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투르니에 -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
나는 써야 할 말이 있는데 만년필을 찾지 못하고 있다.
만년필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어떻게 했는가?
찾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하여 기억해내려는 방법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만년필을 사용한 것이 언제이며 어디인가?
그리고 나서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두 번째는 생각해 보지 않고 일어나서 이곳저곳을 찾아보는 방법이다.
나는 주머니, 서랍, 책가방을 뒤진다.
전자의 방법은 선험적(연역적)이고, 후자의 방법은 경험적(귀납적)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구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내가 추론으로 틀림없이 만년필이 가죽 점퍼의 왼쪽 안주머니에 있다고 확신했다 해도 하나의 의문은 남는다.
경험적으로 확인해 보면 실제로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찾는 방법을 경험적으로 바꾸어 있을만한 곳을 구석구석 다 찾아본다 할 때는,
막연한(선험적) 판단이 작용하게 되고, 없을 것 같은 곳은 전혀 찾아보지 않는다.
나는 내 만년필이 지하철이나 다락방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과학적 탐구는 선험적 추론과 귀납적 실험의 끊임없는 교류이다.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의학서설(1865)>은 생리학 분야에 나타나는 그런 일례들을 가장 잘 제시해주고 있다.
이런 교류를 가장 잘 예증해주는 것은 망원경(귀납적 추리)과 흑판(선험적 추리)을 오가는 천문학이다.
1682년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몬드 핼리는 혜성의 행로를 관찰하고,
그혜성이 1758년 말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
그후 이 혜성에 그의 이름이 붙어졌다.
그는 1742년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사후 16년 만에 그 혜성은 핼리의 후계자들의 망원경에 어김없이 보였다.
핼리는 당연히 받을 만한 영예를 받은 것이다.
이 두 가지 길은 과학의 영역에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 작품의 창조 역시 선험적 방법과 귀납적 탐구를 내포하고 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나 에두아르 부바 같은 사진 작가들의 작품은 귀납적 추리의 사진들이다.
이런 사진 작가들은 자유롭고 우연한 삶이 그들에게 무엇을 제공할지 알지 못한 채
사진기를 손에 들고 도시나 들판을 지나간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과 닮은 것처럼 보이고,
이미 서명해 놓은 것 같은 사람들이나 어떤 장면들을 향상 만나게 되기 때문에
요행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헬무트 뉴턴이나 리샤르 아브동 같은 사진 작가들은 이와 반대로 선험적 추리를 한다.
이런 사진 작가들은 머릿속에 만들고자 하는 영상을 이미 가지고 있다.
모든 작업은 작업실에서 그들이 꿈꾸는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데 있다.
이것은 주로 패션 사진이나 광고 사진에 해당된다.
선험적 추리와 귀납적 추리의 이런 개념들은 몇몇 철학자들의 저서의 근간을 이루기도 한다.
칸트의 인식론은 인식에 대한 선험적 조건들을 분명히 밝히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인지된 대상이 아니고, 인지하는 주체에 있는 조건들이다.
칸트는 인식의 선험적 조건들을 초월적이라고 부른다.
공간은 지각의 초월적인 조건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기하학은 이런 지각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험적 학문인 것이다.
'선험론'의 절정은 플라톤의 인식론에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영혼은 불멸인지라 순수 관념의 천상에 오래 남아 있다가,
우리의 세계인 다양한 인종 집단이 사는 어두운 이승으로 추방된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모든 탐구는 경험에서 잃어버린 관념의 기억을 끌어내는 데 있다.
진정한 인식은 모두 무의식적인 추억의 재현에 있다는 것이다.
인용. 영혼은 불멸하며 여러 번 태어났고 모든 사물, 즉 저승의 사물만큼 이승의 사물을 보았던 이상,
영혼이 전혀 경험하지 않은 현실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 외의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은 미덕과 관계되므로
영혼이 이전에 알고 있던 사물을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은 아니다.
실제로 자연 전체가 동일 집단이고 모든 것이 예외없이 영혼에 의해 습득된 이상,
우리가 '배운다'는 사실을 회상하고 탐구하면서 낙담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모든 것을 다시 찾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탐구하고 배운다는 것은 모두 하나의 회상인 것이다. - 플라톤의 대화 81 -
※ 이 글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의 일부를 필사한 것임.
미셸 투르니에 -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
역자 - 이용주
한뜻 - 1995.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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