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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 신상환-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구사론>의 이제. 흙과 항아리의 비유

by 탄천사랑 2021. 12. 22.

(대담집) ​​도법, 신상환 -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도법. <구사론>에 나오는 이제론의 비유인 옹기병과 흙의 예로 돌아가 보자.
옹기병이 부서지면 옹기병이라는 감각이 사라지므로 속제이고,
어떤 것이든 변하지 않고 있으면 승의제라는 게 말이 되는가?

 

담정. 안 된다.

 

도법. 그런데도 <구사론>의 말이 권위를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담정. 총 6백 게송인 <구사론>은 그리 많은 양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6백 게송 안에 큰 주제들을 압축해 적어 놓았다.
그러다 보니 게송 하나에 대한 해제가 30쪽이 넘어가는 일도 있다.
그 해제가 바로 유부와 경량부의 견해이다.
그 많은 해제의 양에 질리다 보니 <구사론>을 잘 공부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대승의 공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구사론> 공부를 잘 하지 않는다.
<구사론>은 내용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어렵다는 말이, 생각이 가로막고 있다.
그것은 <중론>도 마찬가지다.
논리적으로 뜯어보면 어렵지 않은 내용인데 어렵다는 말에 질려 공부를 잘 하지 않는다.
바로 이 어렵다는 말과 생각이 권위를 더욱 강화한 것이다.

 

도법.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경이든 논이든 긴 세월 동안 생긴 권위가 있다 보니 그 안에서 옴짝달짝 못 하고 있다.
이것을 깨고 넘어가야 한다.
<중론>도 그렇고 <니까야>. <화염경>. <어록> 등 다 마찬가지다.
권위에 주눅 들지 않아야 불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다.

 

담정. 그렇다.
그런 불교 하지 말라는 것,
삶과 괴리된 불교 하지 말자는 것에서는 스님과 같은 생각이다.
그렇지만 그 방법에서 길이 갈린다.
나는 교학과 역경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스님과 같은 실천도 그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스님은 지금의 삶을 바꾸자며 실천을 강조한다.

 

각자의 방법은 다르나 불법을 튼튼히 하자는 큰 방향이 같기에 이렇게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두 방향은 달라야 한다.
뿌리는 뿌리대로, 열매는 열매대로 가야 한다.

 

스님이 실천을 강조할지라도 교학의 정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한역 인명(因明), 「즉 불교 논리학에는 현량(現量), 비량(比量), 비량(非量),이라는 3종량이 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량(現量). 직접지(直接知), 보면 안다는 것이다.
                      인명은 이 직접지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논리로 들어가면 각 학파마다 견해가 다르다.
비량(比量). 추론지(推論知)이다. 이 추론지는 세 가지로 나뉜다.
                      직접비랑(直接比量). 오늘날의 추론이다.
                      성언랑(聖言量). 성형의 말씀은 올바른 논리라 본다. 이것이 인도 논리학의 특징이다.
                      극성비량(極成量). 많은 사람들이 믿으면 옳다는 논리.
비량(非量). 논리가 아니라는 것. 잘못된 인식.

 

그렇지만 테벳 인명에는 비량(非量)을 다섯 가지로 세분한 7종량이 있다.
직접비량,

즉 추론이지만 올바른 판단이라고 보는 현재의 입장으로 보면 성언량으나 극성비량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올바른 논리도 적절하게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 논리 전체를 버리게 된다.

 

흙과 항아리로 돌아가 보자.
이것은 하나의 비유인 비유량이다.
인도 논리학파는 이것을 올바른 것으로 간주하지만 불교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그저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비유이다.
'달, 달 둥근 달, 쟁반같이 둥근 달'의 쟁반같이 둥근 달이 모두가 인정하는 비유이다.
경전에는 이와 같은 무수한 비유가 나온다.

 

이런 부분들은 인도의 논법과도 관계가 있다.
서양의 논리학은 기본적으로 3단논법이다. 그렇지만 인도는 5단논법을 사용한다.

3단논법.
1). 저 산에 연기가 있다.
2). 연기가 있는 곳에는 불이 있다.
3). 그러므로 저 연기가 나는 산에는 불이 있다.

 

5단 논법에는 모두가 인정하는 비유가 반드시 들어간다.
아궁이와 불, 연기라는 모두가 인정하는 비유가 그것이다.

 

5단논법.
1). 저 산에 연기가 있다.
2). 집에 있는 아궁이에는 불이 있다.
3). 아궁이에서는 연기가 난다.
4). 불이 있는 곳에 연기가 있다.
5). 그러므로 저 연기가 있는 산에는 불이 있다.

 

흙과 항아리의 비유는
'현상은 변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근본 물질을 인정하는 유부의 논리이다.
<구사론>에서는 이 변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썼다.
그렇지만 중관학파는 '흙이나 항아리가 변화하지 않는 자성이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대승불교에서도 이 흙과 항아리의 비유는 본질적인 것을 다룰 때 등장한다.
그렇지만 중관학파의 입장은 언제나 '그렇지 않다'라고 부정한다.
인식 주체인 자기 자신도 변화하고 대상도 변화하는 아공법공(我空法空)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 때문이다.

 

도법. 논리학의 특징에 대한 설명은 잘 들었다.
<구사론>이 이제론을 너무 가볍게 취급하는 게 아닌가 싶다.

 

담정. 그렇다. <구사론>은 이 반 게송이 이제론에 대한 언급이다.

 

도법. 그 반 게송도 <구사론>의 저자인 세친의 창작일 가능성은 없는가?

 

담정. 모르겠다.
이제론에 대한 다른 기록을 확인해 보지 않았다.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여 보고 싶은 것을 찾아내는가?'라는 것은 우리의 합리적 추론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그 추론의 근거마저 없을 때는 난감하다.

 

대신에 다른 질문을 해보자.
그럼 왜 이제론이 등장하는가?
<구사론>에서는 '이제를 통해 설명하는 방법이 있지만, 사성제로 설명한다'라고 나온다.
즉, 사성제를 설명하기 위한 '양념'으로 이제론이 등장한 것이다.

 

도법. 그럼, 거기서 말하려고 하는 진리가 무엇인가?
이제론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담정.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 또는 사성제를 강조하기 위한 수식어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용수 보살 이후,
중기 중관파를 지나면서 이제론은 사성제보다 더욱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를 잡는다.

 

8세기경, 샨띠 데바가 <입보리행론>을 지으면서 '제9 지혜품'에서 이제론을 왜 강조했을까?
그것은 '보리도차제'에 모든 교학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론'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상대에게 '가장 수승한 법을 모른다'라고 공격당한다.

 

당대는 당대의 조건 속에서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과거의 내용을 취사선택해야 한다.
시대의 변화가 있어도 공통적인 가치를 추출해야 한다.
'고통에서 벗어남', 바로 이것을 위해서다.
부처님도 그러하셨다.

 

도법. 그러므로 나는 이제로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이 표월지지라고 본다.
달은 진제, 손가락은 속제인 것이다.

 

담정. 그렇다.
바로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부처님께서는 '내 가르침이 옳은지 그른지 너희가 살펴보라'라고 하셨다.
이 자세가 없으면 우리는 죽은 불교를 공부하는 셈이다.

 

<입보리행론>의 '제9 지혜품'은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샨띠 데바가 '제9품' 뒷부분은 날아가면서 설하셨다는 신화가 덧씌워져 있다.
그로 인해 전해지는 판본마다 뒷부분이 조금씩 다른 것이라 한다.
이런 신화적인 내용을 재해석해야 한다.
부처님도 당시 우빠니샤드의 환영(幻影, maya) 이론 속에서 무아를 설하셨다.

 

도법. <구사론>에서 이제론을 수식으로 사용했다고 했는데,
오히려 사성제를 이제론으로 정리하는 것이 기본 입장이지 않았을까?

 

담정. 그렇지 않다.
그 흙과 항아리에 대한 비유와 주석이 조금만 더 남아 있었어도 스님 의견에 동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
게송 한 줄에 30쪽씩 해석을 붙였던 구사론자들은 이제론에 대해서는 반쪽 정도의 주석만 붙였다.

 

'고통에서의 벗어남'이라는 부처님의 뜻을 되살려내기 위해 이런 이제론을 되살려낸 분이 바로 용수 보살이다.

 


<입보리행론>, '제9 지혜품'의 환영(幻影, maya) 이론
도법. 교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다 보니 <중론>에 대해서도 궁금하면 찾아보는 수준이다.
워낙 낯선 내용이라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담정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예전 주석만 공부해서는 명료하게 이해하기 어려울것 같다.

담정이 21세기 「중론」을 저술했으면 한다.
그러면 좀 더 명료해질 것 같다.
우리는 불교를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가르침이라 한다.
담정에게 논파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 논파도 바로 이 파사현정을 위한 것 같다.

 

담정. 그렇다. 스님 말씀처럼 <중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파’라는 말보다는 먼저 ‘고통에서 벗어남’이라는 부처님의 뜻을 명심해야 한다.

 

<중론>을 공부하지 않아도 불교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중론>,
'제24품,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고찰', <353.(24-19)번> 게송에서 언급한 '심오한'이라는 수식어다.
이것은 곧 <구사론>을 비롯한 다른 불교 교학이 '심오하지 못하다'라는 뜻이다.
<중론>에서는 구사론자와 외도 등
'지적인 교학' 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고통의 직시'를 가로막고 있다고 보기에

그들의 이론을 '좀 더 지적으로'논파하고 있다.

 

지금까지 스님과 부처님의 재세 시 모습이나 이제론 등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나는 왜 인도인처럼 더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가?'라고 되돌아보았다.
이 부분이 바로 환영(幻影, maya) 이론이다.  (p184)

 

 


도법, 신상환 -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
b - 202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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