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식품 - 「삶의 향기 2022. No.32」
반도네오니스트가 된 건축학도 이어진
건축공학도와 탱고 음악 연주자. 극과 극인 것만 같은 두 분야인 까닭에 쉽게 떠오르지 않는 그림이다
그래도 교차점은 있다.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분야의 유일한 교차점, '인간 이어진'이다.
의외로 건축과 음악이 꽤 닮았다는, 서울대 건축공학 박사 출신 반도네오니스트 이어진 씨를 만났다.
하모니카 들으며 책으로 집을 짓던 아이
어린 시절, 이어진 씨는 아버지의 책으로 집을 지으며 놀았다.
책들을 단단하고 안전하게 쌓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녀의 곁에는 늘 하모니카를 부는 어머니가 있었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어머니는 하모니카를, 어진 씨는 멜로디언을 연주했다.
어릴 때는 피아니스트의 삶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자, 음악은 취미가 됐다.
건축과 환경 등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전공을 결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건축공학도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그녀의 곁에는 여전히 음악이 있었다.
"아마 제가 반도네오니스트가 된 데는 어머니의 영향도 있을 거예요.
어머니께서는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물려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유일하게 연주하는 악기가 하모니카였거든요.
반도네온 소리가 하모니카랑 비슷해서 반도네온이 더 친근했나 봐요.
전 음악만큼 무언가를 손으로 만드는 것도 좋아했어요.
완전한 이과 성향이기 때문에 전공 선택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구조물의 안정성을 연구하는 분야인 구조공학을 전공했는데,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제 성향과 잘 맞았어요.
제가 건축을 공부하다가 음악을 한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저를 도전적이고 모험심이 강한 사람으로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돌다리도 두세 번 두드려보고 건너는 스타일이에요.
이런 안정감 속에서 느껴지는 부조화를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요."
반도네온을 만나기 전까지의 이어진 씨의 삶은 그야말로 평화로운 바다 같았다.
관심 있는 분야를 전공하며 좋아하는 음악을 취미로 즐기는, 그야말로 조화로운 하루하루였다.
그녀의 평화로운 삶에 파도가 친 것은 '매력적인 어긋남'이 들려왔을 때였다.
반도네온 소리였다.
거슬렸던 반도네온 소리에 중독되다
클래식 음반 컬렉터였던 한 선배의 차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래머의 '피아졸라 헌정 앨범'을 우연히 듣게 됐다.
때마침 남미 음악과 재즈를 즐겨 듣던 때라 남미의 탱고 거장이라 불리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음악 자체만 즐겼다.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었던 반도네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피아졸라 헌정 앨범'을 수차례 들은 후였다.
어진 씨는
"한 번씩 음이 어긋나는 게 정말 거슬렸는데, 이상하게 자꾸 생각났다."라며 반도네온에 마음을 뺏긴 순간을 떠올렸다.
그렇게 점점 반도네온의 매력에 중독됐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반도네온을 배워볼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저 음악을 즐기는 것 자체가 좋았다.
반도네온을 본격적으로 배워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장국영을 굉장히 좋아해서, 매년 열리는 추모 영화제에 갔어요.
종일 장국영 영화를 틀어주는데, '해피투게더'의 배경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인데, 거기에 피아졸라의 음악이 쓰였어요.
영화를 보면서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반도네온을 연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09년, 반도네온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하러니 막막했다.
이미 전공 분야에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고, 33세라는 늦은 나이도 고민이었다.
무엇보다 국내에서는 악기조차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던 중 아르헨티나에서 유학 중인 우리나라 최초 반도네오니스트 레오 정과 연락이 닿았다.
반도네온을 배우기 위해 아르헨티나 유학을 고민 중이라는 그녀에게 레오 정은
'반도네온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줬다.
이 이야기에 수긍한 어진 씨는 한동안 피에 졸라 음악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6개월 만에 반도네온을 향한 열망이 다시금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음악가의 길이라는 낯선 다리를 이미 두드려볼 만큼 두드려보얐기에 두려울 건 없었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레오 정에게 본격적인 레슨을 받으며, 어진 씨는 반도네오니스트의 길로 들어섰다.
건축학도, 반도네오니스트가 되다
"저도 가끔 '공식 연구를 하던 내가 갑자기 음악을 하고 있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하지만 이전에 건축학도였던 경험이 음악 활동에 도움 되는 것은 분명해요.
음악이 숫자와 상관없어 보이지만 , 실은 연관이 깊어요.
도에서부터 12개의 음이 있고, 그 음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서 조화로운 음악이 되니까요.
사실 음악이 굉장히 구조적인 분야인 셈이지요.
재즈도 화음이나 코드를 이야기할 때 숫자로 말해요.
조화로움 속의 엇나감을 재즈에서 텐션이라고 부르는데, 저는 그 텐션에서 희열을 느낍니다."
반도네온은 왼손 33개, 오른손 38개 도합 71개의 버튼이 있어 무려 142음이라는 음역대를 연주할 수 있다.
버튼은 음계와 상관없이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고 악기를 벌리고 모을 때 음이 달라지기에 연주하기 여간 어려운 악기가 아니다.
그러나 어진 씨는 반도네온을 배운 지 3년 만에,
한국인 최초로 클링엔탈 아코디언 콩쿠르(2015) 아코디언 솔로 부문에 도전하여 준우승이라는 값진 결과를 얻었다.
이 대회 이후 어진 씨는 반도네온에 오롯이 전념했다.
그녀의 스승인 레오 정과 함께 반도네온 제작 공방을 함께 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반도네온에 온전히 쏟아냈다.
어진 씨는
"수리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반도네온의 본 고장인 독일에 가기도 했어요.
원리를 파악하면서 뜯어보고 제작방법을 익혔습니다.
원래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힘들지는 않았어요.
다만 반도네온 자체가 워낙 까다롭고 예민한 악기이다 보니,
다음 그리고 그다음까지 염두에 두고 제작해야 하더라고요.
무조건 좋은 재료를 쓴다고 좋은 반도네온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요."라며 해맑게 웃었다.
덧붙여
"직접 제작을 하니 연주 중간에 반도네온이 고장 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라며
"연주할 때 반도네온과 하나 됨을 느끼는 순간이 가장 짜릿하다"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헨티나 탱고의 대표 악기인 반도네온은 '탱고의 영혼'이라고 불린다.
그래서인지 연주자들도 음악과 하나 되는 순간을 왕왕 맞이한다.
어진 씨도 그런 순간을 가장 좋아하기에 더욱 경계하고 았다고.
"연주를 하면서 혼자 씩- 하고 웃는 순간이 있어요.
음악과 동화가 되는 순간인 거지요.
그럴 때 짜릿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동화되는 순간을 경계해야 하는 것도 알아요.
그 순간에 실수가 나오거든요.
탱고 음악 자체가 희로애락을 담은 마이너 한 음악이에요.
벨벳처럼 부드럽지만 찌르는 듯한 소리가 나는 반도네온은 그런 탱고 음악에 가장 잘 맞는 악기이고요.
그래서 사실 저는 다른 악기와 함께 하는 듀오 작업이 정말 즐거워요.
탱고적 뉘앙스를 맞추는 게 쉽지 않은데, 다른 악기와 이러한 뉘앙스를 맞췄을 때 느끼는 희열이 엄청나거든요.
내년에는 다른 악기와의 콜라보 연주를 많이 해볼 생각입니다.
또 음반 발매도 준비하고 있어요.
지금 한창 작업 중인데 2022년 상반기에는 음반을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의 파도 위에서 자유롭고 싶은 반도네오니스트'
이어진 씨가 첫인사로 소개한 말이다.
이보다 완벽하게 이어진 씨를 소개하는 말이 있을까 싶다.
인생이란 거대한 바다에서 건축학도, 반도네오니스트, 반도네온 제작자 등
다양한 파도 위를 거침없이 오르며, 자유롭게 유영하는 이어진 씨의 모습이 그려진다.
앞으로 그녀의 삶에 어떠한 파도가 오든 반도네온 선율에서 자유로이 유영하길 바란다. (p09)
동서식품 - 사람과 사람, 함께하는 삶의 향기 2022. No.32
동서식품 홈페이지 - www.dongsu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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