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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 [소설 은상] '늪'

by 탄천사랑 2021. 11. 16.

「경북일보 -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소설 은상] 김경락 '늪'」

 

초겨울에 접어든 늪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 탓에 더욱 황량해 보였다. 마른 억새풀과 자잘한 나뭇가지로 뒤덮인 숲을 해치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 여자의 눈에 들어온 건 나뭇잎 따위의 부유물로 뒤덮인 늪이었다.

두 달 전만 해도 늪은 지금처럼 한산하지 않았다. 명절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사람이나 팔짱을 낀 연인이 늪 주변 생태공원을 배회하곤 했다. 여자가 기억하기론 군청에서 늪을 자연생태 관광지로 지정한 이래 이렇게 한산했던 적은 없었다.

비가 오지 않아 늪 주변 풍경은 초겨울의 마른 지푸라기처럼 건조한 빛을 띤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여자는 이내 자리에 멈춰 섰다. 어쩌면 남자는 이미 떠났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우연을 가장해 맞추려고 노력해도 맞춰지지 않던 그와의 만남이 이번에도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애초부터 상황이 달랐다. 먼저 연락을 한 건 여자가 아닌 남자였기 때문이다.

지난밤 여자는 발송한지 닷새가 지난 남자의 메일을 확인했다. 잘 지냈는지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한 남자의 메일은 상투적인 인사 말미에 우연한 일로 늪을 방문하게 됐다고 적혀있었다. 정확히 주말 동안이라는 단어와 함께였다. 메일을 요약하자면 주말에 늪에 있을 테니 괜찮으면 볼 수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하지만 주말은 어제까지고 오늘은 월요일이다.

늪으로 향하는 동안 여자는 자신이 지나온 억새밭을 떠올렸다. 여자는 이제 억새와 갈대를 구별할 수 있다. 물 가까이 피어난 건 갈대, 들판과 산에 핀 건 억새라는 단순도식이 아니어도 모양으로 그것을 구별할 수 있다.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내면 모든 풀의 이름을 알 거라는 선입견이 여자는 싫었다. 도시에서 대학시절을 보내는 내내 여자는 시골에 대한 낭만을 가장한 편견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여자가 아는 한 시골의 삶이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시골은 도시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자연과의 사투가 도사리고 있다. 밤이면 우사에 켜놓은 등불 아래로 몰려든 벌레를 쫓아야 하고 겨울이면 수도관이 얼어붙어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어릴 땐 나무보일러에 쓸 땔감을 찾아 산을 헤매는 일도 있었다. 면사무소에서 지원하는 농업용 기름으로는 겨울 내내 기름보일러를 때기엔 어림없었다.

시골에서는 그 사투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아이들을 도시로 내몬다. 여자 또한 학창시절 내내 아버지의 용달차를 타고 한 시간 거리의 도회지까지 통학했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용달차가 달리던 비포장도로의 풍경만이 먼 과거의 한 토막이 되어 떠오르곤 했다.

시골에서 보낸 서른 해 만에 능숙하게 풀이름을 말할 수 있게 된 건 작년 한 해 학교도서관을 맡은 덕분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교장은 학생 수가 적은 학습도움반 교사인 여자에게 도서관 사서 일을 맡겼다. 여자는 방과 후 아이들이 돌아간 도서관 한 귀퉁이 앉아 빛바랜 식물도감과 습지생태보고서 따위를 읽었다. 언젠가부터 여자에겐 시골 분교에서의 생활이 오래전 자신을 스쳐 간 기억의 한 토막을 꺼내 이어 맞추는 일처럼 느껴졌다.

한참 늪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남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메일에 적힌 대로라면 주말이 끝난 지금 남자는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여자는 주말 동안 늪 주변에 텐트를 치고 침낭에서 웅크려 잠들었을 남자를 떠올렸다. 남자는 밤새 연둣색 빛을 발산하며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바라보다 잠들었을 것이다. 여자는 기억 속에 남은 남자와의 추억을 휘저으며 한동안 늪을 배회했다.


남자는 입고 있던 패딩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린다. 가을이 지나 이제 막 초겨울에 들어섰을 뿐인데 오늘은 유독 공기가 차갑다. 지난밤 일인용 낚시 텐트 안에서 새우잠을 잔 남자는 지독한 오한에 몇 번이나 몸서리치며 잠에서 깼다. 추위 탓에 더 이상 잘 수 없어 밖으로 나왔을 때 남자의 눈에 들어온 건 오리온 별자리의 허리를 이루는 세 개의 별이었다.

오리온은 남자가 최초로 알게 된 별자리다. 오래전 이곳의 남녘 하늘을 비추던 그 별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늘어선 채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오리온 별자리의 신화를 떠올린다. 아르테미스와 오리온의 사랑을 탐탁하지 않게 여긴 아폴론의 변덕이 낳은 결과는 처참했다. 사냥의 신이기도 한 아르테미스는 아폴론의 계교에 빠져 영문도 모른 채 오리온을 사냥감으로 착각하고 활을 쐈다. 신의 여자를 사랑한 대가는 그토록 혹독했다. 아르테미스가 쏜 화살에 숨을 거두는 순간 오리온의 뇌리 속엔 한 여자의 사랑이 있었을까. 아니면 그 사랑의 대가에 체념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죽음의 고통이나 두려움 따위의 현실적 문제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화란 언제나 아름답게 포장된다. 하지만 현실은 왜 매번 신화와 달리 남루할 뿐인가.

남자는 비운의 사냥꾼을 생각하며 침낭 안으로 파고든다. 알니타크, 알니람, 민타카.. 오리온자리를 이루는 세 개의 별의 이름을 되뇌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남자가 다시 잠에서 깬 건 해가 완전히 뜬 후였다. 간밤의 추위를 떠올린 남자는 가장 먼저 인터넷 쇼핑몰에서 저가로 구매한 침낭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싸구려 침낭은 텐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아주기엔 부족했다.

남자는 배낭에서 보온병을 꺼내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플라스틱 용기에 김이 올라오는걸 보며 나무젓가락을 쪼개 손바닥으로 비빈다. 버너 케이스 위에 컵라면 용기를 올려놓고 시계를 본다. 오전 열 시. 여자는 오지 않았다. 이곳에 머물기로 한 날은 어제까지였으니 하루가 지난 지금 여자가 올 리 없다.

남자는 늪으로 시선을 돌린다. 늪 한가운데 고인 물 위로 나뭇가지가 떠 있다. 늪 가장자리엔 쪽배 한 척이 반쯤 물에 잠긴 채 덩그러니 놓여있다. 남자는 오래전 이곳에 온 날을 떠올린다. 늪에 한껏 물이 불어난 그해 여름, 이 늪 한가운데 노인을 태운 쪽배 한 척이 유유히 떠다니는 걸 기억해냈다. 그날 쪽배에 몸을 실은 노인이 기다란 장대로 바닥을 밀칠 때마다 배는 조금씩 앞으로 나갔다. 물 위에는 여기저기 부표가 떠 있었다. 물 가운데로 간 노인은 통발을 물속에 넣고 배 한 쪽 귀퉁이에 앉아 물속을 지그시 바라봤다. 투명한 하늘과 구름, 모든 것이 한가롭기만 했던 그해 여름. 하지만 그건 지나가버린 추억의 파편에 불과하다. 나무젓가락을 컵라면 위에 올려놓으며 남자는 이곳에 온 이유를 생각했다. 여자에 대한 회환이나 미련은 아니었다. 이 지역에서 꽤나 유명한, 온갖 생명체의 보고로 알려진 이 늪에서 주말을 보내기 위해 온 것뿐이었다. 정말 그뿐이다.

남자는 김이 모락모락 새어나오는 컵라면을 젓가락으로 저어 입으로 가져간다. 밤새 허기진 뱃속을 채워주는 라면 맛은 일품이다. 국물까지 남김없이 들이켠 남자는 멍한 얼굴로 하늘을 응시한다. 쌀쌀하지만 오래전 그날과 다름없는 청명한 날씨다. 그때 남자의 눈에 저 멀리 오리 한 마리가 늪을 떠다니는 게 보였다. 고방오리? 아니, 머리 부분이 푸른색이니 청머리오리인지도 모른다. 오리는 한동안 유유자적 늪을 헤엄치며 남자의 시선을 끌었다. 그런 오리의 여유가 남자는 새삼 부러울 뿐이다.


늪에서 멀지 않은 생태공원으로 돌아온 여자는 벤치에 앉았다. 무턱대고 늪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 왜인지 자존심 상한다. 오랜만에 나타난 남자는 여자의 시간 따윈 안중에 없다는 듯 그저 늪에서 보자는 말로 모든 걸 대신했다. 그 한마디로 남자를 찾기엔 늪은 거대한 공간이다.

멍청이! 여자는 푸념하듯 내뱉는다. 벤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커피 자판기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자판기에 다가가 동전을 넣는다. 선택이라는 글자에 불이 들어왔다. 고급 아메리카노를 뽑으려다 말고 그냥 아메리카노를 선택한다. 이이잉- 기계음이 들리고 이내 램프 불이 꺼졌다. 자판기에 손을 넣어 종이컵을 꺼낸다. 컵을 꺼낼 때 여자의 손등에 커피가 묻었다. 여자는 티슈를 꺼내려다 말고 입으로 커피를 훔친다. 벤치 맞은편에 우포늪 자연생태공원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보인다. 하아- 낮게 한숨을 내쉰다. 잘한 걸까? 자존심도 없이 왜 여기까지 와버린 걸까. 여자는 남자의 대책 없이 던진 말에 또다시 휘둘린 자신에게 화가 났다.

멍청이! 멍청한 놈! 그때 한 마리의 왜가리가 왝- 왝- 하며 여자가 앉은 벤치 위로 날아간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시야 저편으로 사라지는 왜가리를 쳐다봤다. 생각해보면 아직도 잊지 못하는 건 자신인지도 모른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오랫동안 잊은 존재라고, 자신의 인생에서 운명의 남자 따윈 없다고 믿어 온 여자에게 그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당신의 인생엔 사랑이 머물기 어렵겠군요.’

친구와 우연히 간 사주 카페에서 여자가 뽑은 종이에 적힌 글귀가 여자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친했던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해 연락이 뜸해지고 아이의 돌잔치 소식이 들려 올 때쯤 여자는 그 글귀를 떠올렸다. 언제부턴가 아무런 근거 없는 그 말이 여자를 옥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특수교육학과에 다니던 시절 몇몇 남학생이 호감을 표시한 적도 있지만 그 누구와도 관계가 이어지진 않았다. 여자는 자신의 기준이 유독 까다로운 게 아닐까 생각했다. 진실함. 진실하면 된다는 그 기준이 사치인 걸까. 여자는 오랫동안 사랑이란 유치한 감정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면 자신이 돌봐야 할 아이들을 떠올렸다. 참치 캔에 손가락을 베여 피를 흘리면서도 먹을 것에 집착하는 자폐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사랑이란 사치스러운 감정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매학기가 끝날 때면 허탈했다. 수백 번을 반복해서 덧셈을 가르쳐도 뒤돌아서면 방금 배운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장애 아이를 보며 좌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과연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존재이기나 할까.

피곤한 몸을 옆으로 기울여 벤치 난간에 기댄다. 한동안 여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젯밤에도 잠결에 인영이가 떠올랐다.

인영이는 어릴 때 시신경이 손상되어 앞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인영이는 겨울방학을 보름 앞두고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 날 영정사진을 든 아이의 아버지는 오 학년 교실과 학습도움실을 거쳐 운동장을 돌아 교문 밖으로 나갔다. 여자는 이를 악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죽음이 아이 곁에 머물고 있었던 걸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평생 투약해 오던 약물에 의한 쇼크사였다. 그 약이 심장을 멎게 할 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인영이는 몸의 이상을 느끼지 못한 걸까. 여자는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아이가 야속했다. 여자는 인영이와 함께 색종이를 잘라 꾸며놓은 교실 한편의 환경미화 장식을 보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에 여자는 옷깃을 저민다. 차를 몰고 늪으로 향하는 동안 깨닫지 못한 추위가 여자를 에워쌌다. 공원 한켠에 군락을 이룬 왕버들 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생태공원이라 쓰인 글자 옆에 놓인 모형 반딧불이가 철 지난 여름의 흔적을 말해주듯 덩그러니 놓여있다. 빈 종이컵을 꼬깃꼬깃 접으며 여자는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늪 속으로 떨어진 낚싯바늘은 이내 모습을 감췄다. 남자는 낚싯대를 늪에 드리운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오전의 햇살이 밤새 얼어붙은 남자의 몸을 따뜻하게 감쌌고 스산한 바람이 얼굴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남자는 낚싯대를 아래위로 움직이다 말고 낚시 의자를 끌어당겨 자세를 고친다. 이 겨울에 빈 낚싯대에 걸려들 멍청한 물고기가 있을까 했지만 드리운 낚싯대를 거두고 싶지는 않다. 그때 늪 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게 보인다. 구부정한 걸음걸이로 봐서 인근 주민이 분명하다. 남자는 패딩점퍼에서 담뱃갑을 꺼내 배낭에 넣는다. 자연생태공원에서 흡연은 경범죄다. 괜히 오해받을 필요가 없다.

남자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인근에 사는 노인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이마의 주름이 나이를 짐작케 했다.

“이른 아침부터 낚시질이유? 비가 안 와 늪이 바싹 말랐는데 물고기가 잡히남?”

생태공원에서는 낚시가 불법이라는 말을 돌려 하는 걸까. 노인의 말에 남자는 쭈뼛쭈뼛 일어나 인사를 했다.

“네, 어쩌다보니…. 그런데 늪이 예전보다 많이 변했군요.”

“늪이야 계속 변하지. 올해 여름엔 비가 많이 와 홍수가 나기도 했고. 덕분에 늪이 숨을 쉬는 거지만.”

남자는 늪이 숨을 쉰다는 말의 의미를 안다. 산소가 부족한 늪은 홍수가 나면 산소가 유입돼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뀐다. 나일강이 범람해 이집트가 나일강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홍수란 늪의 생물에겐 재앙이자 축복인 것이다. 남자에게 그걸 알려준 건 여자였다. 도회지에서 나고 자란 남자에겐 늪이라는 공간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한 마리도 못 잡은 겨?”

노인의 말에 머쓱해진 남자가 낚싯대를 들어 보이며 멋쩍게 웃었다.

“보시다시피 미끼 없는 낚싯대입니다.”

“미끼도 없이 낚시는 해서 뭐하남?”

남자는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 그냥이요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남자는 머뭇거리기만 할 뿐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선 저런 쪽배로 물고기를 잡지. 늪 가운데에 통발을 설치하거든. 여긴 늪이니까 낚시 방법도 다르지.”

노인이 가리킨 곳엔 갈대밭 사이로 반쯤 잠긴 쪽배가 보였다.

“게다가 여기선 아무나 물고기를 잡을 수 없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다시 빈 낚싯대를 들어 보였다.

“거참. 빈 낚싯대를 들이미는 건 애초에 잡을 생각이 없다는 거야 뭐야? 비가 안 와 죽겠는데. 여하간 재밌는 총각이구먼. 그럼 일 봐!”

노인은 허탈하게 웃으며 늪 저편으로 걸어갔다. 머쓱해진 남자는 빈 낚싯대를 거두며 주변을 둘러봤다. 간밤에 남자가 머문 흔적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고정 고리가 빠진 일인용 텐트와 커다란 배낭, 컵라면 용기와 나무젓가락이 늪 주변을 나뒹굴었다. 노인의 말대로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은 늪은 더욱 황량해 보였다.


여자는 달그락 소리가 나도록 열쇠꾸러미를 벤치에 떨어뜨렸다. 학교도서관과 학습도움실과 각종 사물함. 여자가 관리해야 하는 곳의 열쇠다. 방학 중에도 여자는 매일 오전 아무도 오지 않는 교내 도서관에 앉아 창밖 구름의 움직임을 바라봤다. 간혹 바람이 불어 창문이 덜컹거릴 때면 아이들이 책을 보러 온 게 아닐까 하고 교정을 둘러보곤 했다.

-산 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깡총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여자는 풍금에 맞춰 산토끼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여자가 태어나기 한참 전 이 학교에 부임해온 교사가 지은 것이다. 학교 교정에는 산토끼 노랫말이 적힌 비문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일본은 토끼의 형상을 닮은 한반도를 연상시킨다며 노래를 금지시켰다고 했다.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이면 교장은 산토끼로 시작하는 학교의 전통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 놓았다. 교정을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여자는 산토끼를 떠올렸다. 이 산골 마을에는 유독 토끼가 많았다. 어린 시절 눈 덮인 산에서 먹을 것을 찾아 마을로 내려온 토끼를 잡으려는 아버지를 보며 여자는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여자는 교실 마룻바닥을 구르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야단칠 수 없었다. 특수반 아이들은 토끼처럼 약했다. 장애라는 육체의 감옥은 아이들을 더욱 약자로 몰아넣었다. 아이들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잔이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이미 떠났을 것이다. 기약도 없이 사라졌다가 나타난 남자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 한심했다. 그를 다시 만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자는 마음으로 남자를 밀어내고 있었다.


여자와 연락이 끊기도록 내버려둔 건 전적으로 자신임을 남자는 알고 있었다. 교단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남자는 여자와의 관계가 찰흙으로 빚은 인형처럼 쉽게 부스러져 버릴 거라 생각했다. 한동안 혼자만의 여행을 갈 거란 장문의 메일을 보내는 것이 여자에 대한 배려의 전부였다. 남자는 자신이 장애를 가진 아이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악몽은 오랫동안 남자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날 남자는 지민이를 교실에 둔 채 운동장으로 나갔다. 지민이는 가벼운 자폐를 가진 여자애였다. 말투가 단조롭고 비슷한 톤으로 어눌하게 말을 했지만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을 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학습능력은 좀처럼 향상되지 않았다. 한 달 넘게 구구단을 가르쳤지만 아이는 돌아서면 숫자를 잊었다. 남자는 늦게까지 아이를 잡아두고 구구단을 외게 했다. 삼일은 삼, 삼이는 육, 삼삼은 구. 구구단 외는 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운동장으로 나갔다. 공을 차는 아이들에게 패스와 드리블을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교실에 돌아왔을 때 남자가 본 건 교실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떨고 있는 지민이었다. 아이의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오줌을 지린 속옷이 반쯤 벗겨져 있었다. 범인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방과 후 체육관 뒤편 담장에 모여 담배를 피우던 육 학년 아이였다. 학교로 찾아온 지민이의 엄마는 다짜고짜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이 병신 때문에 당신이 월급을 받는 거야. 그러면서 이럴 수 있어?”

그녀는 한참 동안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교실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다친 새끼를 바라보며 울부짖는 암소의 몸부림이었다. 아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그런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남자를 내내 괴롭혔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남자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한동안 교육청에 불려다니던 교감은 남자가 건넨 사직서를 말없이 받았다. 남자는 두려웠다.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는 것. 하나를 지키려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이것을 움켜쥐려면 저것을 놓아야 한다. 언젠가 그것은 신념을 배반하는 구실이 될 것이다. 그것이 부임 첫해 남자가 깨달은 세상의 전부였다.

봄방학이 시작될 무렵 남자는 짐을 챙겨 학교를 떠났다. 아이를 그 상태로 두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교사의 무력함을 인정한 채 떠나야 했다.

남자는 낚싯대를 정리해 배낭 옆에 놓는다. 이제는 슬슬 늪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애초에 이곳에 온 것부터 무책임한 짓이었는지 모른다. 뒤늦은 회한이란 얼마나 이기적인가.


“아이고 선상님, 여기서 뵙는군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여자가 뒤를 돌아봤다. 늪으로 가는 길목에서 노인이 반갑게 인사했다. 여자는 손녀 아이를 등교시키러 학교에 온 노인과 몇 번 인사한 적이 있다. 샛길로 들어온 노인의 옷은 온통 흙이 묻어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민선이는 잘 있죠?”

“그럼요. 방학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심심하다 야단입니다.”

“도서관에 오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그게 이 녀석이 방학이라 학교 가기가 영 내키지 않나 봅니다. 시골이 되놔서 학원이 제대로 있는 것도 아닌데.”

삼 학년인 민선이는 작년 겨울에 서울에서 전학 왔다. 이혼한 작은 딸을 대신해 노인 내외가 손녀를 맡아 키우고 있었다.

“근데 선상님이 여기 어쩐 일인지.”

“아 네. 바람이나 쐴까 해서요.”

어쩐 일이냐는 말에 여자는 당황했다. 이 넓은 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게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여자는 방학 후 처음으로 정성들여 화장을 했다. 혼자 바람을 쐬러 오기엔 어울리지 않을 치장에 내심 뜨끔했다.

“그나저나 생태공원이 너무 한적하네요.”

“겨울인데다 이른 시간이라. 게다가 비가 오지 않아 풀조차 말라 버려 볼 것도 없죠.”

늪을 가리키며 말하는 노인의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낸 늪 또한 노인의 얼굴처럼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여기마저 공장이 들어선다니. 거 참!”

타이어 공장이 들어온다는 말은 여자도 들어 알고 있었다.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자연생태 늪에 공장이 들어서면 반딧불이는 머잖아 사라져버릴 거란 것도.

“그럼 저는 이만 갑니다.”

“네네 조심해서 가세요.”

내심 가주길 바란 마음을 눈치 챘는지 노인은 늪 저편으로 걸었다. 몇 걸음 걷던 노인은 이내 멈춰서며 말했다.

“참, 저기 늪 쪽에서 웬 젊은 남자가 빈 낚싯대를 가지고 장난칩디다. 이상한 사람인지 모르니 선상님도 어여 들어가세요.”


낚싯대와 텐트를 정리하던 남자는 깍지 낀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스트레칭한다. 쪼그리고 앉아 있느라 어깨가 찌뿌듯하다. 널브러진 물건을 배낭에 마저 쑤셔 넣는다. 보온병은 배낭 주머니에, 침낭은 바람을 빼고 끈으로 고정시킨다. 낚시의자와 코펠을 정리해 배낭에 매단다. 다 먹은 컵라면 용기는 편의점 로고가 찍힌 비닐봉지에 넣는다. 읍내 터미널에 가면 서울행 고속버스를 탈 수 있을 것이다.

읏차- 소리를 내며 묵직한 배낭을 둘러매고 걷기 시작한다. 몇 걸음 걷던 남자는 자리로 돌아와 바닥에 널브러진 담배꽁초를 주워 비닐봉지에 넣는다. 남자는 늪 주변을 크게 두르며 걷는다. 늪은 생각보다 넓다. 물을 마시는 소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지역민들은 이 늪을 우포(牛浦)라 부른다고 했다.

“이곳은 습지예요. 습한 지역이란 뜻이죠. 늪이란 표현이 더 익숙하지만.”

언젠가 여자가 했던 말이다. 남자는 그날 처음 습지를 보았다. 남자의 머릿속에 그려진 늪의 이미지는 동요에 나오는 악어 떼가 나올 것처럼 음산한 곳이었다.

-정글 숲을 지나서 가자. 엉금엉금 기어서 가자. 늪지대가 나타나면 악어 떼가 나올라.

어린 시절 선생님의 풍금에 맞춰 부르던 노래가 떠오른다. 악어 떼가 나올라 라는 대목에서 아이들은 큰소리로 악어 떼를 외쳤다.

-악어 떼가 나올라. 악어 떼! 악어 떼! 악어 떼!

늪에선 정말 악어가 나올 것만 같았다. 두 눈부터 천천히 물 밖으로 기어오는 악어. 늪은 으스스하고 칙칙한 곳이다. 그러나 늪은 또 다른 이면을 숨기고 있다. 생명을 원천이자 그 안에 갇힌 자를 빨아들이는 힘을 가진 곳.

남자는 늪 주변을 천천히 걷는다. 그때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금연 구역입니다.

-이곳은 낚시가 법으로 금지된 곳입니다.

노란 바탕에 적힌 붉은색 경고 문구. 그렇거나 말거나 남자는 이제 이곳에 올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곳은 추억 생성이 금지된 지역입니다. 이젠 다른 곳에서 추억을 만드세요.

그런 문구가 적힌 이정표를 상상하며 생태공원 입구 쪽으로 걷는다. 남자는 한산한 늪 사이 길을 걸어 그곳을 벗어나고 있었다.


여자는 조금 전 왔던 길로 돌아갔다. 억새밭을 지나 늪 사이로 난 길로 들어서자 거대한 늪지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만 년 전 지구에 떨어진 운석의 흔적인지도 모를 거대한 늪. 드러누운 거대한 소 모양을 한 습지. 그곳에서 빈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는 위험한 남자.

“미끼가 없잖아요. 무슨 미끼도 없는 낚싯대로 낚시를 해요?”

여자는 언젠가 빈 낚싯대를 늪에 드리운 채 낚시하던 남자를 떠올린다.

“소인은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군자는 뜻을 얻기 위해 움직인다고 했지. 난 지금 낚시를 하는 게 아니야.”

여자의 물음에 남자는 꽤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순간 웬 오뉴월 개소리인가 했다.

“뭐예요. 지금 장난하는 거예요?”

“그럼 진담인 줄 알았어?”

남자가 쿡- 하며 웃었다. 남자가 웃자 여자도 어이없이 따라 웃었다.

“말해 봐요. 미끼는 왜 달지 않은 거예요. 이래선 낚을 수 없잖아요.”

“별다른 이유 없어. 미처 미끼를 못 구했을 뿐이야. 꼭 뭔가를 잡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여자는 그런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삼 학년이 되자 친구들은 진로문제를 고민했다. 호주로 캐나다로 하나둘 어학연수를 떠나고 남겨진 동기들은 무언가를 배우느라 늘 바빴다. 교대에 입학할 성적이 되지 않아 특수교육학과를 지원했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대며 유학을 떠나거나 다른 진로를 찾아 나선 그들을 보며 여자는 자신이 특수교육을 선택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테레사 수녀와 같은 성인이 되려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현실을 인정하고 솔직해질 수 있는 그들이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아니 다른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더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갈대 사이를 달리며 여자는 지나간 기억을 더듬는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남자에 대한 서운함이 잦아질 때쯤 남자에게 일어난 사건을 들었다. 남자가 교단을 떠난 후 여자는 마음에서 그를 지우리라 마음먹었지만 인영이가 죽은 날 여자는 남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마음도 이랬을까. 전날부터 어지러움을 호소했다는 인영이. 어릴 때부터 약을 달고 다니던 아이. 아이는 왜 내게 아프다고 말하지 않은 걸까. 여자는 남자를 위로해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한동안 늪을 헤맸지만 노인이 알려준 곳에 빈 낚싯대를 드리운 남자는 없었다. 대신 낚싯대를 드리운 흔적만이 누군가 이곳에 머물렀음을 알려주었다. 여자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쩌면 이대로 그를 놓아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매번 그와의 운명은 이렇게 엇갈리기만 하는 걸까.


늪을 따라 걸었을 뿐인데 언제부턴가 늪이 보이지 않는다. 늪은 물의 높이에 따라 매번 모양이 바뀐다. 지난여름의 홍수로 늪이 또다시 모습을 바꾼 모양이다.

늪을 벗어나 한참을 걷자 농지와 도로가 보인다. 남자는 내일부터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재정이 넉넉지 않은 대안학교에선 교사가 잡다한 행정 처리까지 맡아야 했다. 주말을 낀 나흘간의 휴가 동안 학교에 두고 온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종종 지민이의 멍한 눈이 생각날 때도 있지만 아이들에게 파묻혀 있다 보면 상처는 조금씩 아물었다. 그즈음 마음 한구석에서 거부해오던 여자를 떠올렸다. 남자는 스팸 메일만 가득한 메일함을 열어 편지를 썼다. 마음과 달리 쓸데없는 이야기만이 쏟아져 나와 몇 번이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구구절절한 내용을 대부분 삭제하자 단 한 줄의 메시지만 남았다.

‘주말 동안 예전의 그 늪에서 낚시할 생각이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은 여기까지야.’

그렇게 내뱉어보지만 여자는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다. 그는 늦은 밤까지 기다린 걸까. 무슨 일로 다시 온 걸까. 이전의 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차라리 전화를 할 것이지 언제 읽을지 모를 메일은 왜 남긴 걸까.

여자는 체념하듯 하늘을 올려다봤다. 초겨울의 하늘은 새파랗기만 하다.

풀이 죽어 생태공원으로 돌아온 여자는 공원에 놓인 그네에 앉아 하이힐 뒤축으로 땅바닥을 민다. 그네의 삐걱거림이 오늘따라 귀에 거슬린다.

두 달 전만 하더라도 여자는 인영이와 함께 그네를 탔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아이의 손을 이끌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무럭무럭 피어나는 저녁연기

동요의 앞부분을 부르면 아이는 곧잘 뒷부분을 따라 불렀다.

여자는 혼자 그네를 밀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인적이 드문 평일의 생태공원은 조용하기만 하다. 멀리 가지가 앙상한 나무를 바라보다 일어나 차에 오른다. 차에 시동을 걸자 몇 번 덜덜대더니 시동이 꺼졌다. 안전띠를 풀고 시트를 뒤로 완전히 빼고 기댄다. 늪을 헤맨 탓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해가 바뀌면 아니 학자금 대출을 다 갚고 나면 고물차부터 어떻게 해버려야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시동을 건다. 이번에는 제대로 시동이 걸린다. 천천히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자 차는 서서히 생태공원을 벗어난다. 여자는 가만히 핸들을 감싸 쥔다. 알 수 없는 눈물이 눈가를 적신다.


지나가는 경운기를 얻어 탄 남자는 얼얼한 엉덩이를 이쪽저쪽 바꿔 가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총각은 여기 왜 왔어? 늪에 놀러 온 거야?”

양파를 가득 실은 경운기를 모는 노인은 외지인과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였다.

“뭐라고요? 시끄러워서 잘 안 들려요.”

탈탈대며 아스팔트를 박차는 경운기 소리에 귀가 얼얼하다.

“왜 왔냐고!”

“늪 보러왔죠.”

“늪이 총각 애인이야? 애인 만나야지. 늪에 버려두고 온 거 아냐?”

남자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항상 마음 언저리에서 남자를 빨아들일 것만 같던 여자를 늪에 버리고 온 것일까. 어쨌든 한동안 남자의 마음을 지배하던 늪은 조금씩 자취를 감추다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타이어 공장에 가려져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 반딧불이처럼 여자 역시 늪 속으로 조금씩 가라앉을 것이다.

“서울 가려면 빨리 가는 게 좋아. 비 온대! 기상 속보 떴어.”

“뭐가 온다고요?”

“비가 온다고, 비! 오후에 비 온다고!”

노인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갈래 길에서 내린 남자는 추수가 끝난 논밭 사이로 걸었다. 겨울이 오기 전 벼를 벤 논에 불을 놓을 것이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채 도로를 따라 걷는다. 이 길로 쭉 가면 터미널이 있는 읍내가 나올 것이다. 걸을 때마다 배낭에서 덜그럭대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부지런히 걷는다. 어느새 등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때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남자의 뺨을 스쳤다. 빗방울이다. 빗방울이 조금씩 뺨을 적시기 시작했다. 남자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잿빛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린다. 그 순간 남자는 생각했다. 늪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초겨울의 시골 길은 한산하다. 추수가 끝난 논은 벼를 벤 자리마다 분필 조각처럼 둥글게 만 볏짚 더미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차는 논밭으로 가득한 한산한 도로를 달린다. 여자는 읍내로 가려다 말고 핸들을 꺾어 아이들이 있는 학교로 향한다. 그곳이야 말로 자신이 있을 곳이라 생각했다.

차는 천천히 시골 길을 달린다. 사방이 조금씩 잿빛으로 변하더니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떨어진 물방울이 모여 어느새 차창을 적신다. 여자는 와이퍼를 켠다. 좌우로 오가며 창을 닦아내던 와이퍼의 회전이 점점 빨라진다.

와이퍼의 회전축 사이로 누군가 길을 가는 게 보인다. 오십여 미터 앞에 커다란 캠핑배낭을 멘 남자가 뒤뚱거리며 걷고 있다.

‘이 계절에 캠핑이라니.’

혼잣말을 내뱉으며 여자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남자를 지나치려했다. 속도가 붙은 차가 간신히 남자를 지나쳐 갈 즈음이었다. 남자가 차를 향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여자는 백미러를 확인한다. 기억 속 그를 닮은 이가 백미러 저편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초겨울의 늪에는 비가 내렸다. 쏴아-하고 쏟아져 내린 비는 늪 근처에 피어난 식물의 목을 축여주었다.

노인은 물이 불어난 늪 사이로 쪽배를 저어갔다. 기다란 장대로 바닥을 밀칠 때마다 배는 조금씩 앞으로 나갔다. 물 위 여기저기 부표가 떠 있다.

물 가운데로 간 노인은 가지고 온 통발을 물속에 넣고 고정한다.

작업이 끝난 노인은 배 한 쪽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통발을 지그시 바라본다.

이내 노인은 장대를 집어 물을 밀쳐 배를 움직인다. 늪 한가운데는 한 척의 쪽배만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다.


글 - 김경락 '늪'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 소설부분 은상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 http://www.kyongbu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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