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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베르토 에코-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시간을 알지 못하는 방법

by 탄천사랑 2022. 5. 13.

옴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지금 나는 어떤 물건에 관한 설명을 읽고 있다.
이것은 18금의 이중 케이스에 33가지 기능을 갖춘 회중시계(파텍 필립 89)이다.
이 시계를 소개하고 있는 잡지는 가격 표시를 빠뜨렸다.
지면이 부족했던 탓이 아닌가 싶다 
'리라로 표시하기까지 번거로웠으면 그냥 달러로 백만 단위만 적어 놓아도 되었을 텐데.'
나는 깊은 좌절감을 느끼면서 그것 대신 5만 리라짜리 신형 카시오 회중시계를 사기로 한다.
페라리 자동차를 미치도록 갖고 싶지만 그것을 살 수 앖다는 것을 알기에 
자명종 라디오를 사면서 마음을 달래는 사람과 심정이 비슷하다. 
어쨌거나 회중시계를 가지고 다니려면 적당한 조끼도 한 벌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회중시계를 지니고 다니지 않고 책상 위에 계속 놓아둘 수도 없을 것이다.
또 날짜와 요일, 월, 연도, 세기, 윤년, 섬머타임, 내 마음대로 선택한 외국 도시의 시간,
기온, 항성시, 달의 위상, 해뜨는 시각과 해지는 시각, 시차, 
황도상에서의 태양의 위치 등을 알아내면서 몇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좌도가 움직이는 모습으로 완벽하게 제시되기 때문에 
우주의 무한함을 느끼며 전율할 수도 있을 것이고,
크로노미터와 날짜 지시 장치를 원점으로 되돌릴 수도 있을 것이며,
내장된 자명종을 이용하여 휴식 시간을 결정할 수도 있으리라.
이 회중시계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이 밖에도 더 있다.

건전지의 상태를 보여주는 특별한 바늘이 있어서 건전지를 얼마나 더 쓸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고,
원한다면 현재의 시각도 알아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굳이 현재의 시각을 알고 싶어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경이로운 작은 물건을 손에 넣게 된다면,
나는 지금 시각이 몇 시 몇 분임을 알아내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그보다는 매일 일출과 일몰을 지켜볼 것이고, '어두운 방안에서도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주위의 온도를 알게 될 것이며, 별자리를 따져 하루의 운세를 점칠 것이다.
또 낮이면 파란 성좌도를 보면서 별을 꿈꿀 것이고 

밤이면 부활절까지 며칠이 남았는지를 따지며 생각에 잠길 것이다.
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더 이상 외부의 시간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될 것이다.

영겁의 찰나적이고 부동적인 이미지로 느껴지던 시간이 현동적인 영겁으로 느껴지면서,
외부의 시간은 그저 이 마법의 거울 같은 시계가 만들어낸 환영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몇 달 전부터 수집용 시계를 특집으로 다루는 잡지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한결같이 광택지에 4도 인쇄로 화려하게 편집된 잡지들로서 가격도 꽤나 비싼 편이다.
그 잡지들을 보면 정말로 시계의 구매자들을 겨냥하고 만든 것인지 
아니면 동화를 읽는 기분으로 보라고 만든 것인지 의아한 생각이 든다. 
이런 잡지가 늘어난다는 것은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는 것에 사활을 걸었던 기계식 시계가 싸꾸려 전자시계에 밀려 쓸모가 없어짐에 따라 

위에서 말한 장난감 같은 시계들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사람들은 이제 시간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열하고 완상하기 위해서,
또 일종의 투자로 생각하면서 시계를 사들이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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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계들은 오늘날의 정보 산업처럼 너무 많은 것을 알려 주려고 하다가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할 염려가 있다.
또 이런 시계들은 무엇을 알려 주기 보다는 

그저 내부적인 기능을 파악하는 데에만 모든 관심을 쏟게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본말의 전도가 극에 달한 어떤 여성용 시계들은 

바늘도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데다가 대리석 눈금 반엔 시간도 분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만일 누가 시간을 물어 오면, 

고작해야 정오에서 자정 사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이 시계를 고안한 자는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 시계는 별로 할 일이 없는 여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 여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허영심을 말해 주는 물건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고 말이다.  (p198) 
 이 글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옴베르토 에코 -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역자 - 이세욱
열린책들 - 2003.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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