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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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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보는 길

by 탄천사랑 2022. 5. 6.

정채봉 - 눈을 감고 보는 길

 



창 밖은 바다였습니다. 
푸른 밀물이 저만큼 서 밀려들고 있는데 그녀는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창문을 두들겼습니다.
나는 '밀물이 들고 있단 말이야, 가, 가라고!'하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어느덧 밀물은 그녀의 발목을 훔치고 무릎을 넘어서 가슴께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창을 열고자 팔을 뻗었습니다.
그러나 유리창은 손잡이가 없는 통유리였습니다.
안 돼, 문을 열어야해, 아니면 유리창을 박살 내든지,  나는 허둥거리다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천장에서 오이꽃 같은 엷은 노란색 미등이 내려다보고 있는 병실.
옆 간이침대에서는 아우가 벽쪽으로 코를 박고 잠들어 있고 
꿈에서 그녀가 밀물에 잠겨들면서 계속 두들겨 대던 유리창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 물려 있었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이 깊은 밤에도 아래 길가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얀 옷을 입은 여인네들을 발견한 나는 그곳이 병원의 연안실인 것을 알았습니다.
건물의 위층에서는 산 사람들이 신음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고
아래 지하실에서는 죽은 이들이 침묵한 채로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생과 사의 갈림길도 지척인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문득 살아 있는 날의 꿈에서 본 그녀가 보고 싶어 졌습니다.
낮에 와서 '면회 사절'이라는 패찰을 보고서도 간호사실에가 전화로 확인해 줄 것을 사정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만나지 않겠다는 한 마디만 하고서 수화기를 내려 놓았었지요.
나는 썰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평선 너머로 끌려만 가는.

입원 전날 밤 나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서 당부하였습니다.
당분간 병원에 나타나지 말아 달라고. 
왜냐하면 함께 슬퍼만 하다가는 견디어낼 내 힘이 너무 일찍 소진되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입원해서는 입원실 문에 '면회 사절'이라는 패찰을 내걸었으나
다짜고짜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다음과 같은 고지문을 만들기도 하였지요.


-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시는 분들은 갑자기 들은 소식이어서 궁금하여 물어보는 것이겠지만,
  답하는 저로서는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어 피곤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가 아니겠습니다만

  서로가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그동안의 경과를 적었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평소 B형 간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년 전부터 정기적으로 병원에 들러서 검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년 11월 정기검진을 앞두고 오른쪽 하복부에 간혹 통증이 왔습니다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허나 체중이 짧은 기간에 1킬로그램 또 1킬로그램 줄어서 이상하게 여기고 
  병원에 가 초음파 검사와 CT촬영을 해본 결과 간암이라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부랴부랴 입원을 해서 수술을 할 것인지, 

  다른 방법으로 치료를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지금 각종 검사를 하고 있습니다.
  12월부터는 검사 결과에 따른 치료가 본격화될 것이므로

  그때는 정말 오시지 않는 것이 저를 도와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회복기에 들어가면 스스럼없이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거듭 감사드리고 앞으로의 저의 투병을 위해 제 고향 바다와 같은 푸른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친구가 대신 써서 본인이 교정을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한테 '고향 바다와 같은 푸른 기도'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의 작은 바람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MRI 촬영을 할 때였습니다. 
나는 제발 망상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던 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동공 안에 들어가 있는 잠시 동안에 고향의 여름 콩밭 언덕에 내가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다는 푸른 물결로 만조였고, 콩밭 또한 푸른 잎새로 만조였습니다.
그 푸른 세상에서 나는 그녀를 생각하며 눈물을 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내 기사가 들어와서 '조셨어요'하고 물어서 쑥스러웠는데 조금 전 꿈에 그녀가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눈감고 보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침대로 돌아와서 탁자 위의 전깃불을 켰습니다.
그리고 일기장 속에 넣어 가지고 온 달리의, 
창 너머로 바다를 내다보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창가에 선 젊은 여인)
밑에 새벽을 맞는 오늘의 '나의 기도'를 적어 넣었습니다.


- 주님.
   아직도 태초의 기운을 지니고 있는 바다를 내게 허락하소서.
   짓푸른 순수가 얼굴인 바다의 단순성을 본받게 하시고 
   파도 노래밖에는 들어 있는 것이 없는 바다의 가슴을 닮게 하소서.

   홍수가 들어도 넘치지 않는 겸손과
   가뭄이 들어도 부족함이 없는 여유를 알게 하시고 
   항시 움직임으로 썩지 않는 생명 또한 배우게 하소서. (p27)
이 글은 <눈을 감고 보는 길>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정채봉 -눈을 감고 보는 

샘터(샘터사)  -  1999.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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