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래 - 「나는 치사하게 은퇴하고 싶다」
.... 지난 3월,
미국 중부 네브레스카 주에 있는 작은 도시 오마하(omahn)로 출장을 다녀왔다.
출장 당일 기내에서 지루한 시간을 때우려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오마하라는 단어가 포함된 영화 광고에 눈이 갔다.
출장지이기도 한 오마하는 세계적인 갑부 워런 버핏(Warren Edward Buffett)이 살고 있긴 하지만,
인구 45만 명의 작은 도시일 뿐이라 어떻게 영화 속에서 다뤄졌을지 궁금해졌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알게 된 것이지만
싱겁게도 영화 속 주인공이 다니는 회사의 본사가 오마하에 있을 뿐
영화에서 그 도시가 특별한 의미를 갖지는 않았다.
영화 제목은 <인 디 에어(Up in the Air)>였다.
단순히 도시 이름에 끌려서 보게 된 영화였지만,
순간순간의 대사들이 나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기내에서도 나는 그 영화를 거푸 2번이나 더 보았고,
수첩에 영화 속 대사를 꼼꼼히 적기까지 했다.
내용은 과연 이런 직업이 있을까 싶은 해고 통보 대행업자의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직장인들에게 저승사자나 다름없는 해고 전문가 조지 클루니(George Timothy Clooney)였는데,
그의 업무는 연중 322일 동안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대상자를 면담하고 난 후
그 자리에서 해고를 통보하는 일이었다.
그가 해고 대상자를 만나 꺼내는 첫 마디는 정말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귀하의 앞날을 상의하려 왔습니다."
갑작스러운 해고통보에 대상자들이 내뱉는 현실적인 대사들은
마치 내가 그 상황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회사를 위해 30년의 세월을 바친 결과가 고작 이거란 말입니까?"
"여기서 생산 실적 1위인 나를 자른다고?
나한테 맺힌 게 많은 모양이군!"
"어이가 없네요.
대체 왜 나를 해고하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있나요?
그러니까 내 말은, 내 과거 실적이 문제냐고요?"
"10년 동안 충실한 직원으로 일해온 나를 겨우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건가요?"
"제, 제가 해고된 건가요?
정말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실망스럽네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뭐라고 했으면 좋겠소?"
"지금 이 회사가 이렇게 잘 나가고 있는 게 전부 누구 덕인데,
이제 와서 나더러 나가라고?"
정당한 해고사유가 있든 또 없어서 억울하든,
해고를 통보받는 순간 모든 이들은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예상치 못한 해고 통보에 자신을 이토록 부당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서운함이 분노로 바뀌는 것이다.
"왜 하필 저죠?
이젠 전 어쩌면 좋아요?"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전 뭘 해야 할까요?
정말 막막하네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제 딸아이에게 천식이 있어요.
소득이 없으면 딸아이 의료비도 감당하지 못할 텐데
"이제 주택대출금도 갚지 못하게 되었네요.
전 어쩌죠?"
"연봉이 꽤 됐는데,
실직자가 되면 일주일에 30만 원이나 받을 수 있을까요?"
연민에 호소하거나 앞일을 걱정하는 대사도 해고 전문가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전문가들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지만 보다 체계적인 대화를 꺼내기도 한다.
"이력서를 보니 프랑스 요리를 전공하셨더군요.
대부분의 학생이 KFC에서 치킨을 튀기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데 반해,
당신은 '일피카도르'에서 식탁을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셨더군요.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 이 회사에 입사하셨죠?
그렇다면 당신의 꿈을 포기하는 대가로 회사가 당신에게 얼마를 지급했나요?"
"연봉 3,200만 원이요."
"그럼 언제쯤 이 일을 그만두고 다시 좋아하는 일로 복구해서 행복을 찾으실 계획인가요?"
"질문이 참으로 요상하네요."
"전 평생 한 회사에서 근무한 사람들을 봐왔습니다.
다들 당신과 똑같았죠.
칼같이 출근해서 칼같이 퇴근하고. 행복한 시간이란 눈곱만큼도 없더군요.
하지만 이젠 기회가 온 겁니다.
부활한 것이나 다름없지요.
본인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자녀를 생각해서라도 도전하세요.
자수성가하고 꿈을 이룬 이들도 한때는 이런 해고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제 내일부터는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그동안 못했던 운동도 하시고요.
야외로 나가서 조깅하시는 것도 괜찮겠네요."
퇴직이 과연 부활이고 새로운 도전의 기회일까?
야외로 나가서 조깅하는 기회까지 준다고?
감언이설(甘言利說)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속지 않을 수 없다.
"저 해고당하는 것 맞죠?"
"아닙니다.
귀하의 앞날을 논의하는 것뿐입니다."
"감언이설로 에둘러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요점은 알아들었으니까요.
그렇다면 회사의 제안은 뭐죠?"
"이 서류를 보시면 알 거예요.
계약 해지에 관한 내용과 혜택 사황이 잘 정리돼 있거든요."
"그냥 핵심만 짚어주세요."
"생각보다 좋아요.
월금 3개월치, 의료보험료 6개월치,
당사의 기술학교를 통한 1년간의 구직 서비스 등."
"구직 서비스라?
그거 배려 깊은 서비스네요."
"기대하시는 연봉 1,200만 원을 기준으로 보면,
구직에 보통 한 달 정도 걸립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전 확실한 계획이 있으니까."
"정말이요?"
"집 근처에 아름다운 다리가 하나 있죠.
저는 거기서 뛰어내릴 계획이네요."
"....."
앞날에 대한 논의와 해고의 차이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
해고를 앞둔 이는 닥쳐올 고통을 극복할 극단적인 방법을 찾아낸 셈이었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영화 대사의 일부이고 똑같은 상황에서 이렇게 대응하는 이는 없겠지만 말이다.
대한민국 남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은퇴'라는 두 글자일 것이다.
차라리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후보로 머물러 있었다면 보다 큰 실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수많은 관중 앞에서 마음껏 달려보지도 못하고 교체되는 선수의 심정이랄까?
아니다, 그것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짜내려 해도 은퇴에 대한 심정과 비교할 만한 적당한 대상이 떠오르질 않는다.
채무, 실패, 질병, 이혼, 사망 등
온갖 어두운 단어를 나열해봐도 역시 은퇴보다 두려운 것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은퇴는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p29)
※ 이 글은 <나는 치사하게... >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김형래 - 나는 치사하게 은퇴하고 싶다
청림출판 - 2010.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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