 사태는 바로 끝났다.
박정희대통령이 죽기 직전
부산과 마산에서 학생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그들에게 물과 음식을 자발적으로 갖다주고
시위에 함께 참여했던 중산층이 북경에는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세운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스스로 파멸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아이러니다.
언론계에 있을 때는 직접 탄압도 받았고
정치판에 들어와서는 줄곧 야당을 했으면서도 내가 박정희대통령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일을 삼가는 것은
그의 역활이 우리 역사 위에서 너무도 선명하고 역동적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p48)
※ 이 글은 <지금 잠이옵니까?>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홍사덕 - 지금 잠이옵니까?
베스트셀러 - 1996.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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