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로댐 클린턴 - 「살아 있는 역사 1 - (비매품)」
나는 퍼스트레이디나 상원의원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민주당원으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변호사로도 태어나지 않았고, 여성의 권리와 인권의 옹호자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아내나 어머니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나는 20세기 중엽에 한 미국인으로 태어났다.
그 시기에 미국에서 태어난 것은 행운이었다.
과거 세대의 미국 여성들이 얻지 못했고 오늘날에도 세계의 많은 여성들이 감히 상상조차 못하는
선택의 자유를 나는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사회 격변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성년이 되어,
세계 속에서 미국이 갖고 있는 의미와 역할에 대한 정치적 투쟁에 참여했다.
내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절대로 나처럼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은 여자가 나처럼 산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의 약속을 나에게 주었고, 그것이 내 삶과 내 선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 우리 부모님은 미국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미국의 가치는 대공황을 이겨낸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믿는 세대였다.
그분들은 겉으로 내세우는 간판이 아니라 근면의 가치를 믿었고, 방종이 아니라 자립을 지지했다.
1947년 10월 26일 내가 태어난 세계와 가정은 그러했다.
우리는 미국 중세부의 중산층이었고, 그 시대와 장소의 전형적인 산물이었다.
어머니 도로시 하웰 로댐(Dorothy Howell Rodham)은 나와 두 남동생 주위를 맴돌면서 하루를 보내는 주부였고,
아버지 휴 E. 로댐(Hugh E. Rodham)은 소규모 사업가였다.
부모님의 생활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얻은 기회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고맙게 생각했다.
결손 가정에서 외롭게 자란 어머니가
그처럼 자애롭고 분별있는 여성으로 성장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따름이다.
... 어머니 도로시 하웰은 타이피스트로 일하려고 어느 직물회사를 찾아 갔을 때,
순회 판매원인 휴 로댐과 눈이 마주쳤다.
도로시는 휴 로댐의 활력과 자신감과 유머 감각에 반했다.
우리 부모님은 오랫동안 연애를 하다가,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한 직후인 1942년 초에 결혼하여
미시간 호와 기까운 시카고의 링컨 공원 구역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 아버지는 늘 자식들한테 엄격했지만, 나보다는 아들들한테 훨씬 엄격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야단맞은 남동생들을 자주 감싸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할아버지를 따랐다.
우리 세 남매는 어렸을 때 스크랜턴의 다이아몬드 가에 있는 할아버지의 연립주택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해마다 여름에는 할아버지가 1921년에 포코노 산맥에 마련한 산장에서 8월의 대부분을 보냈다.
스크랜턴에서 북서쪽으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그 산장에서는 위놀라 호수가 바라보였다.
소박한 통나무 산장에는 부엌의 무쇠 풍로를 제외하고는 난방시설도 없고,
실내에 목욕통은 커녕 샤워기도 없었다.
그래서 몸을 씻으려면 호수에서 헤엄을 치거나 뒤곁에서 다른 사람이 부어주는 물로 대충 샤워를 했다.
널찍한 앞마당은 우리가 좋아하는 놀이터였고,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카드놀이를 했다.
우리에게 피너클 게임을 가르쳐준 것도 할아버지였다.
피너클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재미난 놀이라는 것이 할아버지의 지론이었다.
이 산장은 아직도 우리 가족의 소유로 남아 있고, 여름을 그곳에서 보내는 집안 전통도 여전하다.
빌과 나는 첼시가 두 살도 되기 전에 처음으로 위놀라 호수에 데려갔다.
내 남동생들도 해마다 여름을 그곳에서 보낸다.
고맙게도 남동생들이 산장을 조금 개수했고, 몇 해 전에는 샤워기까지 설치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기를 바랐다.
남동생들보다는 내가 어머니의 그런 뜻을 더 잘 받아들였다.
남동생들은 책보다 곤경에서 배우기를 더 좋아했다.
어머니는 나를 매주 도서관에 데려갔다. 나는 도서관의 아동서적을 열심히 읽었다.
부모님은 내가 다섯 살 때 텔레비전을 샀지만, 어머니는 내가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카드놀이와 모노폴리나 클루처럼 판 위에서 말을 움직이는 보드게임을 많이 했다.
나도 어머니와 마잔가지로 보드게임과 카드놀이가 아이들에게 수학적인 계산 능력과 전략을 가르쳐준다고 믿는다.
내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어머니는 내 숙제를 모두 도와주였지만, 수학만은 아버지에게 맡겼다.
어머니는 내 작문을 타자기로 쳐주었고,
중학교 가정 시간에 스커트를 만들려다가 망쳐버렸을 때는 나를 곤경에서 구해주었다.
어머니는 가정과 가족을 사랑했지만, 인생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너무 제한되어 있다고 느꼈다.
여성이 무한정한 선택의 자유에 매몰되어 있는 듯이 여겨지는 요즘에는
어머니 세대의 선택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었는지를 잊기 쉽다.
우리가 어느 정도 자라자 어머니는 대학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졸업은 못했지만, 논리학에서 아동심리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목에서 많은 학점을 땄다.
... 나는 부모님의 가치관이 서로 밀고 당기는 와중에서 성장했고,
그래서 나의 정치적 신념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치관을 둘 다 반영하고 있다.
남녀의 성별적 차이는 우리 같은 가정에서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기본적으로 민주당원이었지만, 공화당을 지지하는 파크리지에 살 때는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버지는 완고하고 자립적이며 보수적인 공화당원이었고, 그것을 언제나 자랑으로 여겼다.
아버지는 또한 손에 들어온 돈은 좀처럼 내놓지 않는 구두쇠였다.
아버지는 외상 거래를 좋게 생각지 않아서, 엄격한 현금지급주의로 사업을 꾸려나갔다.
아버지의 이념은 자립정신과 개인적 성취욕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오늘날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과는 달리 국가 재정의 신뢰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했고,
그래서 납세자가 고속도로와 학교와 공원을 비롯한 중요한 공공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적극 지지했다.
... 아버지는 엄격한 감독이었지만, 우리는 아버지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4학년 떄 메츠거 선생님이 매주 산수 시험을 보았는데,
내가 셈이 너무 느려서 산수 문제를 다 풀지 못할까봐 걱정하자 아버지는 아침 일찍 나를 깨워서
구구단을 연습시키고 나눗셈을 가르쳤다.
겨울이면 아버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밤중에 난방을 껐다가 동트기 전에 일어나 다시 난방을 켜곤 했다.
나는 아버지가 마치 밀러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깰 때가 많았다.
남동생들과 나는 용돈을 기대하지 않고 집안의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내가 너희를 먹여 살리잖니?"하고 아버지는 말하곤 했다.
나는 열 세 살이 되던 여름에 처음으로 파크리지 공원과에서 일거리를 얻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아침에 우리 집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소공원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아침 일찍 우리 집에 한 대뿐인 차를 타고 출근했기 때문에,
나는 손수레를 끌고 공원과 집을 오가야 했다.
(손수레에는 야구공과 방망이, 줄넘기 줄을 비롯한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여름마다 일거리를 얻었고, 1년 내내 일할 때도 많았다. (p29)
※ 이 글은 <살아 있는 역사 1>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힐러리 로댐 클린턴 - 힐러리 로댐 클린턴: 살아 있는 역사1 - (비매품)
역자 - 김석희
(주)웅진씽크빅 - 1980. 0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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